155화.
화들짝 놀라 벌벌 떠는 나를 바라보 던 아벨이, 미하일에게 물었다.
“거기가 어디예요?”
“신서 (神書)에 나오는 곳입 니다. 태초에 가이오니아가 만든 사후세계라 고 해야 할까요. 살아생전에 끔찍한 죄를 저지른 인간들은 환생의 축복을 박탈당하고, 그 영혼이 오르쿠스에 영원히 귀속되지요.”
“네?”
놀랐는지 아벨이 바짝 굳었다.
신전에서 집필한 신서는 가이오니아가 세계를 창조한 이후의 여러 행 보들을 엮어낸 책이었다.
프로크레아토르의 세계에 비유하자 면 성경 같은 것이었는데, 모두가 용신 가이오니아를 찬양하는 제국에서는 거의 교과서처럼 읽히곤 했다.
무신론자 하데스가 이끄는 루버몬트 출신인 아벨은 신서를 공부하지 않아 오르쿠스를 알 턱이 없었고.
놀란 아벨을 보며 미하일이 덧붙였다.
“신서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만, 그 것보다는 조금 더 끔찍한 곳입니다. 가이오니아의 통제를 벗어나는 온갖 힘 있는 마수들과, 생전 그의 자식이 었으나 강한 힘을 가지고도 복종하지 않은 인간들이 환생도 하지 못하고 영겁의 고통을 받고 있는 곳이지요. 쉽게 말하자면 그곳은…….”
“지옥이야.”
충격 받은 아벨을 보며 말끝을 흐리 는 미하일을 대신해, 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 숨을 삼키고 나를 응시했다.
지옥, 오르쿠스.
그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오르쿠스는 말 그대로 지옥이 었다.
나나 미하일 또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
가이오니아에게 받은 저주는 전생을 기억하는 끝없는 윤회였으므로, 우리는 지옥 문턱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그곳을 찾아가야 할지도 알 수 없었고, 가능하지도 않을 듯했다. 우리는 무한히 환생하는 존재들이니까.
“오르쿠스가…… 확실해?”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미하일에게 물었다.
그는 메마른 시선으로 허공을 더듬 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대 답했다.
“그렇게 찾으려고 해도 코빼기도 안 보였던 자야. 우리가 한 번도 가보 지 못한 곳, 갈 수 없는 곳에 있는 게 당연하지.”
“그래…….”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의심 한 번 못해본 내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자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아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 까? 가이오니아라면 크레센타 제국의 건국신을 말하는 거 아니오? 그게 뭐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 그런 거였어?”
“저기.”
미하일이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구 겼다.
“모르면 좀 조용히 할 수 없겠습니 까. 안 그래도 정신이 쏙 빠져있는 사람 앞에서 자꾸 신경 쓰이게.”
눈물자국이 말라붙은 내 멍한 얼굴을 턱짓하며 미하일이 아자르에게 짜 증 냈다.
“아니, 허……. 뭐 말을 해줘야 알 거 아냐? 주군이 어디 위험한 곳으로 라도 간 거면 구하러 가야 할 거 아니오?”
아자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으르렁거리는 둘을 말리며 내가 말 했다.
“전하는 신, 그러니까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간 게 맞아요, 아자르.”
“그게 만나러 갈 수 있는 건지 뭔 지……. 아무튼 죽은 듯 잠든 거 보면 뭔 일이 생긴 건 분명한 듯한데. 만나 서 어쩌자고 가신 겁 니까?”
“가이오니아를, 죽이려고요.”
“예?!”
“일단은 천천히 얘기해요. 나도 전하가 가이오니아에게 갔단 것만 짐작할 뿐이지, 어떻게 갔는지는 몰라요.”
대체 지옥의 입구는 어디인 거지?
미하일에게 궁금한 게 있어서 더 물 으려던, 그때였다.
우당탕, 쿵쾅, 하며 집무실 안쪽의 서재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기척이 났다.
이윽고 서재의 문이 벌컥 열리고 등 장한 건…….
‘록사?’
록사 트리볼트, 그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 이후로 많은 시 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새삼 낯설어 보이는 얼굴.
모두의 시선이 록사에게로 향했고, 그는 집무실에 우리가 모두 모여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표정으로땡 얼어붙었다.
“아, 아니, 이게 뭔…….”
“촉새? 너 여기서 뭐 하냐?”
아자르가 험악하게 물었다. 얼마나 놀랐는지 록사의 실눈이 가늘게 뜨여 있었다.
그는 옆구리에 묵직한 가죽 꾸러미 하나, 그리고 한쪽 팔에 묵직한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록사의 시선이 하데스의 집무실 책 상 위로 물끄러미 향해 있었다.
그때까지도 뭐가 있었는지 몰랐는 데, 록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뭐가 있긴 했다.
록사가 들고 있는 꾸러미만큼이나 묵직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
루버몬트의 인장이 찍힌 그 가죽 주머니는 돈 꾸러미였다. 아마도 하데스가 록사에게 남기고 간 것일 테고, 록사는 저걸 챙기기 위해 집무실로 온 모양이었다.
날카로운 촉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하데스는 록사에게 뭔가를 부탁했다. 분명히. 그리고 그 대가로 저걸 남긴 게 틀림없었다.
돈 꾸러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잠시 고민하던 록사는, 다시 질끈 눈을 감고 순간적으로 마력을 방출했다.
그의 앞에 작은 포털이 생겨났다.
도망치려는 거다.
나는 그의 재빠른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움직였다.
“미안해요, 록사 씨!”
‘지금 당장 내 앞으로 와서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해요.’
정신 지배를 걸자마자 록사의 앞에 열려있던 포털이 닫혔다. 그는 멍해진 표정으로 바짝 굳어서는 성큼성큼내 앞으로 다가왔다.
실에 걸린 마리오네트처럼 조종당 하며 내게 다가오는 록사를 보고 아자르가 몸을 떨었다.
“이제 아주 막 쓰시네. 보는 눈도 많은데…….”
아자르는 미하일을 힐끔 쳐다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미하일이야 상관없고 아벨은…… 내 능력에 이상함을 느낄 법도 하지만, 지금 내게는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다가온 록사를 향해 내가 물었다.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예요, 록사?”
“저, 그…… 전하께서 부탁을 하셔 가…….”
“무슨 부탁이요?”
“어디 가신다고 하셨지라. 뒤처리를 제게 부탁하셔가지고…….”
록사가 들고 있던 책과 묵직한 가죽 꾸러미를 내게 건넸다. 나 대신 미하일이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것저것 물약이 필요하시다기에 챙겨온 것들 좀 팔고, 이 책은 봉인해 달라고 하셔서 갖다가 제 창고에 넣어둘 생각이 었는데예…….”
“이 책이 뭔데요?”
“그건 저도 잘 모르지라. 지는 서재에 있다 나왔었는디, 갑자기 이렇게 죽은 듯 잠들어계셔가 대충 뉘어 드 린 게 다여라. 어째 뺨을 시원하게 갈 겨도 일어나질 않으셔가지고…….”
나와 미하일의 눈이 동시에 록사가 건넨 책에 닿았다.
책 표지에는 아테우스, 라는 고대어 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 자.
놀란 나와 미하일의 시선이 맞닿았다.
“이 책 어디서 난 건지 알아요?”
“일전에 전하랑 스승님께 다녀왔는 디 그때 받았던 거지라.”
“스승님이라면…….”
“마탑주 위그노어 메이도우야. 프로크레아토르의 후손이지.”
미하일이 얼른 대답하는 말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일들은 전부 프로크레아토르의 치밀한 안배였다. 아마 이 책을 자신의 후손에게 남겨 둔 것까지도.
다시 말해 이 책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찾을 수 없을 지옥 ‘오르쿠스’의 입구를 알려줄 힌트일 터였다.
미하일의 손에서 책을 받아든 내가 급히 그것을 펼쳤다.
책 안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끝까지 넘 겨보았지만 단 한 글자 도 보이 지 않는 그저 백지였다.
“이게 뭐야.”
“신을 믿지 않는 자.”
내 손에 들린 책을 다시 덮으며, 미하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테우스—라는 책 표지의 고대어를 한 손으로 홅은 그가, 가만히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 말했다.
“신을 믿지 않는 자만, 이것을 열 수 있을 거야.”
“그럼 어떻게…….”
“데보라 사제를 데려올게.”
미하일이 다급히 집무실을 나서려 했다.
그래, 데보라, 그녀도 신을 믿지 않는 자였다.
비록 미하일의 인위적인 수작으로 ‘만들어진’ 것이긴 했지만.
그때에야 나는, 내가 본 미래에서 왜 우리가 함께였는지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때였다.
급히 걸음을 돌리던 미하일이, 순간 탄성을 내뱉으며 낭패라는 듯 주먹을 내질렀다.
“젠장. 아직 무기를 찾지 못했는 데…….”
“무슨 무기?”
“빌어먹을 공작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혼자 덜렁 떠나버린 거지? 이렇 게 멍청한 자였나? 대체 무엇으로 가이오니아를 죽이 려고?”
어째선지 답답한 표정으로 미하일 은 잠든 하데스를 노려보았다.
아자르가 발끈하며 끼어들었다.
“이보쇼, 대신관. 말 좀 가려서 못 해? 멍청하다니. 지금 누구한 테…….”
“멍청하지. 강하다고 칭송받는 그 힘이 가이오니야 앞에서 먹히기나 할 것 같은가? 전부 가이오니아에게서 빌려 쓰는 힘이면서 말이야.”
미하일이 이를 갈며 덧붙였다.
“가이오니아를 죽이려면 심장을 파괴해야 해. 그리고 가이오니아의 신 형(神形)에 흠집을 낼 수 있는 건 '신을 믿지 않는 자'의 무기뿐이지. 잘난 루버몬트 공작의 불장난으로는 가이오니아의 털끝 하나 태우지 못한다 고.”
“전하는 그렇게 바보 같은 사람이 아니야, 이그니스.”
나는 공표식을 앞두고 죽어라 연무장에서 수련하던 하데스를 떠올렸다.
아마 그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이능'으로는 가이오니아를 죽일 수 없음을.
물리적인 방법으로 가이오니아의심장을 뚫을 생각이었을 테고, 그 때 문에 평소에는 잘 잡지도 않았던 검을 휘둘렀던 거겠지.
나는 소파 아래 길게 놓인 하데스의 검을 문득 발견하고는 가만히 응시했다.
“하, 이봐.”
미하일의 황당한 듯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너 대체, 신을 믿지 않는 자의 무 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미하일이 고개를 기울이며 비웃었다.
“설마 말 그대로 신을 믿지 않는 자 인 루버몬트 공작이 손에 쥔 무기라 고 생각하는 건가?”
“무슨…….”
“하긴, 공작도 프로크레아토르의 전언을 그대로 직역했으니 저 되지도 않는 날붙이 하나 가지고 오르쿠스에 뛰어든 거겠지.”
“그게 무슨 말이야?”
“신을 믿지 않는 자의 무기.”
미하일의 눈이 무섭게 번뜩였다.
“신을 추앙하는 제국과 달리 무신 론자들이 세운 나라가 있었지. 결국 가이오니아의 뜻에 따라 지금은 이름뿐인 망국이 되었고.”
“아…….”
일순 머리가 띵했다.
“그들이 만든 ‘신을 살해하는 무 기’, 그게 바로 신을 믿지 않는 자의 무기야. 애초에 그걸 구하지 않는 이 상은 감히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갈 생각도 해선 안 됐어.”
놀란 표정인 나를 보며 미하일이 덧붙였다.
“지금은 그걸 구하는 게 급선무야.”
“그게 뭔데?!”
아자르가 미하일의 어깨를 잡아 돌 리며 소리쳐 물었다.
인상을 찌푸린 미하일이 아자르의 손을 휙 쳐내며 대답했다.
“신을 믿 지 않는 자들의 나라, 산트크리아. 그곳에서 만들어졌던 보검을 말하는 거야.”
그때까지도 멍한 표정으로 멈춰있는 내게 안겨있던 아벨이, 화들짝 놀라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