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황제와, 아마도 황제와 얘기를 나누 러 갔을 하데스가 자리를 비운 공저 에서는 피로연이 진행되었다.
하데스의 부재는 고스란히 내 고생으로 이어졌다.
피로연이라고 해봐야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게 다인 자리지만, 내가 주최 자일 때는 얘기가 달라지는 법이다.
평민이나 다름없던 촌구석 귀족 영애에서 대공작가의 안주인으로 신분 상승한 신데렐라에게 관심 갖는 이들 은 수없이 많았다.
공표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귀족 들 전부와 하나하나 인사하며 나는 진이 쏙 빠지고 말았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차라리 하데스랑 새벽에 어른들의 운동을 하는 게 덜 힘들겠어.’
정말 그 정도였다.
“죽겠다.”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혼잣말을 하자, 내 옆에 붙어 이것저것 도와주 던 포트넨 백작이 흠칫했다.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인,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하하…….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 게…….”
서로 멋쩍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갑자기 공저가 술렁거렸다.
귀족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고, 멀리에는 나만큼이나 그들에게 둘러 싸여 고생 중인 아벨도 보였다.
시선을 따라가자 보인 건, 공저로돌아온 하데스였다.
그가 이렇게 반가워 보일 수 없었다.
몇 번 공저를 두리번거리던 하데스는, 나를 발견하곤 눈 맞춘 채 직진으 로 걸어왔다.
“전하, 오셨…….”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려던 나는 깜 짝 놀랐다.
그대로 다가온 하데스가 무슨 이유 에서인지 나를 덥석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이게 뭐람.’
멍한 표정으로 약 1분간 하데스의 품에 안겨있었고,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굳이 고개를 돌려 살피지 않아도 모 두가 우리를 주목하고 있음은 뻔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만 깜빡이기를 여러 번.
직진남 하데스의 돌발 행동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안았던 나를 살짝 떼어낸 그는 천천히 이마를 맞대더니 그대로 입을 맞 췄다.
“우…….”
틀어 막힌 내 입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왔다.
그냥 ‘입 맞췄다’고 담백하게 말하 기에는 조금 논란의 여지가 있는 수준의 입맞춤.
삼키듯 입술을 머금고는 꼭 맛보듯 한 번 핥아낸 짧고도 강렬한 키스 이 후, 하데스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나를 마주 보았다.
“이게…….”
혼이 쏙 빠진 채 내가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주변이 술렁거렸다.
“이야…….”
“휘유!”
민망함에 슬쩍 돌아보니 많은 이들의 흐뭇한 시선이 모여 있었다.
개중에 어린 귀족들은 환호성까지 터뜨리고…….
“뭐예요, 이게…….”
“갑자기 보고 싶어서.”
“뭐, 뭐라고요?!”
돌발 행동에 폭탄 발언까지.
내게 하는 말이었지만 모두 이곳을 주시하고 있는 와중에 하데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더 커지는 환호성에 하데스가 웃는 얼굴로 손을 들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즐거운 자리를 함께 즐겨주어서 고맙소. 모쪼록 남은 시간도 편하게 즐기다가시오.”
잘생긴 얼굴로 거만하게 웃으며 말 하는 하데스에도 귀족들은 환호했다.
뭐랄까, 마치…….
저쪽 세계에서 덕질했던 아이돌 팬 사인회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나한테야 생각보다 인간미 넘치는 남자였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역 시 인기 폭발인 제국의 주역다웠다.
나에게 환호하는 것도 아닌데 괜히 머쓱해하고 있는 사이, 하데스가 멀 리 선 아벨과 눈인사를 나누는 게 보였다.
아벨은 우리 둘의 모습이 보기 좋은 지 배시시 웃으며 하데스에게 손을 흔들었고, 하데스는 그를 향해 다정 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사이좋은 부자의 모습에 코끝이 찡 했다.
“잘하고 있어. 조금 더 수고하고, 이따가 봐.”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하데스가 말 했다.
“뭐예요? 갈 거예요? 나도 조금 피 곤한데…….”
“어허, 오늘 공표식의 주인공은 아벨만이 아니야. 알지?”
정식으로 루버몬트의 이름을 얻게 된 건 마찬가지니, 조금 더 귀족들에게 얼굴 도장을 찍어놓으라는 의미인 듯했다.
귀찮은 거 싫다고 하면 안 시킬 줄 알았는데…….
투정을 좀 부려보려다가, 내가 어린 애도 아니다 싶어 그냥 말았다.
“알았어요. 그럼 이따가…….”
“그래, 조금만 더…….”
내 손을 잡은 하데스가 그대로 몇 걸음 뒤로 무르며 말했다.
그는 말하면서 살짝 웃었는데, 왜인 지 여태껏 봐 왔던 익숙한 표정과는 조금 다른 느낌 이 었다.
“조금만 더, 있다가 와.”
“으응…….”
작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하데스가 잡고 있던 내 손에 살짝 힘을 주 었다.
조금 더 뒷걸음질 치자 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 하데스의 손가락이 아 쉬운 듯 내 손끝까지 천천히 당겨 훑다, 끝내 떨어졌다.
그는 또 한 번 웃었다. 그리고는 그 대로 뒤돌아 공저를 빠져나갔다.
황제와 얘기는 잘 끝났는지, 같이 자리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피곤한 건지, 묻고 싶은 게 많았는데…….
왠지 답지 않은 표정이나 힘없어 보 이는 뒷모습 때문에, 나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
피로연이 끝물에 다다랐을 때 나는 결국 백기를 들고 공저를 나섰다.
끝까지 남을 아벨이 걱정스러워 함께 가겠냐고 물었는데, 언제 다 자랐 는지 모를 대견한 아드님은 내 제안을 거절했다.
피곤해 보였지만 자신의 위치를 잘알고 있는 결정이었다.
과연…… 제국 최고 공작가의 수장으로 이름 날리던 남주인공답다.
“워어……. 죽겠네, 진짜.”
종일 서 있었던 터라 다리가 말을 안 들을 정도. 평소에는 5분만 부지 런히 걸으면 도착했을 내 방이 어찌 이리도 멀게 느껴지는가?
구두 신은 발이 아파 거북이처럼 느 릿하게 걷고 있으려니, 누가 눈앞에 팔뚝을 불쑥 들이 밀 었다.
돌아보니 아자르가 있었다.
“피곤해 보이시긴 하는데 복도에서 자리 깔고 누우시면 좀 곤란합니다.
아마 제가 주군께 먼지 나게 맞을 거 라서요. 힘들면 잡고 걸으십쇼.”
“괜찮아요. 그 정돈 아니예요.”
사실 달콤한 유혹이었지만, 나만 피 곤한 것도 아닌데 애처럼 징징대고 싶진 않았다.
아자르도 종일 입 다물고 공저 한쪽 구석을 지키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그는 평소와는 영 다른 모습이었다.
꼭 사자 갈기털처럼 아무렇게나 흐 트러뜨리고 다녔던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긴 헤어스타일, 그리고 하얀 크라바트와 금색 견장이 화려한 붉은 제복 차림.
막 입고 다녔던 옷차림도 오늘만은 단정했다. 그의 적색 제복은 작위를 받은 ‘루버몬트 기사단’들만의 전유 물이었다.
“옷이 잘 어울리네요.”
“예?”
뜬금없는 내 칭찬에 아자르가 미간을 좁혔다.
“공표식 전에는 정신없어서 말 못 해줬는데, 잘 어울려요.”
“갑자기 뭔…….”
칭찬이 어색한지 아자르는 괜히 더 인상을 찌푸렸다.
그가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는 이유는, 비로소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공표식 준비 때문에 시간은 정신없 이 흘러갔지만, 그 와중에도 내 부탁 은 또 전혀 잊지 않은…….
‘하데스, 너란 남자…….’
……치밀한 공작 전하의 배려 덕이 었다.
행사가 겹쳐 수여식은 조금 미루기 로 했지만, 일단은 계급이 없던 정예군들 모두에게 루버몬트 기사단과 동 등한 작위가 내려진 상태였다.
달라진 건 서류상으로 공식적인 작 위가 생긴 것뿐 그들이 맡은 일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공표식 기간만큼은 특별히 아자르가 내 호위를 맡았다.
그 대가로, 아자르는 길었던 피로연 행사 내내 자리를 지키느라 퍽 고생했을 터.
“오늘 고생했어요.”
“전 뭐, 별로. 좋은 구경 많이 해 서.”
“어머, 재미있었어요? 난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던데?”
“예. 주군의 정신 나간 애정표현이 꽤나.”
“아…….”
놀리듯 웃는 아자르에 나는 멍해졌다. 잊고 있었던 하데스의 돌발 행동 이 떠올랐다.
“지, 진짜 이상한 남자야. 사람들도 많은데 무슨…….”
“말은 그렇게 하시지만 꽤 좋아하 시는 것 같은데요.”
“아닌데요? 어딜 봐서?”
“그렇다고 칩시다.”
“흠흠…….”
생각해보니 이따가 보자고 했었다.
“에이, 아직 방전된 체력 다 충전 안됐는데…….”
“무슨 상상을 하시길래 얼굴 이…….”
“……얼굴?”
“화염구라도 맞은 것같습죠.”
“오해예요.”
단호하게 말하고 나는 다시 걸었다. 아자르의 눈치가 보여서, 내 방 말고하데스에게로 가려 했던 계획은 살짝 미루기로 했다.
‘그나저나…….’
갑자기 하데스를 떠올리니 마지막으로 봤던 그의 답지 않은 표정까지 마음에 걸렸다.
지금까지 봐온 그를 생각하면, 피곤 해도 먼저 자리를 비울 사람은 아닌 데…….
‘황제랑 얘기가 잘 안 됐나? 아니 지, 그것보다는…….’
문득 모른 척하고 있던 우리의 문제 가 떠올라 착잡해졌다.
여러모로 시끄러웠던 하루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지만, 하데스는 아마 외줄타기 하는 듯한 내 심정 과 별다르지 않을 테다.
공표식이 끝났으니 이제부터 다른 머리 아픈 고민을 할 시간.
태어난 이래 두 번은 본 적 없는 불 도저급의 직진 본능을 가진 하데스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나와 아벨의 입 지를 새겨놓았으니, 이제 더 이상 그의 발목을 붙잡는 건 없었다.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언제, 어디로, 어떻게 갈까? 내가 아는 하데스라 면 지체할 생각은 없을 텐데…….’
내가 본 미래에서 분명히 나는 하데스와 함께였으니, 어떻게든 따라가는 데 성공은 한다는 건데…….
‘아직 난 아무것도 모르겠는걸?’
그가 떠날 때쯤이면 나도 가이오니아가 머물고 있는 본거지를 눈치채지 않았을까 싶은데, 지금은 도무지 짐 작도 할 수 없었다.
‘정말 하데스가 어디로 가는지 나한 테 말해주고 떠나는 걸까? 그럴 사람 은 아닌데. 결국 말하고 떠나겠다는 약속도 안 해줬잖아.’
난 대체 어떻게 하데스를 따라갈 수 있었던 거지?
나뿐 아니라 그 자리에는 미하일도, 데보라도, 아벨도, 그리고…….
“아.”
갑자기 내 시야에 구릿빛 주먹이 훅끼어들었다.
불쑥 다가온 내 얼굴만 한 손의 주인공은 아자르였다.
“아…….”
나도 모르게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던 모양이다. 내 손을 잡아 내린 아자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자르…….
아자르 로만.
내가 본 미래에 그가 함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그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하데스가 아자르를 데려갔을 수도 있는 거 아냐?’
아자르는 하데스의 손발 잘 맞는 전 우다. 이건 꽤 확률이 높은 가정이었다.
나는 의아해하는 아자르를 빤히 올려다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혹시, 아자르. 전하께 뭐 들은 얘 기 없어요?”
“들은 거요? 뭔…….”
그는 금시초문인 표정이었지만 그 게 연기인지 아닌지 구분할 재간은 내게 없었다.
아니지, 아마도 연기일 확률이 높았다. 겉으로는 허물없이 친해 보여도 누구보다 하데스를 향한 충성심이 높 은 아자르이니, 내가 몇 번 묻는다고 한들 곧이곧대로 대답할 리 없겠지.
의심스럽게 그를 쳐다보았지만 역시 나 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남발하고 싶은 능력은 절대 아니지 만…… 하는 수없지.’
아자르와 단둘이 있는 지금이 나쁘 지 않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자르에게 짧게 사과한 후 그와 눈을 맞췄다.
‘당신이 알고 있는 하데스의 가장 큰 비밀, 말해주세요.’
세뇌는 한순간 먹혀 들어갔다.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아자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군, 께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