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공표식이 시작되기, 30분 전이었다.
루버몬트의 대행사를 축하하기 위 해 모인 많은 귀족들은 넓은 파르넬리 공저를 꽉 메우고도 남았다.
행사장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 씬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아벨이 행진할 융단 길을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화려하고 둥근 테이블 이 수십 개.
개당 대여섯 명의 귀족들이 모여 앉 은 모양새는 꼭 전생에 영화에서나 봤던 상류층의 파티장을 방불케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이곳에 모인 귀 족들은 전부 제국에서 한가락씩 하는 이들이었다. 따지자면 대기업 총수들 모임쯤 될까.
그 사이, 무려 황제 내외와 황태자, 루버몬트 공작, 대신관이 함께 앉을 자리에 내가 끼어있음은 실로 놀라운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국의 주역들 사이에, 소 치고 밭 매는 정겨운 시골 영지 출신의 이름 만 귀족인 아가씨라니. 무려 ‘루버몬트 공작부인’의 이름을 달고.
‘음, 이게 바로 재벌 3세와 운명적 사랑에 빠진 신데렐라 여주인공의 기 분인가.’
아무것도 안 하고 앉아서 자리를 지 키고만 있을 뿐인데도 왠지 눈치가 보였다.
공표식의 첫 차례인 축사를 준비하 기 위해 황제는 자리를 비웠고, 내 왼편에는 하데스가, 오른편에는 미하일 이, 그리고 맞은편에는 황후와 황태자가 앉아있었다.
누가 황족인 거 몰라줄까 봐 화려하 게도 차려 입은 모자는 그럭저럭 황제와 비슷한 이미지였다.
둘 다 눈꼬리가 축 처져 선해 보이는 인상. 나쁘진 않았지만 카리스마 가 없어 보이는 건 아쉬웠다.
특히, 황제가 아주 힘들게 봤다는 늦둥이 황태자.
올해로 열아홉 살이라는 그는 또래 보다 한참 왜소했고, 누가 봐도 잔뜩위축되어 있었다.
이따금씩 내 옆에 앉은 하데스를 두 려운 눈으로 힐끔거리는 걸 보니 그 가 어지간히도 무서운 모양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이오니야 상이 엄청 거대하군요. 과연 루버몬트의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실 모양인가 봅니다.”
내 옆에 앉아있던 미하일이 후후 웃으며 넌지시 말했다.
나는 흠칫 놀랐다.
안 그래도 저게 공개될 시간을 기다 리는 게 꼭 시한폭탄 들고 있는 기분인데…….
놀란 나와 달리 하데스는 아주 호탕 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이 정도는 해야지 않겠나?”
“그렇지요.”
물론 미하일은 대충 눈치를 채고 말하는 듯했다. 둘의 대화는 오히려 가이오니아를 향한 조롱에 가까웠다.
그걸 꿈에도 모를 황태자가 허둥거 리며 끼어들었다.
“루버몬트 공, 무사히 후계를 위임하심과 앞둔 경사를 진심으로 축하합 니다.”
앞둔 경사라 함은 나와 하데스의 결혼을 말하는 모양이 었다.
조금이라도 하데스와 원만한 사이 가 되어보고자 애를 쓰는 모양새가 눈에 훤했다.
“고맙습니다.”
건방지게 고개를 까딱이며 대꾸하는 하데스에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어 황태자는 내게도 눈인사 했다. 나는 예의라곤 다 날려먹은 하데스를 대신해 아주 공손하게 웃으며 고개 숙여 화답해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때였다. 위엄 있게 차려입은 기사 가 목소리를 높여 황제의 등장을 알 렸다. 제법 소란스러웠던 장내가 고 요해졌다.
루버몬트의 후계자 공표식에 축사 하나 읽으러 온 황제의 등장을 마치 메인 행사처럼 꾸며놓은 것도 그렇 고, 하데스는 겉으로는 완벽하게 황실을 대우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첫 만남 때와는 달리 위엄 있는 표 정과 걸음걸이로 황제가 여러 기사들의 보필을 받으며 단상에 섰다.
황제는 황제인지 행동 하나하나에 서 기품이 홀러넘쳤다.
그는 곧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은 하데스를 향해 눈길을 한 번 준 뒤 말했다.
“기쁜 날, 직접 루버몬트의 대경사를 축하할 영광을 안게 된 황제 발록 프랑세즈 크레센타가 제국의 귀인들 에게 인사드리오.”
공저에 모인 대귀족들의 찬사와 박 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용신 가이오니아의 가호 아래, 벌 써 몇백 년간 유지를 이어온 크레센타 제국의 방패, 루버몬트 공작 가문에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는 날이오. 모두가…….”
굉장히 신경 써서 준비한 듯한 축사 가 길게 이어졌다.
축하를 가장한 루버몬트 찬양이라 고 해도 될 정도로 과하고 낯부끄러 운 축사.
몇몇 귀족들은 어색한 웃음까지 지을 정도였지만, 하데스는 황제의 그 런 축하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쭉 거 만한 표정을 유지했다.
몇 분 뒤에 펼쳐질 참담한 상황을 상상하면 나는 웃음도 안 나오건만.
일부러 반쯤 축사를 흘려듣고 있던 와중이었다.
“……또한 우리 제국의 젊은 귀족 들이 혼인법의 맹점에 고통받고 있 음은, 국민들의 사정을 미처 헤아리 지 못한 짐의 부덕이었소. 우리 루버몬트 공작이 고맙게도 부족한 짐을 일깨워준 덕분에, 이번에 새로이 개 정된 혼인법도 이 자리에서 공표하게 되었소.”
자연스럽게 혼인법 개정 공표로 넘 어가면서, 황제는 사람 좋은 얼굴로멀 리 앉은 나와 눈 맞췄다.
차마 그 눈을 피하지는 못하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황후.”
다음 순간, 황제가 우리 맞은편에 앉아있던 황후와 잠깐 시선을 나누었다.
황후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 어나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황제가 있는 단상으로 향했다.
‘뭐지?’
옆에 앉은 하데스의 표정을 보니 그 도 예상 못 했던 상황인 모양.
갑자기 펼쳐진 히든 이벤트에 나는 바짝 긴장했다.
황제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앞으로 공작과 함께 루버몬트의 번영을 위해 힘쓸 에스클리프 영애는, 용신 가이오니아께서 내린 지상 최대의 축복인 백속성의 유지를 이어 오고 있는 가문의 총아요. 실로 루버몬트의 격에 걸맞은 우리 제국의 인 재를 위해 황실에서 직접 선물을 준 비하였으니 부디 기쁘게 받아주시길 바라오.”
아니, 뭐라고?
하데스가 땡 얼어붙은 나를 돌아보 았다.
‘어떡해요?’
입 모양으로 S. O. S를 치자 하데스 에게서는 능청스러운 답이 돌아왔다.
‘나가서 받고 와.’
아니…….
황당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고 있다가 단상 쪽을 보니, 고아한 웃 음과 함께 황후가 나를 바라보고 있 었다.
그녀는 단상 위에 올라 있는 번쩍번 쩍한 금빛 함을 열고 안에 있는 것을 꺼냈다.
황실이 준비한 ‘선물’은…….
‘세상에.’
당장 황제의 머리에 씌우더라도 전 혀 부족함 없을 정도로 화려한 보석 금관이었다.
촌구석 출신이라 황제 내외의 행렬 은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지만, 아마 저들 둘의 머리에도 저만한 수준의 사치품이 씌워진 적은 없었을 거 라 장담한다.
곳곳에서 놀란 듯 숨 삼키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걸 보면, 말 다 했지.
‘원래부터 기만이었지만 저것까지 받고 나면 진짜 되돌릴 수 없는 기만이다. 진짜다. 어떻게 주는 거 족족 다 받아 처먹고 입 씻을 수 있냐며 황실이 선전포고해도 할 말없다, 이 건.’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기다리는 황제와 황후를 무시할 순 없어, 하얗게 물든 시야를 외면한 채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멀어지는 내 귀에 하데스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부인, 좋은 거 받네.”
미친…….
간이 붓다 못해 터 진 인간이라도 하데스처럼 여유로울 수는 없을 텐데.
“고귀한 루버몬트의 이름을 얻게 된 부인에게 앞으로도 용신 가이오니아의 축복과 가호가 함께하기를.”
“감……사드립니다, 황후폐하.”
황후는 싱긋 웃으며 고개 숙인 내 머리 위로 관을 씌웠다.
아마 지금 이 순간 내 떨리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없을 거다.
다정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황제와 황후.
그리고 그들 뒤에 장엄하게 떡 버티 고 선, 가이오니야…… 아니, 하데스 루버몬트 상.
아아…….
울고 싶다.
“이쯤 하고,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오늘의 주인공을 만나봐야겠지.”
황제가 공표식 진행을 맡아 우측 단 상에 서 있던 포트넨 백작에게 눈짓했다.
이제 하데스가 기도문을 읽고 조각 상을 공개하는 순서였다. 아마 오늘의 공표식은 역사서에 길이 남고 말겠지.
황실의 권력도 씹어 먹을 루버몬트의 방만함이 하늘을 찌른 날.
뭐, 이렇게 기록되지 않을까?
“가지.”
황후가 자연스럽게 황제와 팔짱을 꼈고, 나는 단상에서 내려가는 둘의 뒤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겨우 떼 어 따랐다.
내려가는 우리와 반대로 하데스가 단상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나를 스쳐 지 나가며 속삭였다.
“예쁜데?”
황당했다.
나는 멈칫했지만, 어색하게 굴 수는 없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 로 돌아왔다. 머리 위에 놓인 관이 무 겁게 느껴졌다.
“바쁘신 와중에 시간을 내어 직접 방문해주신 모든 귀빈들께 감사드립 니다.”
전혀 공손하지 않은 표정으로 의례 적인 첫 인사를 꺼내놓은 하데스는, 들고 있던 종이 몇 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건 황실이, 정확히는 황제의 책사파멜라 휘스트리너가 작성했을 ‘기도 문’이었다.
내용은 당연한 말이지만 용신 가이오니아를 찬양하고 그에게 복종한다는 구구절절한 얘기들이 었는데…….
물론 하데스는 그 기도문을 빨간 펜으로 대폭 수정했다.
사실은 내게 검수까지 받아가며 2 차, 3차 수정을 거친 작품이었다. 만약 하데스가 내놓은 기도문 초고를 그대로 읽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황실과 루버몬트의 내전이 일어났을 지도 모른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해온 제국 크레센타의 방패, 루버몬트 가문의 역 사는…….”
‘용신 가이오니아의 축복 아래 시작되었습니다—가 원문이었지만.’
“……1대 루버몬트 공작, 아키스 루버몬트로부터 시작되어…….”
하데스의 빈자리 하나를 건너 앉은 황제의 뒷모습이 움찔했다. 나는 도 무지 이어질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 많은 크레센타의 인재들 사 이에서도 유별나게 특출했던 루버몬트 7세 대에 이르러 그 위용에 정점을 찍고, 명실상부 제국에서 제일가는 가문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아, 내가 저 부분은 제발 빼자고 했 는데.
참고로 루버몬트 7세는 하데스 루버몬트, 자기 얘기다.
이쯤 되니 귀족들도 뭔가 이상했는 지, 장내가 조금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황제가 돌아볼까 걱정되어 내가 태연한 척 반대로 고개를 돌리자, 옆에 앉아있던 미하일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분명 눈만 보면 굉장히 충격 받은 것 같지만 글쎄.
혼자 쏙 빠져나가려는 게 얄미워 나는 손을 뻗었다. 슬쩍 미하일의 팔을 당기자 무방비하게 입을 가리고 있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역시나 재미있다는 듯 귀 밑까지 찢 어지기 일보 직전인 입이 드러났다. 물론 재빨리 다시 가린 덕에 나밖에는 못 봤지만.
“고, 공작부인……. 이건…….”
미하일이 입을 가린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웃음을 참느라 목소리 가 떨린다는 건 아마 나만 알 테지.
차라리 우주의 먼지가 되어버리고 싶은 이 순간.
하데스는 못을 박았다.
“후계자 공표식을 맞이하여 루버몬트의 위엄을 알릴 수 있는 증표를 제 작하였는데, 기쁜 자리에서 귀빈들에게 공개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조각상 옆에 대기하고 있던 고용인 들이 힘껏 줄을 당겨 천을 걷었다.
비로소…….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루버몬트 공작 7세 상’이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