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이른 아침부터 미하일이 데보라를 깨운 이유는 파멜라를 만나러 가기 위함이었다.
미하일의 손을 꼭 붙든 데보라는 급 한 그의 걸음을 따르며 걱정스러운 눈동자로 자꾸 그를 힐끔거 렸다.
“저어……. 대신관님.”
“예, 데보라 사제.”
“저 진, 짜…… 괜찮아요. 엄마 보 러 가지 않아도…….”
“데보라 사제.”
파멜라의 처소 앞에 당도한 미하일 은 데보라 앞에 무릎을 굽히고 눈을 맞췄다.
그가 눈에 힘을 주고 말했다.
“내가 말했죠? 휘스트리너 공작님 은 그렇게 무정한 분이 아닐 거예요. 어제는 황제 폐하가 함께 계신 자리 라서 어쩔 수 없이 데보라 사제를 모 른 척하셨을 거예요.”
“……정말, 그럴까요?”
어제 일을 생각해보면 전혀, 아닌 듯했지만…….
또 상처받고 싶지 않아 망설이던 데보라는, 확고한 미하일의 눈빛에 그저 한숨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그는 항 상 절망적인 자신에게 희망을 불어넣 었다. 그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그가 하는 말이 전부 맞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데보라는 또 바보처럼 기대 하고 말았다.
“그럼요. 어제는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이렇게 따로 뵙는 것이 휘스트리너 공작님께도 무례가 아니었는 데……. 미안합니다.”
“아, 아니예요! 대체 대신관님이 뭐 가 미안해요…….”
데보라가 뭉클해지는 심장 쪽을 붙 들며 고개 저었다.
미하일은 데보라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선한 자였다.
죽어가는 자들을 위해 고귀한 눈물을 홀릴 줄 알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이토록사랑해줄 줄도 알았다.
그는 입버릇처럼, 인간의 모든 생사를 주관하는 주신만큼 선한 존재는 없다고 말했지만, 데보라는 인정할 수 없었다.
어머니에게서 버림받고, 차가운 길 거리에서 죽을 뻔했던 자신의 기구한 삶 전부가 신이 주관한 거라면…….
신은 정말이지 못된 존재였다. 신보 다는 미하일이나, 어제 처음 본 자신 에게도 상냥하게 대해주었던 공작부인이나 루버몬트 공자 같은 이들이 더 선할지도 모른다.
“내가 약속했잖아요. 데보라 사제 에게 어머니를 꼭 찾아주겠다고.”
“저는, 저는…… 대신관님이 제 아버지가 되어주신 것만으로도 괜찮은 데…….”
파멜라의 냉정한 눈빛을 떠올리노 라면 데보라는 겁이 났다. 그녀는 괜 찮다고 또 고개 저었지만, 미하일은 막무가내였다.
“조금만 기다려요.”
미하일은 파멜라의 처소 앞을 지키 고 있던 호위와 하녀와 잠시 얘기를 나눴고, 곧 그의 말을 전하러 들어갔 던 이들이 파멜라와 함께 나왔다.
어제와 꼭 같은 파멜라의 냉정한 얼굴을 본 순간 데보라는 바짝 굳었다.
파멜라는 호위와 하녀를 모두 물렸다. 이른 아침 복도는 쥐 죽은 듯 고 요했다. 셋뿐이었다.
“무슨 일이지요,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무례를 용 서해주십시오. 공작님만 괜찮으시다 면 방에서 따로 얘기를 드리고 싶은 데…….”
처소에 들이지 않고 복도에서 자신을 맞는 파멜라에게 당황했는지 미하일이 허둥거렸다.
파멜라가 피식 웃고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겠군요. 보아하니 괜한 말을 하러 온 것 같은 데, 굳이 처소에 들여 남들 눈을 어지 럽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어린 데보라는 빠르게 쏟아지는 파멜라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미하일에게 굉장히 공격 적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당황한 얼굴로 입술을 물며 망설이 던 미하일이, 아주 조용히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어제 제가 소개드리려고 했던 사제님의, 얘깁니다. 혹시 공작님께서 사제를 못 알아보신 게 아닌가 하 고…….”
“모르는—”
파멜라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미하일의 말을 끊었다.
“—얼굴입니다. 못 알아본 것이 아니라,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에요.”
그때까지도 파멜라는 데보라에게 시선 한 점 주지 않았다. 마치 일부러 그녀 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단호한 파멜라의 태도에도 미하일은 애원하듯 매달렸다.
“아닙니다. 다시 한번 잘 봐주십시 오. 이 불쌍한 사제는 휘스트리너 공작님의 따님이 맞습니다. 부디 외면하지마시고 한 번만, 한 번만 좀…….”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낮게 깔린 파멜라의 목소리에, 멍하 니 서 있던 데보라가 흠칫했다.
한 대 칠 기세였다. 이를 악물었는 지 부들부들 턱을 떨며 파멜라가 미하일의 얼굴 가까이로 바짝 제 얼굴을 가져다 붙였다.
“그대가 박애주의자라는 사실은 내가 아주 잘 압니다. 고아 소녀를 안타 까워하는 그, 만인이 사랑하는 그대 의심성도.”
“공작님…….”
“아마 그대의 가치관으로는 저 고 아 소녀를 내버린 무정한 어미가 이 해되지 않을 테지요. 그래서 애먼 사람을 붙잡고 시간 낭비하려는 이유도 조금은 이해가 갑니다. 한데 말이지요.”
“…….”
“내가 그대의 그 선해빠진 가치관을 존중하는 만큼 그대도 나를 존중해주었으면 좋겠군요. 지금 대신관의 행동은 내가 지금까지 피눈물 흘리며 쌓아온 명예와 권력, 그 모든 것을 부 정하고 흠집 내고 있습니다.”
“아니, 아닙니다. 공작님, 저는 그 저…….”
“시끄러워요. 더 듣고 싶지 않군요. 만일 같은 일로 한 번 더 나를 언짢 게 한다면, 더 이상 두고 보고만 있지는 않겠습니다.”
“상관, 없습니다.”
미하일은 지지 않고 눈을 빛냈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물고 덧붙였다.
“제 무례함을 벌주실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저는 어떻게 되어 도 상관없습니다. 그렇지만 제발, 제 발 이, 이 불쌍한 어린아이만큼은…….”
미하일을 바라보고 있던 데보라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강한 척하려 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여린 심성을 가진 미하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힘주어 말하던 목소리와 달리.
뚝, 그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 졌다.
파멜라의 발이라도 붙잡고 매달릴 기세로, 미하일은 그녀의 옷깃을 붙 잡았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놓으십시오.”
얼어붙은 목소리로 파멜라가 일갈함과 동시에, 잿빛 눈을 멍하니 뜬 채 가만히 귀를 열고 있던 데보라도 미하일의 다리를 끌어안았다.
미하일이 가만히 고개를 돌려 데보라를 바라보았다.
붉게 젖은 눈가. 그리고 푸른 눈동 자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데보라는,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다.
“대신관님.”
“데보라 사제…….”
“제가 잘못 알았어요.”
“……네?”
그때에야, 파멜라의 눈이 데보라에게 향했다.
이제야 마주친 시선.
소름 돋을 정도로 제 눈과 닮아있었다. 결코 모르는 사이라고 잡아떼는 저 입이 가증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파멜라의 잿빛 눈동자를 빤히 응시하면서, 데보라는 가만히 웃었다.
“제가 잘못 말씀드렸어요. 휘스트리너 공작님은 제 어머니가 아니신 데, 착각했어요.”
“사제, 그런…….”
“정말이에요.”
파멜라에게 향해 있던 데보라의 시 선이 미하일에게로 옮겨갔다.
“저는 괜찮아요. 제가 멍청해서 휘스트리너 공작님과 대신관님께 폐를 끼쳤어요.”
“……데보라 사제!”
“아무래도 대신관보다는.”
자꾸 눈물 흘리는 미하일을 바라보 며, 파멜라가 웃는 목소리로 끼어들 었다.
“이 어린 사제가 훨씬 똑똑한 듯하 군요.”
“휘스트리너 공작님!”
“내 경고를 잘 알아들었을 거라 생 각합니다. 다시는 이 문제로 나를 찾 지 마세요.”
냉정하게 말한 파멜라는 방문을 닫 고 사라졌다. 다리에 힘이 풀린 미하일이 풀썩 주저앉았다.
무릎 꿇은 미하일은 얼굴로 두 손을 가린 채 오열하기 시작했다. 데보라 가 가만히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흐으…….”
돌아본 미하일이 데보라를 마주 안 았다. 그러고서도 그는 한참을 울었다.
뭉개진 발음으로 그가 연신 사과했다.
“미안, 미안해요. 내가, 내가 부족해서, 내가…….”
“아니예요.”
“꼭, 흑……. 데보라 사제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그렇게, 해주 려고 했는데…….”
“저는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데보라는 작은 손으로 가만히 미하일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가 왜 이렇게 아이처럼 슬퍼하는 지 알고 있었고, 다시 한번 어미에게 외면당한다면 제 마음도 지금의 미하일처럼 갈기갈기 찢어질 거라 생각했 었다.
한데, 생각보다…….
데보라는 아무렇지 않았다.
자신을 외면하는 어미를 마주했을 때 일순 정신을 갉아먹었던 분노, 증오, 화…….
그런 것들은 아주 차갑게 식어버렸다.
사라졌다는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저…… 아주 커져서 데보라를 집어 삼켰을 뿐이다. 그리고 활활 타버린 어린 마음은 잿더미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렇게 사제를, 슬프게 만들고도…… 내가, 염치없이…… 어떻게…… 신을, 미워하지 말라고, 할 수 가 있겠어요.”
“네.”
“아아……. 우리의 아버지는 왜 이렇게 무정하신지…….”
“…….”
“데보라, 사제…….”
“네, 대신관님.”
미하일은 눈물을 훔치고 데보라를 마주 보았다.
희망과 기대가 아주 사라져버린 상 처 받은 눈.
비로소, 만든 것일까.
자신을 영원한 안식에 잠기게 할 수 도, 지겨운 굴레를 끊어낼 수 있는 무 기가 될 수도 있는…….
. ‘구원자’를.
미하일을 데보라 몰래 전율했다.
“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아요. 아버지 대신, 어머니 대신…… 부족 하겠지만 내가, 내가 사제를 지켜줄 게요. 내 옆에 있어주세요.”
“그럼요. 어디 갈 곳도 없는 걸요.”
“혹…….”
“그리고 감사합니다. 대신관님의 부탁이라면 열심히, 노력해 볼 생각이었는데…….”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지르던 데보라 가 미하일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미하일이 작은 몸을 다정히 끌어안고 일어섰다.
그의 목을 끌어안은 데보라는 천천히 중얼거렸다.
“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해 주셔서…….”
“…….”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