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뭔데?”
진지해진 내 목소리에 하데스가 살 짝 긴장하며 물었다.
“어디 가실 때 있잖아요. 꼭 말해주 고 가요.”
“아아……. 그래.”
“와, 거짓말하는 거 얼굴에 다 티난다.”
“진짜야.”
“약속.”
바짝 붙은 몸 사이로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물끄러미 내려 다보던 하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할게.”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니 까요.”
“그 전에 그대도 하나 약속해.”
“뭘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내가…….”
“…….”
“……실패한다고 해도, 말이야.”
촛불 하나가 전부인 어둠 속에서도 하데스의 붉은 눈이 빛났다.
그의 결코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나를 빤히 직시했다.
“나는 다음, 그 다음, 그리고 또 다 음에도.”
“…….”
“그대를 자유롭게 하는 데 성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까 내가 혹시,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하데스는 말을 더 잇기 힘든 사람처럼 괴로워하다가 덧붙였다.
“……살아줘. 죽지 말고.”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흔들리기 시작한 하데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하데스가 실패한다면 형벌의 굴레는 항상 그랬듯 변하지 않고 돌아가 게 될 것이었다.
나는 아벨을 죽이게 되겠지.
지금 하데스가 하는 말은 그거였다. 혹시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내가 죽 어 형벌의 굴레를 끊는 차선책은 선택하지 말아 달라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이번 생에서 아벨을 죽이게 된다고 하더라도, 언제고 자신이 가이오니아를 없애고 말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나는 차마 약속할 수 없었다.
하데스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눈 가를 덮었다. 그답지 않게 약해 보이는 모습에 가슴 한 편이 저릿해졌다.
“나야말로, 죄인이야. 아벨에게 결 코 떳떳하지 못할, 못난 아버지지.”
“전하…….”
“그 애는 항상, 내가 자기의 좋은, 가족이 되어주길 바랐는데.”
“…….”
“쉽지 않아. 그 옛날에도, 지금도, 나는…….”
아마도 붉어졌을 눈가를 내보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데스는 나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어 서.”
아벨을 죽이게 되더라도 그대는 살 아줘.
그 잔인한 말을 차마 입을 열어 하 지는 못하고, 하데스는 괴로워했다.
“나는 너무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 라서…….”
“…….”
나는 가만히 떨고 있는 하데스의 몸을 끌어안고, 긴 새벽이 다 지날 때까 지 그를 위로했다.
결국 약속은 하지 못했다. 그에게 도, 내 부탁을 들어달라고 말할 수 없 었다.
***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공표식을 앞두고, 하데스는 새벽하늘이 밝아오 자마자 미하일을 찾았다.
아이샤의 형제든 뭐든 마음에 안 드는 건 여전했던지라 예의를 차려 방 문을 열 생각은 없었지만, 다행스럽 게도 도착하자마자 어딘가로 가려던 미하일이 먼저 문을 열고 나왔다.
우뚝 멈춰 선 둘이 서로를 빤히 응 시했다.
공표식을 위해 하데스는 준비를 전 부 마친 상태였다.
강건한 몸에 딱 어울리는 멋들어진 검은 제복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미하일이 빙긋 웃었다.
“루버몬트 공자님이 비로소 전하의 이름을 잇게 되는 날이군요. 죽하드 립니다.”
“고맙군.”
“그런데 이렇게 이른 시간부터 저를 찾아오신 이유는요?”
본론부터 묻는 미하일 앞에서 하데스는 잠시 망설였다.
무엇이 걱정되어 아침부터 자길 찾 아왔는지 미하일은 아주 잘 알았다.
그가 피 식 웃었다.
“제누스를 어떻게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알려드릴까요?”
하데스의 눈살이 아주 미묘하게 찌 푸려졌다. 걱정 가득한 반응에 미하일이 만족스럽다는 듯 또 웃고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뭐?”
“어제 제누스와 얘기를 나누지 않 았습니까. 그 애가 저도 몰랐던 방법을 알려줬거든요.”
“……무슨 방법?”
하데스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는 혹시 아이샤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닌지 걱정되었다.
같은 형벌을 받고 있는 처지이니, 형벌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이 랍시고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얘기를 미하일에게도 했을 법했다.
살고 싶다—고 말은 했지만, 벼랑 끝에 몰리면 아벨을 죽이는 것보다는 역시 자기 자신이 죽는 걸 선택할 여 자이니까.
“전하께서 왜 저를 찾아오셨는지 알 것도 같군요. 제가 본 미래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으시다기보다는 아 마…….”
미하일이 비죽 웃었다.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전하의 손에 먼저 죽어 달라고 하려 고 오셨을까요?”
정곡을 찔린 하데스의 얼굴이 굳었다.
전혀 웃을 만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미하일은 못 견디게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렸다.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지요. 제누스의 비극을 알고 계실 분이고, 우리가 받고 있는 형벌을 풀고 싶어 안달 이 나셨을 테니…….”
“…….”
“무서워서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 지는 않지만 공공연히 소문은 돌지 않습니까? 제국의 주역이라는 루버몬트의 수장이 혹시 무신론자가 아니냐 고요.”
“반쯤은 맞았어. 대신관은 생각보 다 똑똑한 사람이 었군.”
“글쎄요. 아주 오랜 세월을 살다 보 면 이 정도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지요. 아무튼 제누스를 위해 어디까지하시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형제를 그토록 아껴주심에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딱히 그대의 감사 인사까지 들을 만한 일은 아니고.”
“아무튼 제 생각이 맞는 모양이군요. 제가 제 손으로 형제를 욕보인 뒤 죽이고야 마는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 으면 해서, 그 전에 저를 죽이시려고, 이렇게…….”
“…….”
하데스는 침묵하다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미하일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는 모른 척, 말했다.
“어차피 다음 생이 있다는 걸 대신관도 잘 알잖아. 아이샤를 그렇게 아 낀다면 별로 망설일 일도 아니지.”
“아아…….”
미하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데스 루버몬트, 그는 자신조차 소 름 돋게 만들 정도로 확실히 ‘신을 믿 지 않는 자’에 어울리는 사내였다.
아마도 아이샤를 위해 신과 대적할 마음을 먹었겠지.
고작 이번 생에 국한된 단 한 번의 비극이지만, 아이샤의 죽음을 절대두고 볼 수 없는 모양인지 과감히 그녀의 형제인 자신을 죽일 결단을 내린 것이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무서울 정도로 잔인한 사내라고, 미하일은 생각했다.
동시에 어떤 희열이 그를 사로잡았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이렇게 이기적이고, 잔인하고, 냉정하고, 저 돌적이면서도…….
제누스,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하겠 다는 의지를 가진 자라야, 신에게 대적할 만하지 않겠는가?
지그시 눈을 감은 미하일이 몸을 부 르르 떨며 전율했다.
이윽고 푸른 눈을 빛내며 그가 웃었다.
“예, 전하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렇지만 일단은 제가 할 일이 있어서…….”
“…….”
“저는 형벌의 굴레를 완전히 끊을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시도는 해볼 테지만, 사실 성공할 확률은 그렇게 크지 않아요.”
미하일의 말에 하데스가 놀란 눈을 했다.
. ‘신을 믿지 않는 자’가 가이오니아를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미하일도 아는 걸까?
“물론 그 방법이 제누스의 희생은 아닙니다.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 도 좋습니다. 전하께서 걱정하시는 건 그보다는, 제가 제누스를 죽이게 되는 미래일 테지만…….”
“…….”
“그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제 시도가 실패하고 결국 제누스를 죽여야 하는 때가 오면, 아니, 그 전에.”
미하일은 고개를 기울이며 살짝 웃 었다. 분명 웃는 얼굴이지만 그 표정 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를 괴롭혀왔던 지 난한 형벌에 마모되고 또 마모된 정신이 고스란히 깃든 얼굴이었다.
절망도, 희망도, 그 어느 것도 느끼 지 못하는.
“제가 죽을게요.”
“……뭐?”
의아해할 겨를도 없이 미하일이 등지고 서 있던 그의 방 문이 열렸다.
빼꼼 얼굴을 내밀고 나온 건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 얼핏 보았던 나이 어린 사제였다.
공표식에 갈 준비를 마쳤는지 단정 한 사제복을 차려입은 어린아이는 어 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데스를 바라보 다가 미하일의 다리를 붙들고 숨었다.
미하일이 어린 사제, 데보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데보라 사제, 여기는 루버몬트 공작 전하십니다. 인사드려야지요?”
“아!”
데보라는 허둥지둥 미하일의 뒤에 서 나와 하데스에게 허리를 숙여 인 사했다.
“데보라 라이가르트입니다. 그, 그…… 어제는 죄송했어요, 루버몬트 공작 전하.”
하데스의 시선이 말없이 데보라의 얼굴 위에 내리꽂혔다.
「제가 죽을게요.」
본능일까? 하데스는 마냥 순수해 보 이는 그 어린아이의 잿빛 눈동자를 마주보며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동류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본능 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신을.
믿지 않는 자.
미하일의 말이 전부 이해되었다. 형 벌의 굴레를 끊으려는 시도를 할 거 라는 말과, 실패한다면 아이샤를 욕 되게 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죽겠다는 말.
그 모든 계획의 중심에는 바로 이 아이가 있었다.
멍하니 자신을 지켜보는 하데스에 데보라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시 자신을 향해 옮겨온 하데스의 눈을 마주하며 미하일이 비죽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마십시오. 신 은…… 저의 죽음까지도 사랑해주실 분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