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코끝을 훌쩍이는 나를 돌아보며 황 당하다는 듯 중얼거 리던 하데스가 끝 에는 피식 웃었다.
“무슨 얘기를 했나?”
뺨을 쓸어주는 손길이 다정해서 나는 주책없이 또 울 뻔했다.
미하일과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 어 답답함은 사라졌지만, 사실 상황은 전보다 더 절망적이었다.
나를 죽이는 미래를 본 듯한 미하일 얘기를 하데스에게 할 순 없었다.
그건 곧, 가이오니아를 죽이 려는 하데스의 계획이 완벽하게 실패할 것임을 다시 깨우쳐주는 꼴밖에 안 되니 까.
나는 애써 웃으며 고개 저었다.
“그냥 옛날 얘기 했다니까요. 별 거 없었어요.”
“그래?”
“네. 바쁜데 왜 또 여기까지 찾아왔 어요? 일 다 끝났어요?”
하데스는 피곤하다는 듯 미간을 문지르며 고개 저었다.
“아니, 다시 가 봐야지.”
“저도 얼굴 좀 닦아야 해요. 오후에 직접 인사하러 오겠다던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귀족들이 한 무더기나 있거 든요.”
“귀찮으면 나중에 보자고 하고 돌 려보내. 괜히 힘쓸 필요 없어.”
“어떻게 그래요. 이제 제 행동 하나 하나가 다 루버몬트의 이미진데.”
“원래부터 이미지 그렇게 좋지 않 았어. 막나가는 이미지였어.”
“그건 그렇지만…….”
하데스가 피식 웃으며 내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정말로 괜찮아. 오늘 밤을 위해서 라도 그대는 힘을 비축해놓을 필요가 있어.”
“네? 오늘 밤요? 무슨 행사가 더 있 던가요?”
“있지, 아주 큰 행사.”
“무슨……. 아.”
나는 음흉하게 웃는 하데스를 보며 오전에 내가 떨었던 입방정을 기억해 냈다.
“저녁 많이 먹어둬.”
그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 웃는 얼굴이 흡사 지옥에서 올라온 대악마 같았다.
***
막 아이샤의 방 문을 닫고 나온 미하일이 입술을 피식 기울였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만남이 었다.
가이오니아가 보여주는 미래는 비극이 가득했지만, 수많은 삶을 반복하며 무며진 자신과 제누스에게는 그 리 특별할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 그녀가 행복해 보인다는 사실이 미하일은 만족스러웠다.
천천히 방으로 걸음을 옮기던 미하일이 잠시 멈추어 섰다.
갑작스레 하데스가 등장해 아이샤 에게 말해주지 못했던…….
500년 전, 그가 보았던 이 생에서의 미래가 떠올라서였다.
「아벨라는 아마 다시 태어나지 않을 거야. 아벨라의 영혼이 환생하지 못하고 떠돌도록 붙잡아둔 건 프로크레아토르일 확률이 커. 그녀가 태어 날 몸에 나를 환생시키려고 말이야.」
「같은 생각이야.」
「역시…….」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이 저주를 풀‘지름길’은하나뿐이었다.
프로크레아토르의 안배로 이번 생 에도, 아마 다음 생에도, 또 다음 생 에도 아벨라의 몸을 차지할 제누스 가, ‘신을 믿지 않는 자’의 손에 죽는 것.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입 다물어.」
「……안 해.」
씁쓸해지는 아이샤의 표정이 보기 싫어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그렇다면 그때 내가 봤던 미래는, 재림한 아벨라가 아니라 제누스였던 건가?’
500년 전, 연인이 크레센타 제국의 ‘성녀’ 아벨라 에스클리프로 추앙받 았던 때.
미하일은 자신의 후손인 ‘아이샤 에스클리프’의 몸으로 환생한 아벨라의 미래를 보았다.
왜인지 그가 본 미래에서 이 세계는 암담했다. 붉게 물든 하늘에서는 수많은 불덩이가 쏟아져 내렸고, 마른 땅은 쩍쩍 갈라져 인간들을 삼켰으 며, 짐승들은 미쳐 울부짖고 날뛰었다.
꼭, 세계를 만들고 지키던 용신 가이오니아가 사라져버린 모습 같았다.
온몸이 불에 타는 괴로움에 울부짖 던 인간들 사이에 나타난 새하얀 존재. 그는 분명 아이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때 미하일이 보았던 그녀의 능력은, 아벨라 에스클리프일 때보다도 더 놀랍고 강력했다.
무효화, 그 이상의 것.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능력이었다.
강하고 정순한 백속성의 마력이 일 순 아귀지옥 같던 세계를 뒤덮었고, 그대로 사라져버릴 듯했던 제국은 그녀로 인해 구원받았다.
해가 들고 꽃이 피는 놀라운 광경은 실로 ‘기적’ 같았다. 죽어가던 인간은 멀쩡해졌고 어쩌면 죽었을지 모를 인 간도 되살아났다.
창조의 이능으로도 이런 기적은 이 끌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죽도록 증오하는 가이오니아의 세계 따위, 멸망해버려도 아무 런 상관이 없었지만…….
비로소 생지옥 같았던 세계를 구원하고, 눈물 흘리며 웃는 연인의 사랑스러운 얼굴에 미하일도 함께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의 손에 죽는 것은 아쉽지 않 아요. 다만, 이 귀한 능력으로 더 많 은 사람들을 구원하지 못하는 게 슬 플 뿐이에요.」
다정한 연인을 위해, 망설이던 미하일은 그녀의 미래를 알려주었다.
「너는 또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날 거야.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마.」
아벨라는 기뻐했다. 그리고 죽기 전, 자신을 신처럼 따르던 인간들에게 먼 훗날 자신의 재림을 알렸다.
「내가 다시 에스클리프의 성녀로 재림하여 멸망 앞의 제국을 구원하게 될지니.」
「부디, 나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 라.」
그렇게 아벨라 에스클리프로서의 생을 마치고, 비로소 그녀가 다시 환 생했다고 생각했지만.
‘모르겠군.’
기적 따위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다. 언제든 자신의 손에 잔인하게 죽는 연인의 끝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미하일은 그녀를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데 그 기적을 일으킨 것이 자신의 연인이 아니었다면.
그 기적이, 혹시, 모든 비극적인 미래를 뛰어넘고 일으킨 것이었다면.
‘제발.’
한 명의 희생이면 된다.
‘죽어주십시오.’
미하일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아버지.’
***
공표식을 앞두고 성문이 열린 뒤, 루버몬트에 온 이래로 가장 눈코 뜰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고 난 다음이었다.
미하일을 만난 이후, 나는 오랜 형제와 재회한 감상에 젖을 겨를도 없 었다.
황제나 신전 사람들은 물론이고 오 후에는 귀족 인사들 앞에 얼굴을 비 치느라 바빴는데, 과장을 조금 보태 1분도 숨 돌릴 틈이 없었달까.
물론 하데스나 아벨이나 똑같이 바 빴으므로 나만 힘들다고 징징거릴 생 각은 없지만…….
‘이건 징징거려도 되지 않나? 진짜 힘들다. 너무 힘들어.’
모든 일과를 마치고 잠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을 줄 알았던 내 바람은 산산조각 났다.
오전에 하데스 앞에서 떨었던 그놈의 입방정 때문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붙잡은 채 백 미터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헉헉대고 있는 나와, 그런 나를 물끄 러미 내려다보는 시선.
눈만 슬쩍 돌려보면 내 옆에는 공작 전하가 계셨다. 안 어울리게 입은 귀 밑까지 찢어져선.
“뭘, 헉……. 웃어요?”
하데스는 시원하게 다 벗은 전라 상태였지만 나는 그의 조각상 같은 몸을 구경할 여유도 없었다.
왜냐고? 너무 힘들어서…….
“예뻐.”
“뭐래요. 헉……. 그런 말 해도 이제 안 넘어갈 거야.”
한 손으로 여유롭게 턱을 괴고 누워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하데스와 나는 벌써 5차전을 끝낸 상태였다.
아니, 다시 시작하기 전에 세었던 게 다섯 번이니 6차전인가?
몰라, 몰라. 그런 거 일일이 셀 정신도 없었다. 다른 생각 따위 못 할 정도로 나를 밀어붙이는 짐승 같은 하데스 덕분에.
하루 종일 빽빽했던 피곤한 일과를 보내놓고도 기어코 내 방을 찾아올 줄 알았겠는가? 과연 집념의 사나이 였다.
“힘들어?”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시는……?”
당연한 걸 왜 묻나. 황당해서 말이 끝까지 나오지도 않았다.
원망스러워하는 내 표정을 보고 하데스가 큭큭 웃었다.
“내가후회할 거라고 했잖아.”
“그냥 웃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 했죠. 그런데 오늘 다시 한번 깨달았 어요. 전하는 허튼 소리는 절대 안 하는 분이라는 걸. 앞으로 입조심해야 겠어요.”
“그렇게 힘든가. 힘은 내가 다 쓴 것 같은데…….”
하데스는 중얼거리며 내 얼굴을 보 고 왠지 입맛 다셨다. 아직 부족해도 한참은 부족한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질겁하고 이불을 더 끌어당기 며 물었다.
“전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혀.”
어깨를 으쓱하며 말하는데,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과연 무서운 남자…….
팔방미인인 건 알았지만 잠자리에 서까지도 완벽할 줄이야.
“회복의 이능으로 기력 북돋우는 건, 자기 자신한테는 못 해? 할 수 있 잖아?”
“굳이 해본 적은 없는데 할 수 있긴 하죠. 그런데…….”
나는 방긋 웃고 말했다.
“……하면요? 설마 지치면 기력 회 복시키고, 지치면 기력 회복시키고, 그렇게 날 밝을 때까지 힘 자랑 하시 려는 건 아니겠죠?”
“눈치가 빠르네.”
“장난해요? 무슨 짐승들이 짝짓기 하는 것도 아니고. 아니, 짐승들도 이 정도로는 안 해.”
내 말에 하데스가 피식 웃더니 가까 이 다가왔다.
설마 또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물리며 소리 질렀다.
“차라리 날 죽여라! 이제는 한계 다!”
재미있다는 듯 큭큭거리는 하데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그는 또 나를 덮치는 대신 그저 끌 어안았다. 목 뒤로 단단한 팔이 들어오는 게 느껴졌다.
바짝 당겨 끌어안긴 내 뺨 위로 뜨 거운 입술이 연신 잘게 내려앉았다.
무서운 북부의 공작 전하답지 않은 다정한 애정표현이었다. 괜히 부끄러 워진 내가 그를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간지러워요.”
“가만히 있어.”
못 달아나게 내 어깨를 꽉 끌어안은 하데스가 연신 뺨이며 귓가에 입 맞 췄다.
부끄러운 애정 공세를 가만히 받고 만 있던 내가 문득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공표식이 벌써 내일이네요.”
“응.”
우리는 서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가만히 침묵했다.
말하지 않아도 하데스의 생각쯤은 알 수 있었다.
나와 아벨의 입지를 확실히 할 수 있는 공표식을 마치고 나면, 아마도 그는…….
‘가버리겠지.’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말했다.
“전하, 부탁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