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응?”
“이제야 알겠군. 프로크레아토르가 왜 다른 하나의 미래는 굳이 내게 알 리려 하지 않았는지.”
“…….”
“그리고 왜 너를 들먹이면서 세상 우울한 표정을 지었는지도.”
미하일은 푸른 눈을 매섭게 치켜뜨 며 나를 노려보았다.
여태껏 그가 친절하게 꾸민 표정에 익숙해진 나였던지라, 제 감정을 여 과 없이 드러내는 얼굴에는 면역이 없었다.
흠칫 놀라는 나를 보며 미하일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 같지만 너나 프로크레아토르나 날 머저리 취급하는 데는 변함이 없군.”
“내가 언제?”
“모르는 척하지마. 한날한시에 태어나놓고 새파랗게 어린 막냇동생 취 급하던 게 어제 일처럼 눈에 생생한 데.”
“야, 그건 네가…….”
“신을 믿지 않는 자를 만들어서, 가이오니아가 내린 형벌의 법칙을 한 번 빗겨나간다? 그딴 눈속임이 가능 할까? 아니,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무런 위험 부담을 지지 않아 도 되는 거 맞나?”
날카로운 미하일의 질문에 나는 태연한 척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당황해 멈칫했다.
내 표정을 읽은 미하일이 피식 코웃 음 쳤다.
“신의 힘으로 태어난 우리가 신의 힘에 대적할 수 있는 인간의 손에 죽 고 나면, 그 후엔 어떻게 되는지 궁금 하네.”
“그냥 저주를 푸는 데 성공할 뿐이 야. 그렇게 되면 우린 다음 생부터는 더 이상…….”
“아니. 그런 거면 굳이 프로크레아토르가 널 아벨라의 몸에 집어넣었을 리 없지.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안 배 아닌가?”
“…….”
“날 바보 취급하지마, 제누스.”
“이그니스.”
“그놈도 미친놈이네. 네 무덤을 밟 고 서서 내가 좋다고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형벌이 괴로워 매번 연인을 먼저 찾 아내 죽여 왔던 그답지 않은 모습이 었다.
얼빠진 채로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엿보았는지 미하일이 덧붙였다.
“매 생에서 살인자로 살아왔다고 감정이 라는 게 다 사라진 줄 알았어?
너도 아니잖아?”
“그런 생각 안 했어.”
“거짓말.”
“…….”
“내 이름을 부르는 네 눈을 봤을 때 퍽 익숙하다고 느꼈지. 너도 달라진 게 없어. 같은 벌을 받고 있는 주제에 내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미치려고 하 잖아.”
그의 말에 나는 아주 먼 과거를 떠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행복했던 때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였고 애틋했다. 아버지와 가장 닮아있던 프로크레아토르는 나에게 다정한 오라버니였고, 지극히 인간다웠던 이그니스는 아픈 손가락처럼 신경 쓰이는 동생이 었다.
“너와 프로크레아토르는 항상 그랬 어. 아버지에게도 버림받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주던 건 형제들뿐이었 지.”
결국에 이그니스는 죄인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여태껏 용서하지 못했지만, 형제인 나는 아니었다.
그의 고통을 이해하기에 더더욱.
나는 그가, 가슴에 사무칠 만큼 안 타까울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런데 말이야, 제누스.”
미하일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가만 히 앉은 내 앞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너만 나를 형제 로 생각하고, 애틋해하고, 사랑하는 게 아니야.”
“…….”
“네 무덤을 밟고 비루한 숨을 쉬면 서 살아갈 생각, 없어. 저주를 풀기 위해 죽어야 할 존재는 하나지만 그게 너는 아냐. 그리고 나도 아니야.”
미하일, 아니 내 오랜 형제 이그니스는 나를 올려다보며 목소리에 힘주 어 말했다.
“우리의, 아버지야.”
목이 메어왔다.
나도 너를 사랑해, 덧붙이며 허공 위로 이지러지는 목소리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한 울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까마득한데도 너는 여전하네.”
“……이그니스.”
그는 예전에 꼭 그랬던 것처럼, 내 허벅지 위에 뺨을 붙이고 편안한 표 정으로 눈을 감으며 속삭였다.
“잘 지냈어?”
***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 분이 과거의 추억이었고, 나는 많이 도 울었다. 축축하게 젖은 손수건이 테이블 위에 그득히 쌓여있었다.
아이샤 에스클리프에게 마력억제제를 먹여온 이유도 뻔하지만 들었다.
약한 육체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아봤고, 백속성 신관들의 능력으로 살릴 수 있음을 알면서도 죽게 두었 던 거다.
자체적인 백속성 능력을 발현해 몸을 고치지 못하도록, 마력도 묶어놓 으면서.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야 미하일이 참 무서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나를 죽이려고 했던 여러 가지 시도들 은 전부 비교적 온화한 방법들이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문득궁금한 점 이 생겼다.
“500년 전에 아벨라 말인데.”
“응.”
“암속성 능력자도 아닌데 어떻게 미래를 보고 재림 예언을 남겼지? 역시, 네가 봐줬던 미래가 맞지?”
「내가 다시 에스클리프의 성녀로 재림하여 멸망 앞의 제국을 구원하게 될지니.」
퍽 평화롭고 희망적인 그녀의 재림 예언을 떠올리며 내가 물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벨라가 죽는 게 불쌍해서 그냥 해준 말이야? 아니면…….”
“아니, 미래를 본게 맞아.”
“정말?”
“그래. 확실히, 다 망가져가는 세계를 구원하는 그런 모습이었지.”
“궁금해. 조금 더 자세히 말해봐. 대체 그런 미래는 언제 어떻게 일어났던 거야? 여태껏 봤던 미래랑은 많 이 다른데?”
“그러니까…….”
회상하는 듯 미하일의 눈이 가늘어 진 그 순간이었다.
우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쾅쾅, 다급하게 기척을 내고 벌컥 내 방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급히 달려오기라도 했는 지 잔뜩 흐트러진 모습의 하데스가 무서운 얼굴로 서 있었다.
아.
아무래도 미하일이 내 방에 들렀다 는 사실을 전해 듣고 온 모양인 데…….
“아, 전하.”
성큼성큼 다가오던 하데스의 눈에 서 불이 튀었다. 아마 운 듯이 퉁퉁부은 내 눈을 발견했기 때문일 터.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진짜 겁도 없 이…….”
“전하!”
말릴 새도 없이 하데스가 미하일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어느새 ‘대신관 미하일 라이가르트’의 얼굴이 된 미하일이 어색하게 웃으며 하데스의 주먹을 마주 잡았다.
“공작 전하,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
“오해? 뒤지고 싶어? 내가 그렇게 얘기했는데도 말귀를 못 알아 처먹다 니, 정신이 나갔군. 아이샤, 이놈이 뭔 짓을 했는지…….”
“저, 소개할게요, 전하.”
“뭐?”
나는 코를 훌쩍이며 미하일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제 동생이에요.”
“하하…….”
이마에 살짝 핏줄을 세운 미하일이 웃으며 말했다.
“영애가 제 동생이시겠죠?”
“네가 동생이지.”
꽤나 친근한 우리의 모습에 눈을 가 만히 깜빡이던 하데스가 천천히 미하일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그니스’의 존재를 알고 있는 하데스다. 우리가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는 걸 그제야 대충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도 불만스러운 표정은 사라지 질 않았다. 내 팔을 당겨 자기 뒤로 감춘 하데스가 말했다.
“왜 울었어?”
“그냥 옛날 생각나서 울었죠, 뭐.”
“별…….”
미간을 좁히며 구시렁거리던 하데스가 여전히 젖은 내 눈가를 다정한 손짓으로 쓸었다.
따뜻한 손길을 받으며 가만히 서 있 다 보니 문득 미하일의 시선이 느껴 졌다.
민망해진 내가 하데스의 손을 치우 며 미하일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하데스가 나를 따라 미하일을 돌아봤다.
“그래서, 이제 애먼 사람 붙잡고 물 고 빨다 죽일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거 맞지?”
“뭘 또 물고 빨아요.”
“맞잖아! 바보같이 누군지도 몰라보고…….”
“제 영혼이 여기 들어있을지 상상이나 했겠어요? 쟤도 민망할 텐데 그 만 놀려요.”
“지금 다른 남자 편드는 거야?”
“아니, 이게 무슨 편을 드는…….”
옥신각신 다투는 우리의 대화를 잠 자코 듣고 있던 미하일이 웃었다.
“다행입니다. 공작 전하께서 아무 머리통이나 태우는 분은 아니셨군요. 영애의 머리통이 불탈 걱정은 안 해 도 될것 같습니다.”
하데스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는 그를 돌아봤다.
“내가 왜 아이샤의 머리통을 태워? 대신관 머리통이나 조심하시지. 일전 에 성에 왔을 때 내게 알량한 수작 부렸던 거, 복도에서 남의 여자 붙잡 고 비비적댔던 거, 지금까지 애먼 사람 죽이려고 별짓 다 했던 거 다— 잊 지 않고 있으니까.”
“아하. 무섭군요.”
전혀 무섭지 않다는 표정으로 하하 웃던 미하일이 돌연 하데스와 똑바로 눈 맞추며 말했다.
“이유가 어찌 됐건 영애를 울린 점 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저 말고 영애를 울리는 이들이 있다면 잘 응징해주세요.”
“그럴 거야. 그런데 굳이 대신관이 부탁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나 알아 서 잘 하는 남자거든.”
“예, 그리고.”
언뜻 미하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하데스도 갑자기 달라진 그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몸을 굳혔다.
“전하께서 영애를 울리게 될 때는.”
“…….”
성큼 다가온 미하일이 무섭게 웃었다.
그는 마치 여동생 시집보내는 오빠처럼 예민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제가 친히 응징해드리겠습니다.”
“……뭐?”
황당해하는 하데스를 향해 미하일 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뭐, 그럼 불청객은 이만 퇴장해볼 테니…… 모쪼록 즐거운 시간 보내시 기를.”
“하, 이봐.”
한 방 먹은 하데스가 뭐라 할 새도 없이 미하일은 홀연히 방을 나섰다.
쾅 닫힌 방문을 어버버 노려보던 하데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돌 아봤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거 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