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오랜만이야, 이그니스. 잘 지냈 어?”
마치 어제 헤어진 친구를 만난 듯 태연한 내 인사에, 미하일의 입이 살 짝 벌어졌다. 기다렸던 그를 만나 사실을 털어놓으니 이보다 더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대체 네가 어떻게…….”
“너라면 벌써 알아봤을 줄 알았는 데 말이야.”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어떻게 그 몸에…….”
“어떻게 되긴. 프로크레아토르가 아버지를 죽이고 사라진 거 알잖아. 그가 해놓은 짓이지.”
미하일이 인상을 찌푸렸다. 프로크레아토르가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짓을 벌여놓았는지 알 듯 말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대체 왜지?”
“프로크레아토르는 우리의 형벌을 끝낼 방법을 찾고 있었어. 아니, 이미 찾아냈지.”
“…….”
“그런데 내가 알아낸 사실을 말하 기 전에 말이야. 대체 네가 데보라에게 왜 그러는지 말해줘야겠어. 그 어린애를 정신적으로 괴롭혀서 네가 얻 어낼 게 뭐가 있다고 그래?”
“그 애의 정신에 균열을 내야 해.”
내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거리낄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미하일은 순순히 대답했다.
얼굴은 여전히 그 상냥한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이었지만, 속내를 내 보이기로 결심한 순간 그는 아주 다 른 사람이 됐다.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이그니스’의 모습 그대로다.
불같은 성미의 이그니스는 말에 거 침이 없었고, 나처럼 유약한 성격도 아니라 무르게 구는 법도 없었다.
생긴 것과 본모습의 괴리에서 오는 이질감에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니, 그런데…….
정신에 균열을 낸다니.
“무슨 개소리야?”
“가이오니아를 향한 증오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인간은, 찾기 어려워. 데보라는 내가 겨우 찾아낸 ‘씨앗’을 지니 고 있는 아이야.”
“뭐라고?”
“프로크레아토르가 말한 그 방법이 라는 게 뭐지?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만났을 때 그가 알려준 것도 그 방법 일 거야.”
“널, 찾아왔었어? 걔가 뭘 알려줬는 데?”
“신을 믿지 않는 자—”
“…….”
“—만이, 신의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다고 하더군.”
“뭐?”
미하일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야, 알겠다.
나는 아직 전생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프로크레아토르가 찾아낸 형벌의 굴레를 깨는 방법을 알고 하데스를 찾으려 했는지가 궁금했다.
비로소 그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프로크레아토르는 자신이 만든 세계로 떠나기 전, 나와 이그니스를 찾 아 알렸던 게 틀림없다.
신을 믿지 않는 자만이 신의심장에 칼을 꽂을수 있다—는 전언.
그래서 나는 하데스를, 미하일은 데보라를 찾아낸 거였다.
미하일은 데보라를 이용해 가이오니아를 죽이려는 계획을, 그리고 나는…….
가이오니아의 법칙에 지배받지 않는 하데스로 하여금 나를 죽이게 만 들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테지.
‘그랬구나. 그랬어.’
이그니스 또한, 프로크레아토르의 말에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던 거다.
이 길고 긴 형벌을 끝마쳐줄 ‘신을 믿지 않는 자’를.
“그래서 설마, 데보라를 신을 믿지 않는 자로만들고, 가이오니아를 찾 아내 죽이라고 하려고 키워왔던 거였 어?”
“…….”
맞는 모양인지 침묵하는 미하일을 향해 나는 한숨지었다.
“나를 구원하겠다던 말이 그 뜻이 었구나.”
나는 문득 인상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왜 저번에는 날 죽이려고 했어? 날 살릴 방법을 찾았다면 이번 생에서는…….”
……먼저 찾아내 죽이려는 시도를 안 했을 텐데, 하는 뒷말은 삼켜버렸다.
살얼음판 같은 미하일의 표정을 보 면 알 수 있었다. 굳이 그가 입을 열어 말하지 않아도.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음에 도 나를 또, 죽이려고 했다면 아 마…….
“이미 봤구나. 날 죽이는 미래.”
“알려줘? 어떤 미래였는지?”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잔인한 미래였던 게 틀림없다.
핵석을 파괴해 즉사하는 죽음이 비 교적 평화롭게 느껴질 정도로.
“네가 날 죽이는 미래를 봤다면 나 도 머지않았겠네.”
아벨을 죽이기 전에 나는 미하일의 손에 죽을 수 없다. 그러니 미하일이 본 미래에서, 나는 이미 아벨을 죽인 후일 터였다.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갔을 때만 해 도 아벨은 살아있었으니까…….’
정말로, 결국은 실패하는 게 맞구 나.
혹시 나, 하고 키워오던 희망이 한순 간에 무너지는 기분에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미하일이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게 느 껴졌다.
나는 애써 웃었다.
“역시 아버지를 죽인다는 건 너무 터무니없는 계획이야.”
“프로크레아토르가 날 찾아왔을 때, 형벌의 굴레를 푸는 데 성공하는 두 가지 미래를 봤다고 했어. 하나는 아버지를 죽이는 데 성공하는 미래였 고.”
“뭐? 누가 죽이는데?”
“그것까진 몰라.”
“그럼 다른 미래는?”
“말해주지 않았어. 그 이유는 아무 래도, 그 미래가 선택되지 않기를 바 라서였겠지.”
미하일의 덤덤한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크레아토르가 미하일에게 미처 알리지 않은 그 미래가 무엇일지 어 렴풋이 알 듯했다.
‘하데스는 결국 실패할 거야. 내가 할 일은, 하데스가 가이오니아를 죽 이는 데에 실패하더라도 하데스가 죽 지 않도록 살리는 거고.’
나는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아마 실패한 이후에 나는 아벨을 죽이게 되고, 미하일은 나를 죽이게 되겠지. 그걸 막고 이번 생에서 형벌의 굴레를 끊으려면 역시…….’
“아버지를 죽이지 않고도 형벌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알아. 프로크레아토르가 너에게 말하 지 않은 다른 하나의 미래.”
그게 무엇이냐 득달같이 물을 줄 알 았던 미하일은, 왜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으로 그저 나를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 나를 응시하던 미하일은 말했다.
“‘전지함’은, 가이오니아가 우리에게 내린 저주야.”
다소 뜬금없는 말이 었지만, 나는 잠 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그 수많은 저주들은 하나같이 우리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지. 그 가 보여주는 미래는 그저, 우리를 가 장 절망적인 상황으로 인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무슨 말을 하나 싶었는데…….
미하일은 아무래도 시무룩해진 나를 달래려는 모양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옛날의 이그니스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작게 웃었다.
“그래.”
“너도 알겠지만 미래를 아예 바꿀 수 없는 건 아니야.”
“응, 그래.”
“난 지금까지 미래를 바꾸는 데 수 십 번 성공했고.”
연인의 영혼이 덜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하는 쪽으로, 말이지.
이거나 저거나 어차피 죽음으로 귀 결되는 건 매한가지 아닌가.
날 위로하려는 미하일의 마음을 모 르지 않았기에, 나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지만, 그도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나만 위로받고 있으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최대한 살아보자. 나 살고 싶어.”
“…….”
“그런데 혹시 실패했을 때에는, 이 렇게 하자.”
“뭘?”
미하일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 라봤다.
“신의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다는 건 그렇게 직역하는 게 아냐? 신을 믿 지 않는 자들은, 가이오니아의 법칙에 지배받지 않는 자들이야.”
나는 천천히 설명했다.
“우리는 형벌을 마치기 전에 그 누구의 손에도 죽을 수 없는 불사와 같 지. 그런데, 그런 우리를 죽일 수 있는 존재들이 있어. 가이오니아의 법 칙에 지배받지 않는. 그게 바로 신을 믿 지 않는 자들이야.”
미하일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그는 곧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신을 믿지 않는 자라면, 나를 죽일 수 있는 건가? 내가 너를 죽이는 형 벌을 마치지 않았는데도?”
그는 당장이라도 신을 믿지 않는 자를 만들어 죽으러 갈 기세로 물었다.
어쩜 나와 생각하는 게 똑같을까? 나는 고개 저었다.
“프로크레아토르가 말했던 다른 한 가지의 방법이 뭔지 알겠군. 네 말이 맞는다면,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않았 는데 다른 이의 손에 죽는 순간 형벌의 법칙이 깨지는 게 돼. 그렇다면 당장…….”
“아니, 아니. 그게 아냐. 진정해.”
나는 훙분한 미하일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반쯤은 네가 이해한 게 맞아. 딱 한 번. 형벌의 법칙을 피해가기만 하 면 돼. 그런데 너만 피하는 게 아니라 나도 피해야지. 그래야 내 자식도 무 사할 거 아냐?”
“…….”
“나를 왜 네 연인의 몸에 환생시켰 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미하일의 말대로, 미하일이 연인을 죽이는 형벌을 치르기 전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된다면 그의 지난한 벌 은 끝난다.
하나 확신할 수 없는 한 가지.
눈속임에 지나지 않는 그 방법에는 대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미하일이 아주 죽게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저 육체의 소멸이 아닌, 영혼의 소멸.
만약 그 방법을 실행시킬 생각이라 면 리스크는 최소한으로 져야 했다. 그래서 프로크레아토르는 나를, 아벨 라의 몸에 환생시킨 것이다.
“네가 아니라 나야. 지금 아벨라의 몸을 갖고 있는 내가 죽으면 돼. 그러 면 너는 네 연인을 죽이는 데 실패하 고, 나는 내 자식을 죽이는 데 실패하게 되지.”
나는 오랜 형벌의 굴레를 풀 수 있는 그 깔끔한 방법에 미하일이 비로 소 마음의 안정을 찾을 거라고 생각 했다.
그는 프로크레아토르의 자취를 어 렴풋이 따라가면서도 막막했을 것이 뻔했다. 내가 내려준 결론이 반갑겠 지.
눈앞에 정답이 있을 때의 그 희열 감.
그러나, 만족스러워할 그를 마주 보 며 웃어주려던 나는 놀랐다.
잠시 생각하는 듯 침묵하던 미하일 은 짜증스럽 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돌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