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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40화 (140/221)

140화.

이럴 수가.

삼십 분이나 데보라를 찾느라 헤맸 던 나와 달리, 단번에 그녀를 찾아낸 아벨을 보고 나는 확신했다.

남주와 여주라서가 아니라 그냥, 아벨과 데보라는 사랑할 운명 일 거야.

「저도 가끔 우울할 때 가는 곳이 있거든요. 그 사제님이 거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벨이 나를 끌어 데려간 곳은, 성에 오고 나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다.

일단 북부는 춥기도 했고 온실 정원이라는 따뜻한 산책 코스가 있었기에, 딱히 성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닐 일이 없어 몰랐다.

본성과 별채 사이에 있는 그 장소는 꼭 숨겨진 요새 같았다. 잎이 작고 키 가 큰 나무들이 빽빽이 자란 사이를 아주 조금만 헤치고 들어가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서부터 흘러내린계곡물이 고여 얼어붙은 작은 못이 있었다.

도개교 아래 겔코르누 강처럼 딱딱 하게 얼어붙은 그것은 못이 라고 하기 에도 뭐했지만, 일견 삭막하고 황량 한 북부에서 그나마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데보라는 정말로 그곳에 있었다. 꽁 꽁 얼어붙어 보석처럼 빛나는 못가에 쪼그려 앉은 채로.

“어, 어떻게 알았어?”

“그냥 옛날에, 무작정 돌아다니다 가 발견했어요. 아무도 안 오고 조용하고 그래서, 그 뒤로 자주 왔는 데…….”

작은 데보라의 뒷모습을 보며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짓던 아벨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어머니가 오신 뒤로는 같이 정원을 산책하니까 올 일 없었지만요.”

아마 아벨도 꼭 데보라처럼 슬프고 속상한 일이 있었을 테지. 혼자 앓으 려다가 이런 곳을 발견했을 거다.

문득 이 작은 아이들이 안쓰러워져 한숨짓던 나는, 아벨을 이끌어 천천히 데보라에게로 다가갔다.

“저기, 사제님.”

조용히 내가 낸 목소리에 데보라가 화들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그녀는 허둥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어머,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요.”

“아니, 아니예요. 그런데…… 누구 세요?”

약간 경계하는 눈으로 나와 아벨을 번갈아 바라보며 데보라가 말했다.

뭐라고 소개해야 하지. 잠시 고민하 던 내가 대답했다.

“아이샤 에스클리프예요. 아까 사제님이 응접실에 왔을 때, 저도 있었 는데…….”

“아! 고, 공작부인! 안녕하세요!”

당황해 시뻘게진 얼굴로 내게 인사한 데보라의 시선이 옆에 있던 아벨 에게 닿았다.

“그, 그러면 여기는 루버몬트 공자 님……. 마, 만나 뵙게 되어 여, 영광입니다. 용신 가이오니아의 종, 데보라 라이가르트예요.”

아직 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데보라는 말을 잘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어린아이인지라 살짝 혀가 짧고 발음이 뭉개졌다. 그게 또 킬링포인트였다.

귀여워…….

아벨, 너도 보이니? 저 감당할 수없는 귀여움이?

아벨을 돌아보니, 첫 만남이 어색한 모양인지 내 다리를 붙잡고 반쯤 숨 어 있는 중이었다. 내가 눈짓하자 그 가 쭈뼛쭈뼛 옆으로 나왔다.

“아벨 루버몬트입니다. 만나서 반 가워요, 사제님.”

으헉……!

남주와 여주의 첫 만남! 그것도 귀염뽀짝한 어린 시절에 이룩하였도 다!

나는 데보라를 달래야 하는 상황도 잊고 둘의 역사적인 만남을 지켜보며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마주 보는 둘의 시선이 나 쁘지 않았다.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는듯했다.

‘흡……. 이게 이렇게 설렐 일인가? 내가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아니, 이 쪼끄만 애들이 아직 연애할 나이는 아니긴 하지만…….’

너무 좋았다. 이제국에서 제일 멋있는 남자로 성장할 아벨과 제일 능력 있는 여자로 성장할 데보라의 미래가 그려지는 듯해 더욱 감동이었다.

게다가 둘이 사랑까지 한다니!

흥분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올 랐다. 계속 그들을 보고 있다간 시동 걸린 덕질이 브레이크 고장 난 8톤 트럭처럼 저세상으로 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드릉드릉하는 마음을 감추고 말했다.

“사제님, 기분은 좀 괜찮아졌나요?

사실 그렇게 나간 게 조금 걱정돼서 찾았어요.”

“……네?”

처음 만난 내가 이런 호의를 보인다는 게 데보라는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조금 당황하다가, 곧 얼굴을 붉히고 가만히 대답했다.

“……괘,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여기 너무 추운데, 들어가는 게 좋 지 않겠어요?”

문득 데보라의 옷차림이 눈에 들었다. 얇은 사제복 한 벌이 전부였다.

입고 있던 케이프를 벗어 둘러주려 는데 옆에 서 있던 아벨이 말렸다.

“안 돼요. 어머니도 추워요.”

“응?”

아벨은 케이프를 벗어주려던 나 대신 자기 재킷을 벗어 데보라에게로 다가가 둘러주었다.

“가, 감사합니다. 공자님.”

당황한 얼굴로 아벨과 눈도 못 맞춘 채 데보라가 말했다. 아벨은 곧 총총 걸어 내게 돌아왔다.

나는 방긋 웃는 아벨의 얼굴에 시선을 빼앗긴 채 멍하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한참 서 있었다.

아니, 옷 벗어주는 행동 한 번에 두 여자의 마음을 이렇게 홀라당 빼앗아 버린다고?

“과연…….”

“…….”

“완벽한 남주…….”

“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아벨을 보며 나는 심장을 붙잡았다.

열 살 때부터 완성된 로판 남주의 정석이라니. 반칙 아니냐?

“흡. 아무것도 아니야. 그나저나 사제님, 정말 들어가지 않을래요? 감기걸려요.”

안으로 이끌려는 내 손을 보고 데보라는 망설였다.

“대신관님께 혼날 것 같아서 요……. 아까, 너무 무례하게 굴고 말 았는데…….”

“네? 걱정하지마요. 전혀 무례하지 않았어요. 사제님은 아직 어리잖아요. 황제 폐하께서도 이해한다고 하 셨는 걸요?”

“그, 그래도…….”

“그리고 그 인간이, 아니, 대신관님 이 사제님 혼내고 막 그래요? 어이가 없네?”

“아! 아니예요, 아니예요! 대신관님 은 저 한 번도 혼내신 적 없어요. 그 치만, 그치만 이번에는 제가 정말, 잘 못했으니까…….”

“잘못 안 했다니까요. 괜찮아요. 너무, 속상해서 아마…….”

데보라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무 릎 꿇고 그녀와 눈 맞춘 채 웃어주었다.

“……저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너를 이해한다고는 말 해줄 수 있었다.

데보라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삐죽거 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울어도 괜찮은데. 아벨이나 데보라 나, 아직은 마음 가는 대로 굴어도 좋을 아이들이 왜 눈물 참는 법부터 배 워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깨를 쓰다듬어주는 내 손길에 데보라는 조금 더 입술을 삐죽였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나는 망설이는 데보라의 눈치를 보 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면요, 사제님. 실례가 안 된다 면 제 방으로 가지 않을래요? 잠깐 쉬었다가 돌아가도 괜찮을 거예요.”

추운 날씨에 중간중간 코를 훌쩍거 리던 데보라가 솔깃했는지, 고민하는 표정으로 나를 힐끔거리다가 곧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아주 귀여웠다. 나는 그녀를 덥석 안고 싶어서 자꾸 움찔거리는 손가락을 초인적인 힘으로 참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만히 내밀어진 손을 데보라가 동 그랗게 뜬 눈으로 한참 응시했다.

“어, 음. 첫 만남에 손잡는 건 좀 그 런가요?”

다시 손을 거두려니 데보라가 움찔 하며 소리 질렀다.

“아니요!”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내가 그대로 멈춰있자, 데보라가 그 작은 손을 뻗어 내 손을 냉큼 붙들었다.

밖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온기라 곤 하나도 없는 손이 조금 안쓰러웠다. 웃는 나를 올려다보며 수줍은 듯발끝을 꼼지락거 리는 그 모습도.

아벨을 실제로 처음 만났을 때와 다 르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저 길지 않은 몇 줄의 서술로 끝 나버린, 둘의 안타까운 어린 시절이 서글픈 그 기분.

“자, 따뜻한 곳으로 가요. 귀여운 우리 사제님.”

“네에……!”

살짝 시큰거리는 코끝을 훔친 다음, 나는 한 손에는 아벨의 손을, 다른 손 에는 데보라의 손을 잡고 살금살금 성으로 돌아갔다.

***

하얗고 몽실몽실 달콤한 수플레, 먹음직스럽게 구운 부드러운 마들렌, 크고 탐스러운 딸기가 올라간 프레지에…….

그리고, 아벨이 좋아해서 식당에 자주 주문하는, 설탕에 알록달록하게 색을 입힌 마카롱까지.

내 방 테이블 위에 한가득 차려놓은 디저트에 데보라가 휘둥그레진 눈으 로 어버버거렸다.

“케이크 좋아해요?”

프레지에 한 조각을 데보라의 접시에 옮겨 담아주며 내가 묻자, 그녀가 고개 저었다.

“어머, 안좋아해요?”

“모, 모르겠어요. 안 먹어 봐서.”

“네?”

미하일 이 자식. 채식한다기에 고기 만 안 먹이는 줄 알았더니 케이크 한 번 안 사줬나?

당황한 나를 보며 데보라가 덧붙였다.

“엄마랑 살 때도 안 먹어봤어요. 한 번도.”

엄마, 얘기가 나오자 나는 멈칫했다. 눈치 빠른 아벨이 슬쩍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럼 먹어보세요, 사제님. 맛있어요.”

아벨이 포크를 건네며 말하자 데보라가 그것을 받아들고 잠시 머뭇거리 다가 케이크 귀퉁이를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통통해서 흐를 것 같은 뺨이 오물거 렸다. 나는 달콤한 디저트 대신 귀여운 데보라의 모습을 바라보며 입맛 다셨다.

이윽고 데보라가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입에 꽤 맞았던 모양이다.

“마, 맛있어요!”

“그쵸? 이것도 먹어봐요.”

한입에 넣을 수 있게 작게 만들어진 마카롱 두 개를 접시에 옮겨주자 데보라가 하나를 먹었다.

딸기 케이크, 프레지에가 입맛에 맞 았다면 마카롱도 그럴 터였다. 역시 데보라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 이것도…….”

“하하, 많이 있으니까 많이 먹고 가요.”

뿌듯한 마음에 마들렌까지 두 조각 옮겨주며 그렇게 말해줬다. 그것도 한 조각 먹고 나서, 왜인지 데보라의 손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접시에 남은 프레지에와 마카롱 하나, 마들렌 하나를 빤히 내려 다보다가 천천히 포크를 놓았다.

잿빛 눈동자를 도록도록 굴리며 뭔 가 망설이는 듯한 데보라에, 의아해진 내가 물었다.

“음, 왜요? 마들렌은 별로예요?”

“아, 아니요오. 다 맛있어요.”

“그런데 왜? 더 먹어요.”

“아뇨, 그…….”

쭈뼛거리던 데보라가 한참 망설였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내게 허락을 구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대신관님도 드셔보셨으면 해서요. 호, 혹시 이거 두 개만 가지고 가면 안 될까요?”

하나씩 남은 마카롱과 마들렌을 가리키며 말하는 데보라에, 나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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