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놀라 움찔하는 아이샤를 미하일은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의 품에서 빠 져 나온 아이샤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전하…….”
무서운 눈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하데스가 아이샤의 팔을 잡아 제 뒤로 보냈다. 이윽고 미하일과 마주 보게된 그의 얼굴 표정이 흉흉했다.
분노를 여과 없이 드러낸 하데스의 얼굴과 달리 태연한 표정으로 미하일 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예, 루버몬트 공작 전하.”
“감히 누구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 비적대? 내가 이번에도 그대의 머리 통을 못 날릴 줄 아는 건가?”
“음? 왜 이렇게 화가 나셨는지요.”
“몰라서 물어?”
하데스가 발끈하며 미하일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위협적인 움직임에도 미하일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여전했다.
“굉장히 초조해 보이시는군요. 영애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 없으셔서 야…….”
“뭐?”
굳이 하데스의 성에서 그를 도발해 좋을 게 하나도 없음을 미하일도 알 았다.
그러나 지극히도 인간적인 마음이 그 얼마나 치졸하던가. 자신의 연인을 제 인연인 양싸고도는 하데스에게, 미하일은 분명히 질투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참으로 우스웠다. 어차피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결국은 죽게 될 연인의 불쌍한 운명을 알기에, 차라리 다른 이를 마음에 담았으면 좋겠다고 바란 적도 있었건만.
정작 연인의 옆에 날벌레처럼 꼬인 낯선 존재가 지독히도 불쾌하게 느껴 졌다.
피식 웃은 미하일이 제 멱살을 틀어 쥔 하데스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영애의 마음이 변하더라도 말입니다, 전하.”
변하게 되겠지. 아이샤에게 홀딱 반 해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하데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운 명이니까.
미하일은 비죽 웃었다.
“부디 영애를 탓하지마세요. 아마 전하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떠나고 있지는 않을지, 잘 생각해보시면 서…….”
“뭐라고?”
불쾌한 듯 하데스의 눈썹이 쓱 올라 갔다. 억지로 기울인 입꼬리가 경련하는 모습에 미하일이 또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부들부들 몸을 떨던 하데스가 길게 한 번 심호흡했다. 분한 마음을 가다 듬는지 몇 번 숨을 고른 그가 금세 표정을 갈무리하고 말했다.
“그러는 대신관도 걱정을 좀 해야 할 거야. 그대의 연인이 알면 얼마나 원통하겠어.”
어느새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하데스는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며 덧붙였다.
“매번 다시 태어나 그대를 사랑해주면 뭐 하나? 정작 연인이라는 자는, 애먼 사람 붙잡고 절절하게 구는 데 말이야.”
“…….”
그 순간, 미하일이 웃는 채로 굳었다. 그는 가만히 하데스의 말을 곱씹 다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웃으면서 되묻는 얼굴에는 그답지 않게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당연한 말이었다. 하데스의 발언은 뭔가 아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기에.
자신을 이그니스, 라고 부르던 아이샤의 눈에서 찰나에 읽었던 어떤 기 시감. 그리고 지금 하데스의 발언.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 태연했던 미하일의 평정심을 뒤흔들었다.
“그 뒤가 구린 눈깔 제대로 뜨고 보 라고. 이 여자가 누군지.”
하데스가 등 뒤에 있던 아이샤를 한 팔로 부드럽게 끌어왔다. 익숙한 듯 하데스의 품에 폭 안기는 아이샤를 보는 미하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 워졌다.
보란 듯 아이샤의 어깨를 끌어안은 하데스가 그녀의 귓바퀴 위에 짧게 입 맞췄다. 거만한 시선으로는 계속 미하일을 응시하면서.
“미안한 말이지만, 내 아내가 그대 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일은 없을 거 야.”
“…….”
“그러니까…….”
일순 웃던 표정을 싸하게 굳힌 하데스가 아이샤를 안은 채 휙 뒤돌았다. 그리고는 살짝 고개만 돌려 경고했다.
“……정말로 타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손모가지 관리 잘해.”
다시 뒤를 보인 하데스가 한 마디 남긴 채 멀어졌다.
“세 번째 경고는 없어.”
***
쿵쾅쿵쾅, 발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죄지은 사람처럼 힐끔 하데스를 돌 아보니 그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 로 입술만 뻐끔거리는 중이었다.
“저기, 전하.”
“…….”
“화났어요?”
“아니!”
“에이, 화났네. 미안해요. 대신관이 뭐 반응할 새도 없이 갑자기, 끌어안 아서…….”
“말 안 할 거야? 그대가 대신관의 연인이랑은 전혀 다른 사람인 거? 아니, 그것보다 저 멍청이는 왜 그렇게 사랑했다는 연인 하나 제대로 못 알 아봐?”
“말해도 상관없어요. 아니, 말할 거긴 한데, 대신관이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아서 일부러 말을 좀 아꼈어요. 입 열게 하려고.”
“뭘 숨기고 있는데?”
“아직은 저도 잘 몰라요. 조금 더 알아보고 확실해지면 전하께도 알려 드릴게요. 아무튼 화 풀어요.”
“화안 났…….”
씩씩거리며 대꾸하려던 하데스가 이내 푹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화난 표정이니 부정해봐야 의미 없다 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 정도로 화나 본 거 오랜만이 네.”
“좋아요. 솔직하시네요.”
“변태 같은 놈이 누가 보면 어쩌려 고 사람 다 지나다니는 복도에서 진짜…….”
이를 갈던 하데스가 우뚝 걸음을 멈 추곤 내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가 만히 그곳을 응시하던 하데스가 무너 지듯 나를 끌어안으며 목 위로 얼굴을 묻었다.
천천히 얼굴을 비비적대는데 꼭 어린아이 같았다. 내가 각게 웃자 하데스가 부루퉁한 얼굴을 들고 투정부렸다.
“웃겨?”
“아뇨, 아뇨.”
“재수 없는 대신관 냄새.”
하데스는 작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나를 꽉 끌어안고 연신 등을 쓰다듬 었다. 꼭 먹잇감에 제 체취를 묻히는 들짐승의 행동 같았다.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말 많은 황제를 상대하고 나온 길이 었다. 과연 하데스 말대로 그의 얼굴 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는 축 늘어 진 하데스를 잡아 세우 고 어깨를 붙잡았다. 천천히 회복의 이능을 불어넣자 그가 움찔했다.
“……이렇게 해줄 필요까지는 없는 데. 남발하지마. 마력은 소모품이라 고.”
“백만분의 일도 안 썼는 걸요. 이 몸, 정말 대단하다고요. 걱정하지마 세요.”
방긋 웃는 나를 황당하다는 듯 내려 다보던 하데스가 픽 미소 지었다.
“크흠…….”
그때 마주 보고 웃던 우리 사이로당황한 헛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란 나와 하데스가 옆을 돌아보았다.
포트넨 백작. 루버몬트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하데스만큼 바쁜 몸이 되는 가신이 었다.
희끗희끗한 금발을 긁적이며 헛기 침하던 백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 하데스를 찾으러 나온 모양이 었는데, 예기치 않게 복도에서 대놓 고 애정표현 하는 우리를 발견해 당 황한 눈치였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전하. 중부에서 올라온 시온 후작 내외의 알현 요청을 잊으신 게 아니라면 지금 서둘러 가보셔야…….”
“하아…….”
하데스는 아무래도, 미하일의 뒤를 쪼르르 따라 나가는 내가 걱정되어 선약도 내팽개치고 뒤따른 모양이었다.
가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하데스의 등을 밀며 내가 말했다.
“얼른 가보세요.”
“그대는…….”
옆구리에 나를 함께 끼고 돌아가려는 눈치이기에, 곧바로 고개 저었다.
“이따 봐요.”
부루퉁한 하데스의 표정에도 그를 따라갈 순 없었다. 미하일과의 만남에서 얻어낸 게 없으니, 나는 따로 알 아봐야 할 게 있었다.
데보라…….
그녀를 만나봐야 했다.
「걱정하지마십시오. 이제 곧 당신 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 니까요.」
무언가를 꾸미고 있는 듯한 미하일의 그 말과, 가여운 데보라를 일부러 몰아붙인 행동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까.
“같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또 미하일과 붙어있을까 봐 걱 정되는지 하데스가 걸음을 못 떼고 징징거렸다.
포트넨 백작의 시선이 신경 쓰인 내가, 그의 눈치를 보다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 하데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지 말고, 이따가 밤에…….”
조금 부끄러웠지만.
“……방에서 만나요.”
과감한 내 발언에 하데스가 고장 난로봇처럼 굳었다. 눈만 깜빡이는 얼굴이 볼만했다.
발을 풀고 내려와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서…….
쿡쿡거리는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하데스가 사악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겁이 없네, 진짜…….”
그가 허리를 숙여 반대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 이따가 보자고. 지금 이런 도발, 엄청 후회할 거야.”
음흉한 목소리에 아차 싶었다.
음…….
며칠 전의 밤을 떠올려보니, 벌써 후회되는 기분이었다.
***
하데스를 보내고 나는 무작정 성안을 휘젓고 다녔다. 데보라를 찾기 위함이었다.
상처받고 응접실을 달려 나간 그녀 가 어디로 갔는지는 미하일도 모르는 눈치였다. 신전의 신관과 사제들이 머무는 방에도 들렀지만 데보라는 없었다.
‘어디로 간거야.’
나는 미하일의 의미심장한 발언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어쩌면 데보라를 만나봄으로써 나는 소설〈페르소나〉를 읽으며 제일 궁금했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착한 대신관 행세를 하며, 아벨과 데보라를 세뇌해 미하일이 종국에 이 뤄내고자 했던 게 무엇이었는지!
‘아무래도…… 저주를 풀려고 했던 것 같지?’
점점 풀려가는 듯하면서도 짚이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머리가 지끈 아 파왔다.
답답한 사정을 풀어줄 데보라는 숨 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머리털 하나 보이지도 않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그때였다. 등 뒤에서 와락 허리춤을 안아오는 조금 낮은 손길에 내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후…….
“정말…….”
작은 손을 풀고 빙글 돌아보니 역시, 아벨이었다.
“……보고 싶은지 어떻게 알고 이 렇게 짠 나타났지?!”
“헤헤…….”
배시시 웃은 아벨이 다시 내 허리를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한참 얼굴을 비비적대던 그가 삐쭉 고개를 들 었다.
“방에 있기 힘들어서 나왔는데……바로 어머니가 보였어요.”
“응? 힘들어? 아…….”
그럴 만도 했다. 공표식을 앞두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귀족들이 벌써꽤 되었다. 하데스는 물론이고 공표 식의 주인공인 아벨을 찾아 인사하려는 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터였다.
당연하게도 하데스는 그들을 일일 이 상대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었다. 물론 나도 곁을 지키는 게 맞긴 했지만, 지금은 데보라를 만나 야 해서.
“어머니는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 요?”
“아, 나는…….”
잠시 고민하던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아까 신전에서 온 어린 사제를 한명 만났어. 음, 그런데, 뭐라고 해야 하지……. 아, 조금,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달래주려고. 울면서 나갔 는데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겠네.”
뜬금없이 신전의 어린 사제를 찾는 내가 의아했는지, 아벨은 큰 눈을 가 만히 깜빡이다가 곧 웃었다.
그는 내 손을 붙잡더니 다정하게 어 루만지며 말했다.
“역시 어머니는 너무 다정해요.”
“으음, 다정하다기보다는 정말로걱정되어서 그런 거야. 네가 봐도 안스러웠을걸. 그런데 얘가 정말, 어디 로 갔을까…….”
“음…….”
나와 함께 고민해주는 듯 약간 생각에 잠겨있던 아벨이, 손뼉을 딱 치고는 나를 당겨 이끌었다.
“이리 와 보세요, 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