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평정심을 찾을 수 없었다. 미하일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아이샤의 눈을 빤 히 직시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연인은 가이오니아에게 저주받은 자신과는 달랐다. 형벌의 굴레에 얽 혀 매 생마다 희생당하는 운명 이 었으 나 신에게 버림받은 것은 아니 었다.
이그니스, 그 이름을 알기 위해서 연인은 전생을 기억해야 했다.
전생을 기억한다는 건 곧, 그녀가 신의 품 안에서 벗어난 저주받은 자 식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백속성 능력자였다. 그런 그녀가 전생을 기억할 수 있다면…….
‘프로크레아토르가 한 일인가?’
“어떻게…….”
“묻지 마. 대답해줄 생각 없으니까. 네가 왜 데보라를 그렇게까지 몰아붙 이는지,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를 대기 전까지는.”
아이샤는 거래를 원했다. 자신의 행 동을 설명하기 전에는, 궁금증을 풀 어줄 생각이 없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미하일은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다.
데보라, 그녀는…….
무기였다.
용신 가이오니아를 살해하고, 비로 소 불쌍한 자식들의 운명의 굴레를 끊어줄.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낼 생각은 없 었다. 자신의 형제인 프로크레아토르가 저주받은 자식이 되기까지 불사하 며 찾아낸 ‘방법’을 물거품으로만들 수는 없었기에.
「우리의 아버지를 죽이자, 이그니스.」
「나는 더 이상 내 형제들의 고통을 지켜보기만 할 수 없다.」
오랜 옛날의 기억이 어렴풋이 미하일의 머릿속으로 밀려들었다.
***
프로크레아토르, 그의 형제가 막 아버지를 죽이고 난 이후였다.
아버지의 피를 묻힌 손으로 프로크레아토르는 이그니스를 찾아왔다.
“이그니스.”
“대체 왜……?”
처음에는 굳이 아버지를 죽이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아버지를 닮은 자식이었다. 전능하다는 것 이외에도 인간보 다는 신을 닮아 있었다.
신보다는 인간에 가까웠기에 죄를 저지르고 만 자신이나 제누스와는 전 혀 다른.
“우리의 아버지를 죽이자, 이그니스.”
프로크레아토르가 말하는 아버지는 용신 가이오니아의 본체였다. 그가 이미 죽이고 돌아온 인간형의 껍데기 가 아닌.
“그것만이 너희들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니까.”
“왜 그렇게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이그니스의 앞에서, 프로크레아토르는 그저 웃었다.
아버지의 곁에서 사랑받는 자식으 로 영원히 행복할 수 있었던 그가, 왜 아버지가 아닌 형제들을 선택했는 지…….
이그니스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신이 아닌 인간이니까.”
“…….”
“아버지는 완벽하지 않았던 너희들을 이해하지 못해 벌을 내렸지만, 나는 인간이고 너희들의 형제이기에, 너희들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기꺼이 형제들을 위해 피를 묻히고 돌아온 그의 앞에서, 이그니스는 먹 먹해지는 감정을 다잡을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내 형제들의 고통을 지켜보기만 할 수 없다.”
“…….”
“아버지를 죽이고 두 가지의 미래를 보았다. 두 미래 모두, 너희들은 비로소 자유로워졌어.”
“……뭐?”
그때의 벅찬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이그니스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기에.
프로크레아토르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다급하면서도 진지한 눈으로 말했다.
“신을 믿지 않는 자와 아버지의 권 능이 닿지 않는 무기가 필요하다. 그 자가 아버지의심장을 찌르고, 결국 너 희들을 자유롭게 하는 미래를 보았 으니까.”
프로크레아토르는 미래를 볼 수 없 었다. 전지함이라는 저주는 저주받은 자식들에게만 허락된 것이었기에.
그는 아마 확실히 형제들이 자유로워질 미래를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저주받은 자식이 되었을 터.
이그니스는 그의 형제에게 느끼는 크나큰 부채감과, 동시에 고개를 쳐 드는 희망에 전율했다.
“다른…… 미래는?”
그 물음에, 프로크레아토르는 고개 젓고 덧붙였다.
“부디 아버지를 죽이는 데에 성공하기를 바란다.”
두 가지의 미래를 보았다고 했지만, 프로크레아토르는 다른 하나의 미래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니, 알리고 싶 어 하지 않았다.
프로크레아토르가 말한 첫 번째 미래는 아버지를 죽이고 운명의 굴레를 끊는 것.
그러나 이그니스는 그것이 아주 힘 들 거라 예상할 수 있었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 없다. 아버지 께서 혹시나 내 전능함을 앗아가기 전에, 이 세계에서 떠나야 해.”
“내가 뭘, 내가 뭘 하면 되지?”
“알게 될 거야. 부디…… 이그니스, 우리의 불쌍한 누이도 자유로워질 수있도록, 제발.”
“모르겠어. 조금 더, 조금 더…… 내가알 수 있게…….”
“제누스를 부탁해. 나는 그 애가 꼭 행복해지길 바라.”
간절한 그의 눈빛을 마주하며 이그니스는 굳게 맹세했다.
“걱정하지마라. 네가 우리의 누이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그 아이를 생 각하고 있으니까.”
“고맙다.”
“헛되이 하지 않을게.”
……너의 희생을.
힘들게 삼킨 뒷말을, 그의 형제는 분명 알아들었으리라.
작은 미소 하나를 남겨두고 프로크레아토르는 홀연히 사라졌다. 용신 가이오니아의 세계에서, 아주.
홀로 남은 이그니스는 오랫동안 그의 말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우리의 누이…….’
자신과 똑같이 저주받은 운명의 굴레에 빠진 형제, 제누스.
프로크레아토르는 왜, 굳이 그녀를 들먹이며 눈물을 흘렸을까?
아직도 이그니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불쌍한 그녀가 형벌의 굴레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만큼은 프로크레아토르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마운 형제가 아버지의 권 능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자취를 감춘 뒤, 또 아주 긴 시간이 흘렀다. 이그니스는 또 괴로운 생을 반복, 반복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 나의 형제여. 모두가 가이오니아의 종속인 이 세계에서, 그를 믿지 않는 자라 함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프로크레아토르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괴로워하던 와중, 이그니스는 꿈을 꾸었다. 전지함으로 내다본 미래였다.
그곳에서 이그니스는, 오랜 시간 동 안 보지 못했던 그의 아버지, 용신 가이오니아를 보았다.
주변이 모두 암혹으로 먹혀버린 시야에 오롯이 서 있던 가이오니야.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찬란 한 금빛으로 빛나고 있던 그의 품에는, 작은 아이 하나가 안겨 있었다.
가이오니아는 자신의 품에 안겨 눈 물 흘리는 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함 께 울었다.
「괴롭구나. 내가 만든 자식들이 모 두 나의 뜻을 거스르고야 말다 니…….」
안긴 아이는 가이오니아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며 울었다. 일견 그에게 복종하는 순수한 자식처럼 보였다.
「저는, 저는 아버지의 뜻에 따를 거예요.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그래, 불쌍한 내 아이야. 너만은 나의 뜻을 알아주어 다행이구나. 부 디 슬퍼하지 말거라. 나의 세계 안에 서 나의 뜻을 따르며 너는 비로소 자 유로울수 있을 테니…….」
가이오니아는 보랏빛 머리칼을 가 진 작은 아이를 소중히 끌어안으며 미하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안타 까운 눈으로 말했다.
「저 어리석은 내 아이와는 달 리…….」
보이던 미래는, 거기서 끝이 났다.
이그니스는 엄청난 흥분에 사로잡 혔다. 가이오니아의 품에 안긴 작은 아이의 감정이, 꼭 자신의 감정처럼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결코 말하는 대로 가이오니아에게 복종하고 있지 않았다.
아주 오랜 세월, 가이오니아에게 쌓 아온 자신의 증오를 고스란히 닮아있는 아이의 속내가 꼭 전염된 것처럼 이그니스에게도 절절히 느껴졌다.
이그니스는 확신했다.
저 작은 아이가 바로, 프로크레아토르가 말한 ‘신을 믿지 않는 자’임을.
그리고 또 오랜 시간을 돌아, 이그니스—미하일은 마침내 데보라를 만났다.
분명히 그녀였다.
꿈속에서 가이오니아의 품에 안겨 있던, 보랏빛 머리칼의 그 작은 아이.
아직 어린 나이에도, 신을 향한 명 백한 증오의 감정을 내뱉는 그녀를.
***
상념에서 빠져나온 미하일은 눈을 감고 크게 숨을 삼켰다.
연인의 환생은 50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녀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끓어오르는 그였기에, 직접 앞에 마주한 이 순간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이그니스, 라면…… 마지막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고밖에는…….’
아이샤 에스클리프로 환생한 연인 은 암속성 능력자가 아니었지만, 분 명 전생을 기억하는 듯 보였다.
처음에야 당황했지만 특별할 일도 아니었다.
프로크레아토르는 창조의 이능을 가진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가 형제들을 위해 어떤 안배를 하고 떠났 다면, 연인이 저주받은 능력자가 되 지 않고도 전생을 기억하는 게 이상 한 것도 아니다.
그의 형제는 아버지 가이오니아만 큼이나 전능한 자였으므로.
미하일은 금세 차분히 감정을 가라 앉히고 말했다.
“죄송한 말이지만, 궁금해하는 걸 알려드릴 수는 없겠군요.”
“뭐?”
“어떻게 그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뭐, 내 형제의 깊은 뜻이 있어서라고 믿습니다. 어떤 것들이 떠오르던가요?”
“야, 이그니스.”
순간 미하일이 아이샤를 당겨 제 품에 끌어안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행 동에 아이샤가 얼음처럼 굳었다.
오랜만에 품에 넣은 온기는 언제나 태연했던 남자를 미치게 하기 충분했다. 미하일이 몸을 떨며 전율했다.
“하아……. 뭘, 뭘 떠올렸는지 더 말해주세요.”
“이것 좀…….”
“죽음을 앞두고도 서로에게 사랑한 다며 울부짖던 것? 우리가 함께 보냈 던 마지막 밤?”
“…….”
“걱정하지마십시오. 이제 곧 당신 은 자유로워질 수 있을 테니까요.”
“……무슨 뜻이야?”
미하일을 밀어내려던 아이샤가, 생 각지도 못했던 말에 놀라서 바짝 굳 었다.
그 작은 반응 하나에도 가슴이 벅찼다. 아이샤의 몸을 끌어안은 미하일의 팔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이번에는 가능할지도 모릅 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내가 당신을…….”
말을 잇던 미하일이 멈칫했다. 둘만 있던 공간에 어느새 낯선 기척이 들 어와 있었다.
미하일의 시선이 품에 안은 아이샤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하데스 루버몬트. 그였다.
당장이라도 제 뺨을 올려붙일 듯 흉흉한 기세로 멈춰 선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미하일이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구원할, 테니까요.”
하데스 보란 듯, 미하일이 안고 있 던 아이샤의 목덜미 위로 얼굴을 파 묻었다.
낯설었지만 그리운 향기였다. 지그 시 눈을 감고, 미하일은 연인의 체취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본 불청객의 눈에서 불이 튀는 것이 볼만했다. 미하일은 푸른 눈을 접어 그를 응시하며 비죽 웃었다.
험악하게 굳어진 하데스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 빌어먹을…….”
“…….”
“……정신 나간 새끼가, 진짜.”
악문 입술 새로 씹어 뱉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무시무시했다.
그제야 그의 기척을 느낀 아이샤가 화들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