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역시 그 아이가, 공의 자식이기라 도 한 게지?」
루버몬트 공작 내외, 라이가르트 대신관과 함께한 자리를 마치고 황제는 파멜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파멜라는 다소 안타까운 눈으로 묻는 황제에게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아닙니다.」
황제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사실 믿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바 보가 아닌 이상에야 둘의 얼굴을 조금만 관찰한다면 자연스럽게 깨달을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를 믿게 하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 어린아이와는 이미 부모 자식 간의 연이 끊어졌음을 단호히 표현하는 게 중요했다.
「휘, 휘스트리너 공작님! 보고 싶 었…….」
「저, 저를 기억하지 모, 못하시는 거예요?」
아이의 간절한 눈빛에 답지 않게 동 요해버린 감정을 가라앉히며 파멜라 휘스트리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도착한 처소 앞에서, 문고리 위에 가만히 손을 얹은 채 파멜라는 지난 날을 회고했다.
가일. 지금은 귀족으로 기억되지도 않는, 사라져버린 작은 남작 가문이 었다.
영지 하나 없는 이름뿐인 가문의 딸이었던 파멜라지만, 부친은 그녀의 영민함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알아보 았다.
파멜라 또한 자신이 그저 힘없는 하 급 귀족 가문의 영애로 살아갈 운명 이 아님을 잘 알았다. 그녀는 철저히 황제의 책사로 준비되었다. 배움을 거듭하고 귀족 사회에 섞이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리고, 비로소 황제의 신임을 얻고 휘스트리너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을 때 파멜라는 배 속 아이의 존재를 깨 달았다.
아이의 부친은 신전 출신의 신관이 었다. 신전에 소속되어 자신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던, 그래서 스스로 신관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벗고 정처 없이 떠돌 아다니며 아픈 이들을 돌보던 착한 사람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권력이라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해오 며 냉정해졌던 파멜라의 마음마저 녹 일 수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 네가 피눈물 흘리며 버 텨왔던 시간들을 잊어선 안 된다. 여 기까지 와서 전부 허사로만들 셈이 냐?」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자는, 내가 알아서 하마. 아이는 네 뜻에 맡기 겠다.」
언제나 파멜라의 중심이 되어주었 던 부친은, 냉정히도 그렇게 말했다.
‘알아서 한다’는 말뜻을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았다. 한 때 사랑했던 것도 같았던 남자는, 확 신할 수는 없으나 아비의 손으로 처 리되었다.
부친은 파멜라의 미래를 위해 기꺼 이 손에 피를 묻혔고 그녀 또한 그럴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자신과 꼭 닮은 얼굴을 마주한순간 파멜라의 냉정했던 결심은 무너 지고 말았다.
조금만, 조금만, 하며 가문에도 이 름을 올리지 못한 사생아를 5년이나 옆에 두고 말았다.
공식적으로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파멜라 휘스트리너 공작이 아비 없는 자식을 몰래 키운다는 사실을 모든 황실 인사들이 공공연히 알았다.
그렇지 않아도 능력 있는 파멜라를 흰 눈 뜨고 보는 시선들이 많았다. 파멜라가 여성임을, 볼품없는 가문 태 생임을 들먹이며 흠집 내길 좋아하는 자들.
어린 자식, 데보라를 키우면서는 결 코 황제의 책사로 입지를 굳힐 수 없 음을 파멜라는 비로소 깨달았다.
유약한 황제는 그런 시선에 신경 쓰 지 말라며 파멜라를 달랬지만 그녀는 다시 결심을 굳혔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아이는 사랑스러운 자식이 아니라 짐덩어리고 혹이었으며 언젠가는 자신의 약점이 될지도 몰랐다.
냉정히 자식을 내치고 비로소 황제의 유일한 책사로, 제도의 영향력 있는 귀족으로 입지를 굳힌 파멜라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는 수 군거림이 따라붙었다.
하나 잠시였다. 권력과 명예를 위해 서라면 자식까지 내버릴 수 있는 냉 정함을 결국 인정하고야 만 많은 황실 인사들은, 그녀 앞에 고개를 조아 렸다.
자식을 버린 것은, 여러모로 그녀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파멜라는 1년 만에 다시 만난 자식의 얼굴을 떠올리면서도 후회라곤 한 점 없는 자신을 상기하며 자조적으로웃었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거든.’
이제 쓸데없는 상념과 감정 소모는 접어둘 시간이었다. 문고리를 붙잡은 파멜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지루한 황제의 사담에 ‘그’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의 표정에도 피곤 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황제의 앞 에서는 한 터럭도 티 내지 않았다.
응접실을 나서서 제 방으로 향할 때에야 미하일은 지친 듯한 한숨을 몰 아쉬었다.
동시에, 마지막으로만났을 때보다 훨씬 생기 넘치던 연인의 얼굴을 떠 올리며 그는 비릿하게 미소 지었다.
애써 피하려는 자신의 얼굴을 집요 하게 바라보던 시선을 떠올리니 본능 적으로 몸이 더워졌다.
‘이래서는 정말…….’
큰일이었다.
첫 만남에서 그녀를 죽이는 데 실패했을 때 예상하긴 했지만, 이번 생에 서는 또 힘들게 돌아가야 할지 몰랐다.
운명처럼 다시 사랑에 빠지고 운명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결국 운명에 순응하는 삶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많이 겪어왔다.
‘힘든데.’
차라리 이 북받치는 감정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녀와의 만남을 피하려고 했지만, 지독한 운명의 굴레 때문인 지 또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마주하게 되었다.
미하일은 잠시 아이샤의 얼굴을 떠올리며 느릿한 움직임으로 아랫입술을 핥다가, 곧 고개 저었다.
여러모로 피곤했다. 겹겹이 차려입 은 옷마저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쉬운 대로 손을 감싸고 있던 하얀 장갑을 벗어낸 미하일이 목을 좌우로 풀며 고요한 본성 복도를 기웃거렸다.
“그나저나 우리 데보라 사제님은 어디로 가신 걸까요?”
분노와 절망, 벼랑 끝으로 내몰린 어린 짐승의 눈빛을 미하일은 똑똑히 기억했다.
바라던 대로 되었다. 데보라의 상태를 확인해야 할 때였다.
“어디로 갔는지 찾아서 뭐 하시게 요, 대신관님?”
그때, 바로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미하일이 우뚝 멈추어 섰다.
잡념에 빠져있었기 때문일까? 쥐 죽 은 둣 고요한 복도를 걸어오면서도 누가 따르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목소리만 듣고서도 낯선 기 척이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았다. 솔 직하], 모를 수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잠시 등을 내보인 채 피식 웃던 미하일이 빙글 몸을 돌려 섰다.
아이샤가 있었다. 그녀는 퍽 화가 난 표정이었다.
“에스클리프 영애? 여기까지는 웬 일이신지…….”
“데보라를 휘스트리너 공작과 일부 러 만나게 한 이유가 뭐죠?”
“네?”
미하일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 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물론 질문 자체야 이해했지만, 정말로 미하일은 의아했다.
우선, 어린 사제의 이름을 퍽 친근 하게 불렀다는 점.
자신이 흘리듯 부르긴 했으나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기억하고는 있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마치 원래부터 데보라를 알 고 있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미하일은 속으로 고개 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 다 얘기 드리지 않았던가요? 데보라 사제가 휘스트리너 공작님을 만나 뵙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해서 여쭸던 것뿐이고요.”
“이봐요.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시 원하게 얘기합시다. 데보라가 정말 그런 부탁을 했다고 하더라도, 당신 은 알았을 거 아니예요? 만나봤자 그 애가 상처만 받을 뿐이라는 거.”
“으음…….”
“휘스트리너 공이 데보라의 어머니 라는 걸 몰랐다고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죠?”
“아, 물론 아니지요. 데보라 사제가 직접 자기 입으로 말했으니 제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그 어린 아이를 냉정하게 버리고 떠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겠죠. 다시 만나게 해준 다고 한들, 휘스트리너 공이 데보라 에게 다정한 엄마가 되어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야기하는 내내 뚫어져라 꽂혀있 던 시선은 이것 때문이었나?
상처받은 어린아이의 모습을 두고 보기가 지극히도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너라는 사람은 이렇게 한결같지.
미하일이 슬쩍 웃고 말했다.
“글쎄요. 저는 휘스트리너 공작님 이 그리 냉정하게 데보라 사제를 내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
“…….”
“미처 거기까지 생각 못 한 것도 제 불찰이겠지요. 데보라 사제가 안쓰러 운 영애의 마음도 이해합니다. 걱정 마세요. 지금 데보라 사제를 찾아 제 경솔함을 사과하고 달랠 생각이니까요.”
“진짜 페르소나 끝판왕이네.”
그 순간이었다.
이해 못 할 말을 중얼거리던 아이샤 가 이를 악문 채로 미하일에게 달려 들었다. 작은 손이 놀랄 새도 없이 그의 멱살을 쥐었다.
“왜 일부러 데보라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려고 했는지 나는 무조건 들 어야겠어. 당신이 가장 아끼는 아이 아니었어?”
“영애?”
불이 불은 아이샤의 눈을 보며 당황스러웠다가도, 미하일은 딱 그녀답다 고 생각했다.
“당황스럽군요.”
말과는 달리, 멱살을 잡은 아이샤의 손을 떼어낼 듯 올라온 미하일의 손 은 느긋했다.
자연스럽게 맞닿은 손과 손 사이에 서 불이 튀는 듯했다. 빈틈없이 맞물 려 잡은 아이샤의 손바닥 안을 미하일이 엄지로 느릿하게 문질렀다.
여유로운 미하일의 표정과 달리 아이샤는 여전히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따금씩 분노가 치미는지 눈살을 잘게 떨며 미하일을 응시하던 아이샤 가 말했다.
“무슨 꿍꿍이인지, 이런 식으로 추 궁해서는 절대 바른대로 말 안 하겠 지.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로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 겠습니다만…….”
“그럼 나도, 당신이 궁금할 만한 얘 기를 하나 하죠.”
결심한 듯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하는 아이샤에, 미하일은 눈을 살짝 움직 여 끄덕이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었다.
변함없는 그의 표정에는 연륜이 가 득했다. 아마 평범한 세월을 살아온 인간이었더라면 절대로 미하일의 여 유로운 표정을 무너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샤는 가능했다. 그녀는 미하일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을 따라 하며 피식 옷어 보이고는 말했다.
“우리 데보라에게 왜 그랬는지, 당장말해줘야겠어.”
그리고는 덧불였다.
“이그니스.”
성공이었다.
무슨 말에도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미하일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