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나는 미래에서 분명히 데보라를 발 견했다. 그래서 머지않아 만날 거라 고 짐작하기는 했다.
한데 그게 오늘일 줄은…….
“와아…….”
절로 나오는 탄성에 입을 틀어막자 하데스가 가볍게 내 귓가에 입을 붙이고 물었다.
“아는 얼굴인가?”
“세상에. 알다, 알다마다요…….”
미하일의 최측근이었고, 상상도 못 한 미하일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함께 묶어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이 가 바로 여주 데보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벨 다음의 차애였던 데보라와의 만남에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자로 하여금, 세상에 이렇게 착한 사람도 있단 말이야? 하고 행동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 눈물짓고 웃음 짓게 만들었던 그 여주.
그러나 마냥 수줍은 천사처럼 굴었 냐 하면 아니, 아벨과의 로맨스가 나 올 때면 숙맥인 그를 적당히 리드할 줄도 알았던 매력 넘치는 그 여주.
그 여주, 데보라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무려 채 젖살이 빠지지 않은 귀여운 6살의 모습으로!
“혹…….”
미하일 이놈, 데보라를 보여준 건 감사하지만 깜빡이는 좀 켜고 들어왔 어야지. 하마터면 심장마비 걸려서 요절할 뻔했잖아.
“너무…….”
‘……귀여워! 여자애라 그런지 아벨 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심지어 아벨보다 네 살이나 더 어려!’
뒷말은 속으로 삼킨 채 반사적으로 심장을 부여잡은 내 모습에 하데스가 당황하며 어디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괜찮다며 손짓하곤 계속 귀여운 데보라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귀엽고 예쁜 건, 기회가 생겼을 때 마르고 닳도록 훔쳐봐주는 것이 인지 상정.
‘보라보라 데보라……. 정말로 머리카락이 예쁜 보랏빛이었구나. 아벨이 왜 너에게 처음 반했을 때 달빛 받은 머리카락 색이 아름다웠다고 말했는 지 알겠다. 활자로 읽었을 때는 공감 못 했는데 이제 뻇속 깊이 이해하겠 다! 예쁜 여주 최고야!’
나의 이 내적 오열을 이 자리에 있는 아무도 들을 수 없다는 게 다행히 었다.
기왕 영접한 김에 미천한 팬과 눈이 라도 한 번 맞춰줬으면 좋겠는데, 왜 인지 데보라의 빤한 시선은 어느 한 곳만 집요하게 좇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곳에는 파멜라가 있었다.
아, 맞다. 미하일이 뭐라고 했더라. 휘스트리너 공작과의 만남을 고대하 던 어린 사제가 있었다 했지.
음…….
데보라가 나처럼 덕질하던 인물이 있었다고?
나는 잠시 기억을 더듬어 파멜라가 한 줄이라도 둥장했던 사람인지 곱씹 었지만, 확실히 아니었다. 책 내용을 한 자 한 자 핥듯이 읽었던 내 기억에서 빠진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데보라를 마주한 파멜라의, 그야말로 사색이 된 얼굴에 나는 확실한 내 기억마저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파멜라는 데보라를 알고 있음이 분 명했다. 그건 애틋하고 집요한 눈으 로 파멜라를 바라보는 데보라도 마찬 가지.
잠시 저 둘의 관계를 고민하던 나는, 본능적으로 든 한 가지 추측에 놀 랐다.
‘파멜라 휘스트리너 공작. 책에야 한 줄도 안 나왔지만, 백속성 제국인이라고 했지.’
백속성 제국인은 드물다. 그 속성이 열성이기에 웬만해서는 대를 이어가 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이 자리에는 나를 빼고도 그 귀하다는 백속성 제국인이 두 명이나 있다.
파멜라와 데보라.
그리고 데보라는, 어린 나이에 매정 한 부모에게 버림받아 제도를 떠돌다 가 미하일에게 발견되어 신전의 사제 가 된 아이 였다.
이 정도로도 뭔가 알아챈 게 없다면언어영역 공부 다시 하고〈페르소나〉재독해야 한다.
‘데보라의…….’
결정적으로 별 신경 안 썼던 파멜라의 생김새를 뜯어보게 된 순간, 나는 확신했다.
‘……엄마라고?’
제국의 남성들처럼 깔끔하게 정리 해 뒤로 넘긴 파멜라의 머리카락은 꼭, 데보라에게 그대로 물려준 것처럼 매력적인 제비꽃 색이었다.
원작 여주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상 처였던 ‘어머니’가, 황제의 책사인 귀족이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데보라의 등장에 1 차로 놀랐던 나는, 원작에서 미처 읽지 못한 그들의 관계를 눈앞에서 확인하고 2차로 놀랐다.
“엄……. 아니, 아니.”
금세 그 큰 눈망울에 눈물을 매단 데보라가 엄마, 소리를 하려다가 재 빠르게 고개 저었다.
고작 여섯 살 난 아이가 넘쳐흐르는 감정을 자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데보라는 안길 것처럼 파멜라에게로 달 려들었다.
“휘, 휘스트리너 공작님! 보고 싶 었…….”
탁!
“아.”
무작정 안겨들려는 데보라의 어깨를 파멜라가 강하게 내쳤다. 힘없는 작은 아이의 몸은 너무나도 쉽게 나 가떨어졌다.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은 채 데보라는 멍한 눈동자로 파멜라를 바라보았다.
아이를 내버리고 황제의 책사가, 제 국의 권력자가 된 여자.
전부 알 수는 없었지만 파멜라 휘스트리너, 그녀에게도 분명히 그녀만의 사연은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결코 파멜라가 데보라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않을 것임을 예상했다. 그래서 그들의 재회를 계속 지켜보고 있기가 가슴 아팠다.
짐작대로, 파멜라는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신관. 황제 폐하를 알현하는 자리에 예의범절도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제를 데려온 이유가 무엇이지요?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높으신분이 누구입니까?”
“죄송합니다, 휘스트리너 공작님. 데보라 사제, 황제 폐하께 먼저 예를 갖추어야지요.”
미하일은 안타까운 눈으로 말했지만, 나는 그의 속내를 전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 미하일이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는 데보라의 엄마가 파멜라라는 사실도, 이런 식으로 둘을 마주치게 했을 때 파멜라 가 보일 반응도 전부 예상했을 터다.
그런데 왜? 그렇게 아끼던 데보라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미하일은 대체 왜 이런 자리를 만든 거지?
안쓰러운 듯 데보라를 바라보는 미하일의 표정 연기에 나는 화가 치밀 었다.
“고, 공작님. 저, 저를 기억하지 모, 못하시는 거예요?”
예를 갖추라 말했지만, 놀라고 슬픈 어린아이에게서 그런 냉정함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그들 사이에 서서 당황한 황제에게는 시선 한 끗 주지 않은 채 데보라는 계속 파멜라를 올려다보며 눈물흘렸다.
사색이 되어 당황했던 게 언제였냐는 듯, 파멜라는 단숨에 평정심을 찾 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도에 몇 번 나갔을 때 나를 본 적이 있는 모양이지요. 미안하지만 휘스트리너 가문을 추앙하는 제국인 들은 꽤 됩니다. 나는 그들을 일일이 머릿속에 기억할 여력이 없는 사람이 에요.”
“아, 저, 저는…….”
“대신관!”
데보라가 뭔가 더 말하려 하기 전에, 파멜라가 소리쳤다.
“폐하를 앞에 두고 어디까지 더 무 례를 저지를 생각입니까? 당장 이 사제를 내보내세요.”
“이보게, 공. 좋은 날에 왜 그 리…….”
“폐하, 루버몬트 공작도 함께하는 자리입니다. 더욱더 예를 갖추고 격 식을 차려야 함이 마땅하거늘 이 무 슨 필요치 않은 소란인지요.”
냉정하게 일갈하는 파멜라에 황제 가 슬쩍 미하일을 돌아보았다.
그는 눈꼬리가 쑥 내려간 안쓰러운얼굴로 넘어진 데보라를 천천히 일으 켰다.
빛을 잃은 데보라의 회색 눈동자는 여전히 파멜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데보라는 아마도 깨달은 듯했다. 파멜라가 단순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어머니로서 따 뜻하게 안아줄 생각이 없음을.
“제가 무지하여 소란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그저 어린 사제의 간절 한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에 폐 하께 크나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니오. 난 괜찮아. 그렇지만 일단은…… 휘스트리너 공도 당황한 듯하 니 만남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좋 겠소.”
“송구합니다, 폐하. 데보라 사제?”
미하일이 다정한 눈으로 일으킨 데보라를 달래려 했을 때였다.
작은 입술을 악문 어린아이는 그대 로 몸을 돌려 아직 열려있던 문 밖으 로 재빠르게 뛰쳐나갔다.
순간 당황한 내 손과 발이 데보라를 절로 뒤따르려다 멈추었다.
‘맙소사. 어떡하니, 저 애를.’
지금 저 어린 데보라가 느끼고 있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의 과거를 세세히 알 순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데보라는 지금 어머니에게 두 번이나 버림받았다.
고작, 여섯 살의 나이에.
“송구합니다. 이 무례를 어찌 용서 받을수 있을지…….”
침통한 표정으로 황제를 향해 고개 숙이는 미하일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절로 주먹이 쥐여졌다.
왜 저 어린아이를 여기 데려와 상처받게 만든 거지?
명백히 의도가 있는 행동이었고, 일 부러 만든 자리였다.
이제 미하일의 정체를 아는데도 불 구하고, 도무지 내 머리로는 이해되 지 않았다. 그에게 직접 물어보지 않 고서는 정말로, 영원히 모르겠다.
“괘념치 마시오. 대신관은 어린 사제가 마음 쓰여 그랬을 것인데, 어찌 잘못이 될까? 그리고 휘스트리너 공.”
가라앉은 분위기에 다소 언짢은 표 정이 된 황제가, 파멜라를 돌아보며 말했다.
“공의 걱정도 이해는 되나, 기쁜 자리에서 굳이 이리 예민하게 굴 필요 있었나?”
“송구합니다, 폐하.”
파멜라는 두말 않고 고개 숙였다. 하여 황제도 더 말하지 않고, 나와 하데스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당황했겠소.”
손사래 치며 괜찮다고 하는 나와 달 리 하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놀랐지만 괜찮습니다. 대신관이야 항상 생각지도 못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니…….”
“오, 그렇지 않소. 라이가르트 대신관이야말로 신실하고 아름다운, 신의 축복을 받은 제국인의 표본이지. 나는 방금 소란이 결코 대신관의 탓이 라 생각지 않으니, 대신관은 절대 괘 념치 마시오.”
눈치 주는 하데스에게 당황한 황제 가 얼른 미하일을 돌아보며 말했고, 미하일은 대역죄인 같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또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아랫사람들 전부 두고 제일 높으신자리에 앉아있는 황제가 분위기를 정 리하는 상황이라니…….
“자, 대신관도 앉지. 루버몬트의 큰경사를 앞두고 오래간만에 회포를 풀어야지 않겠나.”
황제의 주도에 미하일이 그의 옆에 마련해둔 자리에 앉았고, 나는 당연 한 말이 지만 곧바로 시작된 재미없는 이야기들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못했다.
처음 들어왔을 때 빼고는 일부러 나 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속 시 커먼 미하일을 죽어라 노려보면서, 울며 달려 나가던 불쌍한 데보라의 뒷모습만 자꾸 떠올렸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