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커진 눈과 입,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을 보니 말뿐인 인사치레쯤이야 백 번도 더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역시나 하데스의 말대로 사람은 착 한 듯했으나 지도자로서의 역량과 카리스마는 부족해 보였다.
이렇게 표정관리가 안 되는 사람이 라니…….
“이리 영민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 루버몬트의 안주인이 되었다니 과연 공작의 눈썰미가 탁월하오. 실수라 니, 전혀 마음 쓰지 말고 편히 대하시 오. 내 보기에는 아직 배움이 부족한 우리 2황자의 예법 교육이라도 맡기 고 싶은 심정인데 말이야. 그렇지 않 나, 휘스트리너 공?”
기꺼이 종이 어쩌고 하는 소개말을 읆어준 효과는 대단했다. 황제는 아 주 신이 나서 조잘거 렸다.
옆에 있던 휘스트리너 공작, 파멜라 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걸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
“허허……. 영애는 휘스트리너 공을 처음 보는 것이겠지? 루버몬트 공이야 자네를 잘 알겠지만.”
황제가 눈짓하자 파멜라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내게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용신 가이오니아의 종, 파멜라 휘스트리너입니다. 루버몬트 공작의 은 혜로 이번 공표식을 축하드릴 수 있 게 되어 더없이 영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전하께 말씀 많이 들 었습니다. 편히 머물다 가세요.”
고작 5분 전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다지만, 눈치껏 한 말에 황제는 역시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상성도 그렇고, 아마 휘스트리너 공은 영애와 잘 맞을 거요.”
“네?”
“이 사람도 가이오니아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선한 백속성의 제국인이 지.”
“아, 그렇군요.”
“대단한 인재요. 사실 대신관의 자리도 어렵지 않은 능력이지만, 고맙 게도 내 곁을 지켜주고 있지. 머무는 동안 따로 얘기 나눌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친해졌으면 좋겠군.”
“영광입니다, 폐하.”
인사하는 나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황제가 파멜라에게 자리를 권하며 앉 았다. 그제야 서 있던 나와 하데스도 착석했다.
황제는 곧바로 말했다.
“루버몬트 공. 아까도 말했지만, 공저 앞에서 가이오니야 상을 보고 짐 은 매우 감동이었소. 황실의 요구가 언짢은 점이 분명 있었을 터인데, 루버몬트 공이 신경 써준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렇습니까.”
하데스가 웃으며 대답했다.
음…….
사실, 비싼 돈 들여 토속성 조각가 들을 섭외해 공표식 시일에 맞춰 빠르게 만들어 낸 그 ‘가이오니야 조각 상’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분위기가 대단히 불편했다.
거 별일 아니라는 듯 턱을 빳삣이 치켜세운 하데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보란 듯 세워둔 조각상을 확인하고 기분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듯한 황제는, 사정도 모르고 좋다며 덧붙였다.
“가만 있자. 내 축사가 언제쯤이 오?”
“공표식 시작을 알리고 첫 번째 순 섭니다.”
“오, 잘되었소.”
황제는 만족스러운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앉은 파멜라에게 눈짓했다. 파멜라가 품 안에 챙겨온 두 장짜리 종이를 꺼내 황제에게 건넸다.
급히 받아든 황제가 하데스가 잘 볼수 있게 그것을 테이블에 펼쳐놓고는 말했다.
“이번에 개정된 법전의 발췌본과 내가 직접 작성한 축사요. 혼인법 개 정을 축사 때 공표할까 하는데…….”
와,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냐고? 정말로 모든 것이 하데스의 계획대로 되었으니까 말이다.
뒤통수 맞은 황제가 법 개정을 공표하지 않겠다고 생떼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조각상이 공개되기도 전에 성에 모인 수많은 귀족들에게 개정안이 공표될 것이고 그때는 이미 되돌릴수 없는 강을 건넌 후일 테지.
전지함을 갖고 있는 나마저도 소름 돋을 정도로, 하데스는 꼭 앞을 내다보며 행동하는 사람 같았다.
‘진짜 미래라도 보는 거 아냐?’
이 상황을 전부 계획하고 예상했으 면서도 전혀 생각 못 했다는 척, 약간 놀란 눈을 하던 하데스가 곧 살짝 고 개 숙여 인사하며 대답했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냐, 아니오. 이게 뭐 별 건가. 제 국을 지켜주는 루버몬트 공이 청한일인데 이깟 혼인법 개정이 뭐가 어 렵겠소. 되레 개정을 약속했다가 나 중에야 조건을 달게 되어 내 마음이 너무나도 불편했는데, 이 정도는 당 연히 해야지.”
지위로만 따지자면 당연히 아랫사람인데도, 황제는 고개 숙이는 하데스가 보기 불편한 모양이 었다.
내놓은 문서 두 장을 들고 느긋하게 훑어보는 하데스 앞에서, 당황해 손 사래까지 치며 웃는 황제의 모습. 정말로 위엄이라곤 한 톨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하데스 앞이 라 이런 모습일 수밖에 없는 거겠지 만…….
하데스의 조그마한 반응에도 눈과 귀를 세우고 있는 황제와, 무려 황제씩이나 되시는 분을 알현하면서도 친한 동네 어르신 대하듯 대수롭지 않게 구는 하데스.
공중제비 하면서 봐도 이 자리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아주 확실했다.
“신전도 이번 루버몬트의 결정이 대단히 반가울 거요. 대신관은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나?”
흐뭇한 표정으로 황제가 하는 말에 하데스가 아, 하더니 빙긋 웃으며 대 답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도착했다고 연락받았습니다. 가신에게 안내를 부탁했으니 대신관도 곧 폐하를 알현하 러 여기로 올 겁니다.”
“그렇군! 대신관의 얼굴도 오랜만에 보는데, 반가운 자리가 되겠소. 우리 제국의 주역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니 이리 기쁜 날이 있나.”
황제는 막말로 자기 위치만 아니라 면 시원하게 옷 벗고 춤이라도 출 사람 같았다.
기쁘기도 하겠지. 루버몬트가 신을 인정함은 곧, 진땀 탤 수밖에 없던 권 력의 먹이사슬에서 명백한 상하관계 가 확립되었다는 중거 니까.
그런데 그놈의 가이오니야 상은 천이나 벗겨보고 좋아하시지…….
아니, 어쩌면 확신하지 못했을지라 도 나와 인사를 나눈 순간 의심을 날 려버렸을 테다.
루버몬트의 일원인 내가 자연스럽 게 제국의 인사법으로 첫 소개를 했 으니.
그렇지만 그건 아이샤 에스클리프 로서의 인사였고, 에스클리프에서는 제국의 인사법에 익숙한걸.
속으로 합리화하는 나를 아는지 모 르는지 황제는 하데스와 시 답잖은 대 화를 나누면서도 이따금씩 나와 눈 맞추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죄책감이 야금야금 가슴 안쪽에서 부터 번져오고 있을 때였다.
“전하, 대신관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오! 드디어 왔군!”
황제가 좋아하며 고개를 뾰족 들었다. 마치 흥분한 미어캣 같았다.
집사의 목소리와 함께 응접실 문이 열렸고, 나는 이전의 방문 이후로는 처음 보는 미하일의 얼굴을 다시 마 주할수 있었다.
들어오자마자 미하일의 시선이 본 능적으로 나에게 향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는 곧 내게서 눈을 떼고, 예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한가득 머금은 채 깊게 허리 숙여 황제에게 인사했다.
“용신 가이오니아의 축복이 가득하 시기를. 대신관 미하일 라이가르트가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소, 대신관! 전에 황실에 정기 세례를 왔을 때 보고 처음 인가?”
“예, 그렇습니다. 루버몬트 공작 전하와 에스클리프 영애도 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위엄 없이 한달음에 달려와 뻗은 황제의 손을 반갑게 마주 잡으며, 미하일이 멀리서 멀뚱히 선 나와 하데스 에게도 인사했다.
“덕분에.”
거만하게 턱을 치켜든 하데스가 피 식 웃으며 대답했다.
누가 봐도 예의 따윈 없는 대꾸였지만, 황제는 그런 하데스의 반응이 익 숙한 듯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자기에게 서둘러 자리를 권하며 끌 어오는 황제의 손을 막고 미하일이 말했다.
“저, 폐하. 한 가지 청이 있는데 올 려도 될는지…….”
“오! 무엇이오? 대신관의 부탁인데 내 어찌 못 들어줄까?”
“다름이 아니라 신전의 어린 사제들 중 제가 특별히 아끼는 아이가 있 습니다. 하여 이번 공표식에도 데리고 왔는데, 아이가 바라는 자리가 지금이 아니면 만들어지지 않을 듯하 여…….”
“음? 바라는 자리?”
“예.”
모두가 의아해하는 가운데 미하일 이 또 방긋 웃으며 말했다.
“휘스트리너 공작님을 아주 오래전 부터 만나고 싶어 했던 사제입니다. 높으신분이라 제가 감히 따로 알현을 청하지는 못하고, 이번 공표식이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여 아이 와 약속을 했거든요.”
황제가 크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백속성의 힘을 가진 신전의 사제라면 우리 휘스트리너 공 이 궁금할 만도 하지. 별로 어려운 부탁도 아닌데 대신관은 왜 그리 긴장 한 표정이오? 그리고 따로만남을 청 했어도 휘스트리너 공이 어디 대신관을 내칠 사람이겠소? 안 그런가?”
파멜라를 돌아보며 황제가 묻자, 나 와 하데스처럼 어리둥절해하고 있던그녀가 뺏뺏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 그렇지요.”
“어디 있나? 당장 들여보내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미하일은 살짝 웃어 보이곤, 아직 문가를 지키고 있던 집사에게 눈짓했다.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복도에서, 백색 로브를 쓴 키가 작은 아이 하나 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로브 후드를 뒤집어쓴 채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그 작은 아이에게서 무언가를 느꼈다.
왜 생각도 하지 못했지?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이 ‘아끼는’, 지금은 확실히 ‘어린아이일’ 사제라면…….
‘설마…….”
놀란 내가 주춤함과 동시에 아이는 천천히 로브의 후드를 끌어당겼다.
곧 드러난 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옆에 선 하데스가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게 느 껴졌다.
다른 아이가 아닌지 헷갈려할 필요 도 없었다.
아직은 턱 언저리에서 살랑거리는 아이의 단발은, 퍽 신묘한 보랏빛이 었다. 후드를 걷고 드러낸 얼굴 위로 보이는 큼지막한 회색빛 눈동자도, 보통의 제국인들과는 달리 특이해 보였다.
무릇 주인공이라 함은 당연히 독특 하고 아름다운 설정이지 않겠는가?
한 떨기 제비꽃 같았던, 크레센타 제국 축복의 성녀.
〈페르소나〉의 여자주인공 데보라.
바로 그녀의 6살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