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로브를 살짝 들추며 수줍은 표정으 로 꾸벅 고개 숙이는 어린 사제를 향 해, 포트넨 백작이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요.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인사한 미하일이 어린 사제의 손을 잡고 따로 걸음을 옮겼다.
여러 귀족들과 황실 행렬의 방문으 로 떠들썩한 성의 내부를 조금 걷던 미하일은, 제 손을 꽉 쥔 아이의 손에 힘주며 넌지시 물었다.
“긴장되지는 않나요? 데보라 사제.”
“아, 아니요. 괜찮아요.”
아직 어린 아이가 뭉개진 발음으로 고개 저었다. 그 모습에 미하일이 빙 긋 웃었다.
“거짓말.”
“사실…… 쪼끔요.”
“그래요. 긴장될 거예요. 1년 만인가요? 어머니 얼굴을 다시 보는 게…….”
“이, 있죠오, 대신관님. 어머니가 정말…… 절 반겨주실까요?”
“어머니라면 당연히 그렇지 않을까 요? 데보라 사제가 어머니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휘스트리너 공, 아니, 사제의 어머니께서도 그 러실 거라 생각합니다.”
“움, 어머니는…… 제가 오늘 여기에 오는 걸 꿈에도 모르실 텐데도 요?”
어린 사제의 걱정에, 미하일은 작게웃으며 그녀의 앞에 무릎 꿇고 눈을 맞췄다.
로브를 걷어내고 어린 사제의 보라 색 단발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미하일이 말했다.
“원래 예상치도 못했던 만남이 더 감동적인 것 아닐까요? 으음……. 내가 데보라 사제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에요.”
“헤헤…….”
미하일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어린 사제, 데보라가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제도에 버려 졌던 어린 데보라는, 미하일의 눈에 들어 ‘라이가르트’라는 성을 얻고 신 전의 사제가 되었다.
의지할 데 없었던 어린아이가 미하일을 아버지처럼 따르게 된 것은 당 연했다.
다만 어려도 친모와의 기억이 남아 있는 데보라였기에, 자신을 매정히 내버리고 황실로 들어간 어머니라도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냥한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은, 그런 데보라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고, 데보라 사제를 버린 건 뭔가 이유가 있어서였을 거라고.
어머니에게 버림받고 신의 존재마 저 원망했던 데보라는 다시 희망을 품었다. 미하일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의 말대로 어머니가 자길 버린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다.
“데보라 사제는, 어머니와 오해를 풀면 다시 신을 향한 믿음을 가지기 로 나와 약속했었죠?”
짐짓 뚱한 표정을 지으며 미하일이 말하자, 데보라가 활짝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에!”
“사제를 처음 만났을 때 내가 얼마 나 걱정스러웠는지 몰라요. 겨우 이 나이에 신을 그렇게 저주하다니요.”
데보라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하일과 그녀가 처음 만난 것은 제도의 겨울이었다. 얼어 죽기 일보 직 전의 상황에서 데보라는 허공을 향해 마지막으로 신을 향한 저주를 퍼부었다.
「신이 있다면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잔인해요! 아마 당신은 신이 아니라 악마일 거예요! 악마.」
그날의 일을 상기하며 데보라는 몸을 떨었다.
이 제국에서 신을 모독하고도, 신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경배하는 대신관의 눈에 들어 신전에서 지내게 된 것은 확실한 행운이었다.
그런 걸 보면, 역시 신은 자길 버리지 않았나 싶지만…….
‘신님, 정말로 저를 지켜보고 계신 다면, 다시 어머니를 만나고 꼭 끌어안게 해주세요.’
데보라는 속으로 기도하며 다시 미하일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제가 아버지 신을 믿지 않고 또, 욕도 했지만, 그래도 저를 구해주셔 서 정말로 감사합니다아.”
미하일은 어린 데보라를 마주 안으 며 웃었다.
“신의 뜻이었는 걸요. 어머니와 다시 행복해진다면, 데보라 사제.”
“네에!”
“나와 한 약속 잊지 말아요. 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로 한 거.”
“네, 당연하죠. 헤헤…….”
“이거 하나만 기억해요. 모든 것은 아버지 신의 뜻이랍니다. 신이 데보라 사제를 사랑한다면 분명, 어머니는 데보라 사제를 따뜻하게 안아주실 거예요.”
“네에…….”
기대로 울먹이는 데보라의 작은 둥을 쓰다듬으며, 미하일이 계속 웃었다.
마냥 다정하던 표정과는 조금 어울 리지 않는 웃음이었지만 그의 품에 안긴 데보라는 보지 못했다.
‘그래요. 모든 것은 신의 뜻이랍니다.’
지그시 눈 감으며 미하일은 생각했다.
‘기대를 한순간에 절망으로 뒤바꾸 어 이 작은 인간을 늪과 같은 나락 속에 빠뜨리는 것도, 그로 인해 신을 저주하게 될 것도 전부…….”
빙긋 웃은 미하일이 데보라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신의 뜻이지요.’
기대로 가득 찬 데보라와 다시 눈 맞춘 미하일의 시선이 거대한 루버몬트의 본성으로 향했다.
“그럼 이제, 어머니를 만나러 가볼 까요?”
***
입성한 황실의 행렬을 맞고 난 다음이었다. 나에게는 제법 커다란 미션 이 주어졌다.
루버몬트 공작 하데스, 황제 발록 프랑세즈 크레센타, 그리고 대신관 미하일 라이가르트.
제국인들 사이 시쳇말로는 크레센타 제국에 뜬 세 개의 태양이라고도 불리는 권력자 세 명이 함께 모인 자리에 엉덩이 붙이고 앉아있기!
내가 뭐 할 건 없고, 루버몬트의 예비 안주인 얼굴을 보여야 하기에 조 신하게 입 다물고 하데스의 곁만 지 키면 되었다.
그러나 다른 자리도 아니고 제국 최 고 권력자들이 한곳에 모인 자리였다. 엄청난 미션이라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성 이후, 준비를 마치고 화려하게꾸며놓은 응접실로 찾아올 황제를 기 다리며 나는 자꾸 마르는 입술을 홅 느라 바빴다.
옆에 앉아있던 하데스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킬킬거렸다.
“표정만 보면 단두대에서 목 떨어 지길 기다리는 사람 같은데.”
“장난치지 마요. 지금 긴장되어서 죽을 것 같으니까.”
“아니, 대체 왜 긴장하고 그러는데? 내 앞에서 하던 대로만 해. 황제라고 다를 거 없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니, 들려오는 여러 말들을 종합해보면 황제보다 더 어려워해야 할 게 하데스였지 만…….
‘생각해보면 지금 이렇게 긴장하는 것치고 하데스한테는 진짜 대담하게 굴었네.’
먼발치에서라도 아벨을 보고자 하는 열망이 만들어낸 용기이긴 했지만, ‘그’ 하데스의 뒤를 졸졸 따라다 니며 안 걸릴 거라 생각하고 스토킹 했던 지난 시간이 떠오르자 새삼 나는 내가 놀라웠다.
그뿐인가? 오해로 시작된 관계이긴했으나 그와 혼인 문서에 도장까지 찍었고, 엊그제는 심지어…….
“홈홈.”
실로 뜨거웠던 그날 밤을 떠올리려 니 절로 민망해졌다. 그런 내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데스가 음흉하 게 웃었다.
“우리 부인은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이렇게 얼굴이 빨개졌지?”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아무 생각도 안하긴.”
“진짜 안 했어요.”
시치미 떼는 나를 보며 한참 킬킬거 리던 하데스가 느긋이 등을 기대어 앉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긴장하지마. 이번 대의 황제는 뭐랄까, 지도자가 되기에는 많 이 부족해 보이는 인간이야.”
“어디 전하의 눈에 찰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아니, 정말로. 착하고 유하기만 하 지 멍청하단 말이야. 신하들 말에 휘 둘리는 게 일상이고.”
과연 자기 기준 능력 있는 인간에 한해서는 노예도 대우해주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평가에 가차 없는 우리의 공작 전하다운 발언이 었다.
. ‘가이오니야 상’이 아니라 ‘루버몬트 공작 7세 상’을 만들어놓고도 무 사할 수 있겠냐는 내 질문에 하데스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 올리며 말했 었지.
「황제는 기본적으로 유약한 자야. 난 뭐 한 것도 없는데 내가 무서워서 벌벌 떤다고. 일단 조각상만 만들어 두면 나머지는 내가 의도했던 대로 될 거야.」
「뭘 의도하고 계시는데요?」
「그 콧대 높은 하데스 루버몬트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들어줬는데, 지 가 고마워하지 않고 배겨? 두고 보라 고. 그 상이 뭔지 까보지도 않은 채로 나에게 필요한 걸 갖다 바칠 인간이 니까.」
과연 하데스의 바람대로 황제는 조 각상을 보기도 전에 귀족들 앞에서 혼인법의 개정을 공표할 것인가?
뭐가 됐든 나는 상관없지만, 결과가 궁금하긴 했다.
나처럼 황제를 떠올리는지 잠시 생 각하는 표정을 짓던 하데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덧붙였다.
“옆에 꼭 책사인지 뭔지 하는 여자를 끼고 다니는데, 그 여자 없으면 혼 자 밥이라도 먹을 수 있는지 나는 정말 궁금해.”
“어머, 책사가 여자분이에요?”
“파멜라 휘스트리너 공작. 상당히 머리가 좋은 여자지. 행동력도 수준 급이고. 평민이나 다름없는 하급 귀 족이었는데 그 머리 하나로 황제 눈에 들어 공작위까지 하사받았으니, 확실히 멍청이 옆에 있긴 아까운 인 재야.”
“오오…….”
인재 발굴단 같은 게 있으면 분명 그 대표를 맡고 있지 않을까 싶은 하데스가 입맛 다시며 하는 소리에, 나는 기대되었다.
뭔가 우리 와룡선생 제갈량 같은 느 낌인가?
나는 처음에 만나 인사를 나눴던 황실 행렬에서 파멜라 휘스트리너 공작으로 보이는 인물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황후 빼고 여자 인사는 못 본 것 같 은데…….
“이번에는 같이 안 오셨나요?”
“아니, 황제 바로 옆에 있었지. 아마 헷갈릴 만도 했을 거야. 다음에 보 면 알려줄게.”
“으음, 네.”
“아무튼 긴장 풀라고. 이름만 황제 지 긴장할 거 하나 없는 인간이야.”
대단히 황실 능멸적인 발언에 흠칫 했지만, 하데스의 이런 성격에는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었고 장단 맞춰 줄 때도 되었다.
그래, 긴장 풀자. 내가 누구냐?
그 무서운 루버몬트 공작이 버티고있는데도 열심히 아벨 뒤꽁무니를 좇 다가, 결국은 그 아버님께 프러포즈까지 받아낸 여자다, 내가.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데 문득, 연신 킬킬거리는 하데스의 건방진 포즈가 눈에 들었다.
황제의 자리는 따로 준비해놓지도 않고 자기가 떡하니 응접실 테이블 상석을 차지한 건, 그래, 그렇다 치 자.
앉은 건지 누운 건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의자에 몸을 파묻고서는, 손 으로는 턱을 괴고…….
아니, 거기까지도 그럴 수 있다 치 자. 그의 버릇이라고도 생각될 정도로 익숙한 포즈니까.
한데…….
“황제를 황제 취급 안 해주시는 전하의 마음은 잘 알겠는데, 좀 바로 앉을수 없어요?”
심지어 한쪽 발을 다른 쪽 무릎 위에 척 올려둔 포즈까지는 아무리 그를 잘 아는 나라도 이해 못 하겠다.
테이블 위로 적나라하게 보이는 오 른쪽 군홧발을 황당하게 바라보며 내가 말하자, 하데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문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