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으옹…….”
겨우 잠든 아이샤의 얼굴 위로 햇살 이 따갑게 내렸다.
지쳐 기절하듯 잠든 그녀가 깰까 걱 정스러웠던 하데스가 조심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지난밤 아이샤가 극찬했던 조각상 같은 나신이 햇빛 들어오는 창을 둥지고 섰다.
그가 천천히 커튼을 내리자 넓은 방 이 다시금 그늘에 삼켜졌다.
‘기억도 안 나는군. 젠장…….’
찌푸린 미간을 문지르던 하데스가 약간 아쉬운 얼굴로 입술을 물며 침 대 위에 잠든 아이샤를 돌아보았다.
도대체가……. 뭐에 홀린 것도 아니 었건만, 제정신을 유지했던 기억이 없었다.
처음으로 아이샤와 나눴던 은밀한 대화는 그처럼 놀라웠다.
그녀가 방을 찾아왔을 때만 해도 겨우 날만 어두워진 초저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한 번도 숨 돌린 적이 없으니 대체 몇 시간을…….
“……미안.”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였고, 뒤늦게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매번 아이샤의 꼬챙이 같은 손목과 마른 몸을 걱정스러워해 놓고서, 지 난밤에는 어땠던가.
괜찮다는 아이샤의 말을 너무 곧이 곧대로 믿고 몰아붙인 기억에 하데스는 민망했다.
“내가심했어.”
작은 목소리가 거슬리기라도 한 건 지, 아이샤가 칭얼거리며 뒤척였다. 이불을 고쳐 덮어준 하데스가 다시 그녀의 옆에 누웠다.
혹여 깰까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간 밤의 자제력 없던 모습과는 사뭇 달 랐다.
길게 누운 채 팔로 얼굴을 괸 하데스가 새근거리며 잠든 아이샤의 얼굴을 응시하다 무심코 웃었다.
문득 목 위로 선언한 붉은 흔적들에 눈이 갔다.
‘아니, 진짜 적당히 해야지. 이게 다 뭐야.’
아이샤에게 덮어준 이불을 가슴 위까지 살짝 내려 본 하데스가 혀를 내 둘렀다. 쇄골께에도 제가 남긴 흔적 이 가득했다.
사실, 잘 나지도 않는 기억을 더듬 어보면 오히려 위쪽은 더 양호한 편 이랄까…….
“미안.”
하데스가 다시 한번 사과했다.
다음에는 정신을 딱 불잡고 자제하 면서 해야지.
속으로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다짐을 하던 하데스가 한숨지 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잠든 아이샤의 색 색거리는 숨소리에도 금세 반응하는 몸이다. 퍽이나 얌전하게 굴까?
“아이샤.”
그의 입술이 절로 기울었다.
분명 깨울 생각이 없는데도 자꾸 이 름을 부르고 싶고, 만지고 닿고 싶었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정돈해준 하데스가 한쪽 끝을 쥐고 와 입 맞췄다.
원하는 건 이보다 더 많지만, 지친 아이샤를 위해 이쯤에서 만족해야겠 다고 생각하면서.
“아이샤.”
대답을 바란 건 아니 었던지라, 잠든 귀에 거슬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하데스는 연신 아이샤의 이름을 만들어 불렀다.
이름 옆에는 붙이고 싶은 말이 있었다.
길었지만 그에게는 허무할 정도로 짧게 느껴진 지난 새벽 내내, 하고 싶 었던.
그러나 아이샤를 위해, 아벨을 위 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의식적으로 참고 삼켰던.
“조금만 기다려줘.”
그렇지만 지금은, 정말로 말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한없이 약해질 자신을, 하데스는 알았다.
평화로운 이 순간에 안주하다 보면 욕심 이 생기고야 말 거 라는 아이샤의 말을 그는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말하고 나면, 그대의 옆을 떠나는 게 미칠 정도로 괴롭겠지. 정말로 모른 척…… 그대와 행복하고 싶을 테 니까.’
모래성 같은 찰나의 행복임을 알면 서도.
그래서 하데스는, 자신의 의지를 담 금질하기 위해 입술 위로 절절히 맴 도는 말을 내내 힘겹게 삼켰다.
“아이샤. 내가 그대를, 꼭 자유롭게 할게. 그리고 나서…….”
너를 슬프고 약하게 만드는 모든 것 들을 없애고 난 뒤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해주 지.”
꽤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그 고백을.
***
이튿날.
공표식 날짜를 알린 순간부터 전국에서 모여들기 시작했던 귀족들은, 공표식을 하루 앞두고 루버몬트 성문 이 열리자 전부 입성하였다.
황실의 거대한 행렬 또한 루버몬트에 도착했다.
황제 내외와 황태자는 물론, 8대공작위를 잇게 될 후계자 아벨 루버몬트의 공표식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황실 인사들이 수십 명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황제가 직접 루버몬트에 선물하기 위해 준비한 제국의 명마들은, 평민들은 평생 가도 구경하지 못할 진귀하고 값비싼 재물들을 무겁게 싣고 있었다.
루버몬트는 마수들로부터 제국을 수호하는 가문이 었다.
그런 루버몬트를 견제하면서도 원 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황실이었으므로, 이처럼 화려한 축하는 당연 한 것이었다.
다만 황실에서 갖춘 예우에 걸맞게 루버몬트 공작도 이쪽의 요구사항을 들어줄지 걱정이었는데…….
“다행입니다, 폐하!”
“축하드립니다. 역시 루버몬트 공작도 생각이 있는 자였겠지요.”
곁에서 보필하고 있던 인사들이 한 마디씩 하는 말에, 황제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도착한 황실의 행렬에게 보란 듯, 공표식이 진행될 별채 파르넬리 공저의 입구에는 거대한 조각상이 서 있 었다.
공표식에 맞춰 공개할 생각인지 아 직은 큼지막한 천으로 덮여 있었지만, 용신 가이오니야 상으로 추정되는 조각상이었다.
책사 파멜라 휘스트리너가 가신 가스펠 백작을 찾아가 요구한 대로, 루버몬트는 외부에 신을 기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공이 아주 큰 일을 해주었소.”
황제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그는 인사들과 함께 곁을 지키고 있던 파멜라를 칭찬했다.
그러나 정작, 가신을 조종해 ‘그’ 루버몬트 공작에게 신을 기리게끔 만든 대단한 책사 파멜라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녀의 표정을 알아챈 황제가 갸웃 하며 물었다.
“이 좋은 날 표정이 왜 그렇소, 휘스트리너 공?”
“아니, 아닙니다.”
파멜라의 날카로운 눈이 가이오니야 조각상에 빤히 고정되어 있었다.
윤곽을 알아볼 수 없게끔 지지대를 세워 천으로 가려둔 거대한 조각상의 몸체에, 왜인지 자꾸 시선이 갔다.
‘이렇게 쉽게 황실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일 자였나, 루버몬트 공작이?’
의심이 사라지지 않아 불안해할 때였다.
황제가 말했다.
“식이 시작되기 전에 혼인법의 개 정 사안을 공표해야겠소. 루버몬트에 서 황실의 요구를 이행한 만큼, 황실 도 제국에 충성하는 대귀족 가문을 대우해줘야지.”
“폐하.”
파멜라가 다급히 말했다.
“개정안 공표는 식을 마친 뒤에 하는 것이 어떨는지요? 가이오니야 상 도 공개하고, 공작이 모두의 앞에서 기도문을 낭독하는 모습도 지켜보신 뒤에…….”
말하던 파멜라는 약간 언짢아진 황제의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황제를 비롯한 황실 인사들의 표정 이 전부 한결같았다. 도대체 어디까 지 루버몬트를 시험하려는 것인지, 하고 불편해하는 얼굴들이 었다.
“내 입으로 인정하기는 아쉽지만루버몬트의 위세가 황실을 뛰어넘은 것은 한참 전이오, 휘스트리너 공.”
“……그렇지요.”
“공표식 날짜를 당기라고 한 요구 도, 신을 기리는 과정을 행사에 넣어 달라고 한 요구도 사실 루버몬트 공작은 거절할 수 있었소. 공도 알고 있 지 않나?”
안타까운 둣 말하는 황제에 인사들 이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파멜라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대답을 고민하다가, 결국 고개를 끄 덕였다.
“예,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공의 말대로 고작 혼인법 개정 하나 가지고 루버몬트에 이만한 것들을 요구했음은 내 기준에서 대단한 도박이었소. 그러니 두말은 말았으면 좋 겠군. 황실의 위세를 지키고자 하는 공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니 내 말을 오해하지는 말고.”
“예, 폐하.”
“그러면 즐거운 날, 기꺼이 성의 주인을 만나 가장 먼저 축하를 해주어 야겠지. 들어가지, 모두들.”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옆에 서 있던 파멜라를 이끌 었다.
황실의 행렬이 별채인 파르넬리 공저를 지나 본성으로 향했다.
그들을 직접 맞으러 나온 루버몬트 공작 내외와 성의 고용인들이 환대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흐르고…….
신전의 행렬이 도착한 것은, 루버몬트 공작이 먼저 황실의 행렬을 맞고 성안에서 황제를 알현할 때였다.
황실 행렬과는 달리 간소했으나 신전 소속의 모든 신관과 사제들이 움 직였다는 것만으로도 루버몬트의 위 세는 간단히 설명되었다.
행렬의 선두에 있던 대신관, 미하일 라이가르트는 환대하는 루버몬트 성의 고용인들에게 일일이 눈 맞추며 감사 인사를 했다.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황제 폐하와 함께 대신관님의 방 문을 기다리고 있겠다 하셨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루버몬트의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마 다 고위급 인사들의 안내를 직접 맡는 포트넨 백작이 직접 나와 미하일을 안내했다.
신전을 향한 대우가 명백히 엿보이는 일이었다. 미하일은 예의 그 선한 웃음과 함께 꾸벅 고개 숙이며 말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다만 성의 정경이 아름다워 신전의 어린 사제에게 먼저 구경을 시켜주고 싶은데, 잠 깐 괜찮을까요?”
미하일의 말에 포트넨 백작의 시선 이 그의 옆으로 향했다.
과연, 미하일의 옆에는 하얀 로브를 뒤집어쓴 작은 키의 어린 사제 하나 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