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죽을 뻔한 소란을 겪고도 하데스는 자리를 보전하는 대신 전보다 더 그 악스럽게 움직였다.
오전에는 정신없이 공표식 준비에 매달렸고 그 외의 시간에는 연무장에 서 살았다.
평소에는 잘 쓰는 법 없는 검을 들 고 종일 휘두르는 모습이 의아해 아자르를 비롯한 정예군 부하들이 몇 번 이유를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 은 없었다.
공표식 사홀 전. 황실의 행렬이 도 착하기까지는 이틀이 남아 있었다. 그날까지도 하데스는 제 몸을 한계까 지 밀어붙이고 있었다.
벌써 그와 1대1 대련을 하고 진이 다 빠져 해롱거리는 병사들이 스무 명 남짓.
지쳤을 법한데도 하데스는 숨 한번 헐떡이지 않고 검 끝을 들어 아자르를 가리켰다.
괴물 같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아자르가 검을 뽑아들고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왔다.
“모레 황제 폐하 맞을 준비도 하셔 야 할 텐데, 오늘은 이쯤 하고 들어가 십쇼. 이 정도면 매일매일 수련한 몸이라도 근육통에 못 움직이실 텐데요.”
“내 말이 그 말! 전하, 아무리 전하 라도 쓰러지실 때 되지 않았습니 까?”
마지막 대련 상대였던 부대장 잭스 가 연무장 구석에 대자로 뻗어 숨을 헐떡이며 끼어들었다녹초가 된 정예군 병사들이 하나같 이 고개가 빠져라 위아래로 끄덕이며 동의했다.
“괜찮아. 아이샤가 저녁마다 기운 차리는 건 도와주니까. 쓸데없는 걱 정말이고, 와라.”
선공을 넘겨주며 하데스가 손을 까 딱했지만, 아자르는 그 자리에 붙박 인 채 눈만 깜빡거 렸다.
뭐야.
돌아보니 잭스도 냉큼 일어나 앉은 채로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왜인지뺨이 발그레했다.
잭스뿐인가?
대련에 지쳐있던 놈들이 하나같이 음흉한 표정으로 하데스를 응시하며 웃고 있었다.
진짜 뭐야?
“아.”
저녁마다 도와준다는 소리가…….
“미친놈들.”
……어떻게 하면 그렇고 그렇게 들 리지?
혈기왕성한 사내놈들의 눈이 흥미가득 반짝이는 꼴을 지켜보던 하데스 가 확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 질렀다.
“능력으로!”
“…….”
“도와준다고. 이 짐승 새끼들아. 근 육통 같은 거 없게끔.”
“아, 뭐야. 재미없게.”
잭스가 투덜거 렸다. 부하 놈들이 일 제히 김빠진 얼굴로 흐느적댔다.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혀 차던 하데스가 다시 아자르를 향해 검 끝을 겨눴다.
“빨리.”
“아니, 영애가 안 말리십니까? 다 죽을 때까지 몸 굴리고, 다시 회복시 켜서 또 연무장에 내다 굴린다고? 생 각보다 냉혹하신분이네.”
이해 안 된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 쓱하는 아자르를 보며 하데스는 아이샤를 떠올렸다.
물론 아이샤의 걱정은 하늘을 찔렀다. 소란이 있었던 날 과하게 소모했 던 마력은 전부 회복됐고 몸도 가벼 웠지만 제발 좀 더 쉬어달라며 극성이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바람대로 할 순 없 었다.
예정대로, 하데스는 공표식을 마치 고 나면 곧바로 가이오니아가 봉인된 세계로 갈 생각이었다.
그와의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일분일초가 아쉬웠다.
‘아이샤.’
지그시 눈을 감고 하데스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저, 살아야겠어요.」
전생을 떠올린 이후로, 항상 무기력 해 보이던 아이샤는 왜인지 깨어난자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전에 없이 그녀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삶에 대한 의지는 하데스의 의지까지 고양시켰다.
아이샤는 끝내 자신이 죽고야 마는 미래를 봤다고 했지만, 하데스는 실 패하고 싶지 않았다.
가이오니아를 없앤다.
아이샤를, 아벨을 위해서.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줄 것이다.
가이오니아를 없애고 살아 돌아올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설사 자신이 죽게 되더라도.
하데스는 기필코, 가이오니아를 저 숭 길동무로 삼을 생각이 었다.
“덤벼.”
감았던 눈을 뜬 하데스의 붉은 눈이 의지로 번뜩였다.
진지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이번에는 아자르도 두말없이 달 려들었다.
챙!
강한 힘을 실어 휘두른 아자르의 검 이 허공에서 하데스의 검과 맞붙었다.
찌르르, 팔을 타고 올라오는 떨림에 아자르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스물이 넘는 정예군을 상대하고도 이런 힘이 남아있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 고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은 데다 자세까지 곧았다.
하데스의 번뜩이는 눈을 맞댄 검 사 이로 마주하며, 아자르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챙!
하데스 쪽에서 힘을 실어 밀어낸 검이 다시 떨어졌다 맞붙었다.
“대체 필요도 없는 검술 연습에는 갑자기 왜 혈안이 되셨냐고요.”
이를 악문 채 하데스의 검을 막아내 며 아자르가 물었다. 하데스가 대꾸 없이 그의 검을 크게 튕겨냈다.
챙! 챙! 챙!
거침없이 퍼붓는 하데스의 공격을 아자르가 막아내는 합이 여러 번 이 어 졌다.
‘필요가 없다니. 지금 나만큼 절박 한 자가 있겠나.’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며 하데스는 프로크레아토르의 전언을 떠올렸다.
「신을 믿지 않는 자의 무기로 가이오니아의심장을 찌르라.」
화속성의 최대 개방 능력자.
전능한 불의 전사.
막대한 마력 수치를 보유하고 태어 난, 축복받은 제국인.
대공작가의 수장 하데스 루버몬트를 수식하는 그 수많은 영광들은, 가이오니아라는 창조신 앞에서 전부 부질없는 모래바람일 뿐일 테다.
철저한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라는 오랜 전술을 비웃듯, 가장 효과적인방어책은 단숨에 적들을 말살시키는 공격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자신의 능력은 무용지물일 것이다.
상대가 대항할 새도 없이 한 번에 적진을 불살라버리면 그만이라 전술 이 필요 없던 싸움과는, 다를 것이다.
가이오니아에게서 비롯된 힘. 그렇 기에 그 힘으로 그와 맞설 수는 없을 터였다.
굳이 프로크레아토르가 알려주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쓸 수 있는 거라곤 두 팔과 다리.
그리고 가이오니아의심장을 뚫을 수 있는, ‘신을 믿지 않는 자’인 자신의 손에 들린 이 검 한 자루뿐.
“막지만 말고, 죽일 각오로 공격해 봐라.”
“일부러 공격 안 하는 줄 아십니까? 지금 막는 것만도—”
챙!
가슴 앞을 덮친 일격을 아슬아슬하 게 막아낸 아자르의 이마에서 식은땀 한 줄기가 길게 흘렀다.
“저 칼잡이 아닌 거 아시죠? 살살 하십쇼.”
진심을 담은 한 합 한 합이 살벌했다.
전장에서 십수 년을 굴러왔던 아자르는 하데스의 눈에 깃든 진지한 살 의에 긴장했다.
대련에 목숨을 걸었다기보다는, 어 딘가를 향해 있는 알 수 없는 분노였다.
휘이이익—
묵직한 검날이 허공 위로 크게 포물 선을 그리며 휘돌았다.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듯하면서도 결코 틈은 없었다.
절도 있게 날아든 일격은, 하데스가 어느 정도 이성을 붙잡고 있지 않는 다면 분명히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 고야 말 터였다.
분노, 의지,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이따금씩 엿보이는.
초조함.
“흡!”
숨을 뱉은 아자르의 손에서 검이 툭 떨어졌다.
정확히, 심장을 겨눈 채 멈춘 검.
숨을 삼켜 가슴이 오르면 칼끝이 살을 파고들 듯했다. 그만큼 아슬아슬 하게 겨누어진 검에, 아자르는 가만히 눈만 돌려 하데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당장이라도 겨눈 검을 심장으로 밀어 넣을 듯 무 시무시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모든 대련의 끝은 이랬다.
정확히, 상대의심장을 꿰뚫을 것처럼…….
무엇이 항상 여유롭던 하데스를 이 렇게 만들었는지 아자르는 알 수 없 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신했다. 그 누구를 상대하려는 생각이든 주군인 하데스가 승리하리 라고.
그의 능력이 대단해서? 아니?
저, 눈빛.
죽음을 각오한 의지로 번뜩이는 눈 빛을 한 전사들을 아자르는 수백 명 보아왔다.
그리고 그들 중, 끝내 실패한 이들 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
똑똑.
여느 때처럼, 잠들기 전 나는 하데스의 방을 찾았다.
그는 공표식을 앞두고 혹독한 검술 훈련과 체력 단련으로 몸을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분명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가기 전 만반의 준비를 하는 모양인데, 죽다 살아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까지 제 몸을 굴리는지 나로선 도저히 이 해가 안 됐다.
아니, 살아있어야 가이오니아도 만 나러 갈 수 있을 게 아닌가.
그런데 오전에는 공표식 준비로 바 쁘고, 남은 시간은 전부 연무장에서보내다니.
지금 하데스는 당장 체력 고갈로 죽 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적당히 하라고 말려도 똥고집인지 라 결국 내가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해줄 건 지친 하데스의 피로를 회복 시 켜 주는 것뿐.
똑똑.
“전하, 왜 답이 없어요? 안에 있는 거 맞아요? 나 들어가요.”
대꾸가 없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 어가 보니, 하데스는 지쳤는지 잠들 어 있었다.
“어머나.”
얼마나 피곤했으면, 그는 침의로 갈 아입는 것도 잊고 바지만 대충 걸친 채로 엎드려 있었다.
“으음…….”
시원하게 벗은 등짝을 내보이고 잠 든 모습에 나갈까 몇 초간 고민하다 가, 고개를 젓고 이내 침대 가까이로 다가갔다.
민망해도 체력바가 0이 된 안쓰러 운 남편을 모른 척할 수는 없잖은가.
빛이라곤 협탁 위 촛대에서 일렁이는 작은 불과 창을 넘어와 쏟아지는 어슴푸레한 달빛뿐.
그 방에서 벗고 누운 하데스의 몸을 몰래 만지작거려야 하는 상황은 역시 조금 민망했지만…….
‘이건 건전한 의료행위다. 건전한 의료행위야…….’
나는 나를 세뇌하며 침대 한쪽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