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제누스—아이샤를 죽여 세 명의 영 혼을 구원하라 함은 무슨 말인가?
프로크레아토르가 말하는 세 명의 영혼이 누군지는 뻔했다.
아벨, 연인의 영혼을 죽여야 하는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그리고 미하일 라이가르트의 연인인 아벨라.
과연 아이샤가 생각해낸 방법으로그들의 오랜 형벌을 풀 수 있긴 했다.
다만 그 ‘구원’의 범위에 아이샤는 없을 뿐이었다.
가이오니아를 살해하지 않고도 그 가 내린 저주를 풀기 위해 필요한 제물.
‘그게 아이샤의 영혼이란 말인가?’
이번 생에서 실패한다고 해도 프로크레아토르는 계속 아이샤를 미하일의 ‘연인’의 몸에 환생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신을 믿지 않는 자’가 아이샤를 죽인다면 형벌의 굴레는 끝이 날 터.
‘돌아버렸군. 이딴 걸 방법이라고 씨불여놓다니.’
허탈한 웃음이 허공 위로 이지러졌다.
기본적으로 하데스는 아주 냉정한 성격이었다. 목숨의 가치가 전부 동 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백 명을 살리기 위해 한명을 죽여야 한다 면 기꺼이 그리할 터였다.
하나 냉정하기에 그 반대도 가능했다. 제 기준에 가치 있는 목숨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는 기꺼이 백 명의 머리를 태울 자신이 있었다.
원래도 아이샤의 부탁을 들어줄 생 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안 그래도 없 던 생각이 더 사라졌다.
「다음 생에, 전하의 옆에 있게, 해 주세요…….」
울며 빌던 아이샤의 얼굴이 떠오르 자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다음 생은 없었어, 아이샤.”
너는 대체 왜 그렇게 안쓰러울까?
아버지는 너를 버렸고, 형제는 너의 목숨을 제물로 삼았다.
네가 대체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정말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 태워 죽여 버리고 싶군.”
피곤한 표정으로 하데스가 얼굴을 쓸며 몸을 뉘었다.
문득 안쓰러운 그 얼굴이 보고 싶었다. 만나봤자 가이오니아가 어디에 있냐며 닦달부터 할 테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급하게 일어난 하데스가 아이샤에게 가려고 방문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아.”
“어…….”
하데스는 놀랐다. 마법처럼 눈앞에 아이샤가 있음에.
“전하, 어디…….”
말이 끝까지 이어질 새도 없이 하데스가 아이샤를 와락 끌어안았다.
“전하?”
하데스는 마치 상처입고 죽어가는 짐승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지친 듯물 먹은 솜과 같은 몸을 아이샤가 가 만히 마주 끌어안았다.
“…….”
“…….”
하데스도, 아이샤도 아무런 말이 없 었다.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아는 사람들처럼 퍽 오랜 시간 그들은 서로의 온 기에 위로받았다.
“아이샤.”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 하데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미래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 지?”
“……네.”
“미래를 바꿨던 적 없나?”
“……아뇨.”
가만히 하데스의 등을 쓰다듬던 아이샤가 대답했다. 안겨있던 그녀가 하데스의 가슴을 살짝 밀어내고 눈 맞췄다.
빙긋 웃는 얼굴이 지독하게도 애잔 해 보였다.
“있어요. 바꾼 적.”
그러나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는 걸, 아이샤도 하데스도 알고 있었다.
하데스가 비슷한 표정으로 마주 웃 고는 말했다.
“그래. 그거면 됐어.”
“네…….”
“부탁이 있어.”
“뭐예요?”
아이샤의 팔을 당겨 방 안으로 이끈 하데스가 문을 닫고 말했다.
“자기 자신에게도 능력을 쓸 수 있는 것, 맞지?”
“네?”
“그대가 전에 그랬잖아. 마지막 세뇌는 그대 자신에게 걸 거라고.”
“아……. 그건, 왜요?”
빙긋 웃은 하데스가 바로 대답했다.
“지금 내 앞에서, 그대 자신에게 세뇌를 한 번 걸어줘야겠어. 아니, 그보 다는 조금 더 센 걸로. 정신 지배.”
“무슨…….”
“나는 하데스 루버몬트에게 영원히 정신계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이야.”
“네?”
놀란 아이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 거 안 해도, 이제 전하 괴롭 힐 생각 없어요. 저 못 믿어요?”
“믿지. 그런데 확신하게 해줄 수는 있잖아? 어려운 거 아니지?”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말하는 하데스를 멍하니 바라보던 아이샤 가 푹 한숨지었다.
“좋아요.”
아이샤가 하데스의 오른손을 살짝 붙잡았다. 작은 두 손으로는 전부 쥐 어지지도 않는 그의 손을 만지작거리 며 아이샤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는 하데스 루버몬트에게 영원히정신계 능력을 사용하지 않겠다. 그리고…….”
감았던 눈꺼풀이 들렸다. 푸른 눈이 젖어있었다.
하데스와 눈 맞춘 아이샤가 작게 웃 으며 덧붙였다.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꼭 기 억할 거예요. 전하가 어떤 모습이든 간에.”
덧붙인 명령에 잠깐 놀란 눈이 되었 던 하데스가 피식 웃었다.
“좋네.”
“그때 가서 모른 척하시면 안 도개요.
꼭 하녀라도 시켜주시는 거예요.”
장난스럽게 웃는 아이샤를 하데스 가 다시 한번 안았다.
“아니.”
“…….”
“약속했잖아. 우리는…….”
“…….”
“……가족이 될 거야.”
언제나 그랬듯 하데스의 말은 꼭, 희망이라곤 없어 보이는 황무지에 핀 꽃 같았다.
아이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
깊은 새벽.
하데스는 잠들지 못한 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공표식을 무사히 마치고, 아벨이 비로소 후계위를 계승하게 되면…….’
아직 공표식을 치르지 않은 아벨이 었다. 공표식을 마치고 무사히 아벨 이 루버몬트 후계위에 이름을 올려야 만…….
‘……바로 떠나야겠지.’
비로소, 마지막 책장을 넘긴 다음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갈 수 있을 터였다.
한시도 지체할 생각이 없었기에, 하데스는 의도치 않게 공표식이 앞당겨 져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공식적인 후계자가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다면?
아벨을 아니꼽게 보는 가신과 혈족 들이 어떻게 해서든 그를 루버몬트에 서 쫓아낼지도 모른다. 그건, 아이샤 도 마찬가지였다.
하데스는 가이오니아를 만나러 가 기 전, 아벨과 아이샤에게 어떻게든 안정된 울타리를 만들어두고 싶었다.
“하아…….”
피곤한 고개를 젖힌 채 하데스가 한 숨지었다.
그때였다.
똑똑.
“아버지, 저예요.”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찾아온 건 아벨이었다. 이 시간에 아벨이 제 집무실을 찾아온 건 처음이 었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 아벨은 조심스럽 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눈에 띄게 어 두운 그의 낯빛을 알아본 하데스가 미간을 좁혔다.
“무슨 일이냐?”
아벨은 대답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서 침묵했다.
“아벨.”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 어난 하데스가 아벨의 앞으로 다가왔다. 눈높이를 맞춰 앉는 하데스에 아벨이 울컥하며 입술을 물었다.
“아버지…….”
“그래.”
“저도 데려가 주세요.”
뜬금없는 말에 하데스가 인상을 찌 푸리며 되물었다.
“뭐?”
“가실 거죠. 아마도, 공표식이 끝나 고 나면……”
금방이라도 울 듯한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아벨이 꺼내놓은 말에, 하데스 가 멈칫했다.
“안가시면, 안 되는 거겠죠?”
“……금방 돌아오마.”
“그럼, 어디로 가시는지라도 알려 주시면, 안 돼요?”
결국 아벨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힘없이 웃은 하데스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하지마라. 언제 아버지가 다 쳐서 들어오는 거 봤냐니까?”
“이번에는 엄청 위험한 거잖아요. 저도 바보가 아니라서, 다 안다고요. 어머니 표정도 읽을 수 있어요. 아무 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가끔 멍해 보 이시잖아요. 아버지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
“난 정말 괜찮아.”
“괜찮다고만 하지마시고! 무슨 일 인지 제게도, 제발 좀 알려주세 요……. 제가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 아요.”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하데스와 아이샤의 사이에서 아벨 또한 태연하게 굴고 있었지만, 초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잘은 모르지만 하데스가 아이샤를 위해 목숨이 위태로운 사지로 가려 계획하고 있는 것도, 그 시기가 공표식을 마치고 난 후라는 것도 어렴풋 이 예상하고 있었다.
하데스도, 아이샤도 자신에게 그 어 떤 말도 해주지 않았으므로 아벨은 답답했다.
그들에게 생긴 어떤 문제도, 하데스 가 뭘 하려는 건지도 알고 싶었지 만…….
“저도데리고가주세요.”
“뭐?”
“말하기 싫으시면, 그냥 저도 데리고 가주세요. 아버지께 폐가 될 일은 없을 거예요. 저 이래 봬도 열심히 수련했으니까요.”
퍽 간절한 아벨의 눈빛을 빤히 응시하던 하데스가 픽 웃었다.
“누가 네가 폐가 된다고 했어. 너만 큼 강한 녀석이 없을 텐데.”
“그러니까!”
“그렇지만 네가 없으면, 이곳과 네 어머니는 누가 지키겠냐.”
“…….”
“아빠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은 피 곤했을 테니 얼른 자거라. 잘 때까지 옆에 있어주랴?”
탁!
아벨을 안아들려고 뻗은 손이 제법 매섭게 내쳐졌다. 하데스가 놀랐다.
“아버지는, 저를…….”
“…….”
“왜 데려오신 거예요?”
“뭐?”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 잘 알아요. 처음에 저를 여기로 데려오신 건, 제가 루버몬트에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항상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식이라 죄송했지만, 이제는 달라요.”
“아벨.”
일순 아벨이 눈에 힘을 주었다. 강 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져 하데스는 놀랐다.
마력을 운용하는 데 익숙해진 그였다. 마력의 흐름을 느끼는 데 무뎌진 것은 오래였다. 웬만한 수준의 마력 치가 아니라면 시전하는 것조차 느끼 기 어려울 정도다.
한데…….
몸의 온도가 싸하게 내려앉는 착각 이 들었다. 하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착각은 아니었다.
집무실의 벽이 온통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얼음산에 갇힌 것처럼 공간이 빙결되었다.
당황한 하데스가 아벨을 내려다보 며 놀랐다.
“너…….”
“제게도 말해주세요. 어머니를 괴 롭게 하는 게 뭔지, 아버지의 목숨을 위협하는 게 뭔지, 저도 알고 싶단 말 이에요!”
“그만. 힘을 거둬라, 아벨. 이렇게 마력을 남발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 어.”
“싫어요! 말해주시기 전까지는 그 만두지 않을 거예요!”
우르릉.
꽝!
방금까지도 고요했던 하늘에 빛이 번쩍이고 천둥이 울었다. 둔탁한 빗 줄기가 유리창을 깨뜨릴 듯 쏟아 부 어졌다.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응시하던 하데스가 아벨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하라고.”
“싫어요!”
“아벨!”
“다정하지마세요! 처음 저를 왜 데 려오셨는지, 기억하시잖아요! 제가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였잖 아요!”
“…….”
“제가 쓸모가 있어졌다면 써주세 요! 제가 죽거나 다치는 것 따위 걱 정하지 말고, 제발 그렇게 해주세요! 저도, 저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서 뭔가 하고 싶단 말이에요! 제 발…….”
붙잡은 손 위에 작은 불씨가 붙었다. 놀란 하데스가 아벨의 몸을 흔들 며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크고 작은 불씨들은 허공 위에서 피 어나 유성처럼 곳곳으로 낙하했다. 얼어붙어있던 곳이 녹고 얼음을 삼킨 불씨들이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아, 으…….”
인상을 찌푸린 아벨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붙잡으며 뒷걸음질 쳤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의 변화를 알아챈 하데스가 놀라 손을 뻗었다.
“아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