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입술로?!”
“입술인 줄 알았어? 손가락으로 딱 밤 때린 건데.”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럽게 웃던 하데스가 다시 내 손을 휙 붙잡고 걷 기 시작했다.
“그대가 전생에서 수많은 벌을 받 으면서 무슨 생각을 해왔는지는 잘알겠어. 그렇지만 이번에 그대는 나 나 아벨이나 루버몬트의 사람들, 아니, 이 나라를 통틀어 모든 제국인들 에게 대우받아야 할 존재야.”
“…….”
“그대가 암속성 능력자이고, 그 능력이 꺼림칙하다고 해서 그대를 벌레 취급할 간 큰 인간은 적어도 이제국 에는 없을 거야. 있어도 없게 될 거니 까 걱정하지마.”
“뒤에 붙은 그 무시무시한 말은 뭐 예요?”
“굳이 해석해줘야 해? 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린다는 말이지.”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척 혀를 내두르긴 했지만 내심으로는 부끄러워지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동시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먹먹한 감정 때문에 목이 메었다.
내 전생의 기억들을 돌려받고, 아무 에게도 말한 적 없던 비밀을 꺼내놓 고, 그 긴 고난의 시간들을 위로받았 던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서…….
괜히 또 눈물 나려는 걸 참으면서나는 말했다.
“그런 말 좀 하지마세요. 전하가 말하면 진심인 것 같아서 무섭단 말 이에요.”
“뭐라는 건지……. 난 항상 모든 말에 진심이야. 그냥 하는 말이라곤 하 나도 없다고.”
“알았어요, 알았어.”
“그러니까 이제는 나를 믿을 때도 된 것 같아.”
“네?”
“그만 두려워하고, 나를 한번 믿어 보라고. 약속하지. 내가 그대의 저주를 풀고, 그대를 자유롭게 만들어줄 테니까.”
그 말과 동시에, 하데스는 언제 도 착했는지 모를 공저의 문을 열어젖혔다.
처음에는 본성 앞뜰에 옮겨놓았던 순백의 석고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 힌 채 공저 안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듣기로는 평범한 조각가들이 아니라 마력을 사용하는 토속성의 조각가 들이 조각상을 작업한다고 했는데, 그래서인지 작업 속도는 마법처럼 빨 랐다.
아니, 마법 맞지.
나는 하데스의 등 뒤로 보이는 가이오니야 상을 보고 놀랐다.
아니, 가이오니야 상이 아니다.
위엄 있는 두 날개를 펄럭이는 드래곤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일반적인 가이오니야 상과는 전혀 달랐다.
아직 완성까지는 조금 남아 보였지만, 분명히 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한 조각상은, 분명히…….
놀란 나를 보며, 조각상을 등진 채로 하데스가 말했다.
“그러니까 내게 아주 조금만 시간을 줘, 아이샤.”
***
하데스는 처음부터 순순히 가이오니아를 찬양할 생각 따위 없었다. 어 쩌면 여태껏 하데스를 뻔히 봐 왔으 면서도 못 알아챈 내가 바보였는지도 모른다.
그래, 어림도 없지!
「가, 가이오니야 상 아니었어요? 어, 그래. 고대에 가이오니아는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머물렀다고하죠.」
「아, 그래? 몰랐네.」
「뭐, 뭘 몰라요. 저거 가이오니야 상 맞죠? 허허……. 인간의 모습이었 던 가이오니아가 묘사된 고서가 있었 나. 만들면 루버몬트가 처음이 되겠 네요.」
「현실 도피 잘하네.」
「저거 뭐예요!」
「나야. 아직 형체만 대충 잡혔지만 잘생긴 게 느껴지지 않나?」
하데스는 뻔뻔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진지한 얼굴로 내게덧붙였다.
「나는 거짓으로라도 가이오니아를 찬양할 수 없어. 그대를 지키려면 필 연적으로, 나는 그자와 대적해야 하 기 때문이야.」
그렇게 멍한 상태로 돌아오고 나서 나는 한참 생각에 잠겨있었다.
하데스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정말로 말뿐이 아니라 그가 뭔가를 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물어봐 야 대답해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나는, 또 기대하는 중이었다.
‘정말로, 하데스라면, 나를 죽이지 않고도 나를 구원할 방법을 찾아내주 지 않을까?’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운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벌써 수백 번의 실패를 경험했음에도, 사람 마음이라는 건 이토록 부질없이 흔들리고야 마는 것이다.
살고 싶어.
죽지 않고, 아벨과 하데스의 곁에서 행복하고 싶어.
그 가당치도 않은 욕심이 천천히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일단은…….”
밤이 깊었다.
“……자자.”
분명 죽으려고 결심했고 피하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하데스는 여태껏 나를 살게 했다. 그라는 사람이 어디까 지 나를 구원해줄 수 있는지 궁금했다.
내일이면 죽어야지— 하고 다짐하면 서 잠들었던 며칠간의 나와 달리, 그 날은 모른 척, 그냥, 밤이 깊었으니 자기로 하고 눈을 감았다.
***
눈올 떴을 때, 이상하게도 몽롱해야 할 정신이 또렷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도 익숙한 방 천장이 아니었기에, 나는 이게 꿈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정신이 또렷한 꿈을 꾸는 건 익숙했다.
‘또 전생인가?’
전생의 기억은 천천히 하나씩 돌려받는 중이고, 이처럼 꿈을 꾸듯 밀려 들어올 때가 많았으니까.
“아.”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천천히 눈에 들어온 풍경을 파악하 다가 나는 놀랐다.
분명히 기억에 있는 얼굴.
그 얼굴이, 보였으니까.
나는 어째선지 주저앉아 있었고, 익 숙한 얼굴은 내 앞에 선 채였다.
아름다운 남자였다.
바닥에 끌리는 황금처럼 빛나는 긴머리카락.
창백한 피부 위로 돋아난 몇 개의 비늘.
그리고, 세로로 찢어진 선명한 금안 은 번뜩이며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아, 버지.”
용신, 가이오니야.
언젠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들의 곁에 머물렀던 그가, 지금 내 앞에 있 었다.
왜인지 그는 만신창이였다. 그를 꼭 닮은 금색 비단옷이 이리저리 찢겨 있었다.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고 그곳에서는 연신 피가 흘렀다.
어깨에는 화살이 여러 대 박혀 있었 고 천천히 걸어오는 다리는 걸고 있 었다. 자세히 보니 발목이 반쯤 잘려 있었다.
대체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 까?
나는 가이오니아에게 고정되어 있 던 시선을 돌려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낯선 곳이었다. 메마른 땅은 황량했다. 해가 떠 있지 않았는데도 밝았고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나와 가이오니아만 있는 건 아니었다.
‘미하일?’
그는 무심한 눈으로 가이오니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만신창이가 된 가이오니아와는 달리 깨끗한 사제복 차림이었다.
미하일 뒤에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그새 얼굴에 흉터가 늘어있는 붉은 머리의 사내는 아자르였다.
아자르 또한 가이오니아만큼이나상태가 안좋아 보였다. 자세히 보니 꼭 온몸이 칼날 같은 바람에 찢긴 것처럼 상처가 가득했다.
억지로 정신을 붙들고 있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절뚝거리면서, 아자르 또한 가이오니아를 보고 있었다.
아자르까지 발견했을 때 나는 깨달 았다.
지금 꾸고 있는 꿈은, 내가 돌려받 은 전생의 기억이 아니다.
‘전지함’의 능력으로 엿보고 있는, 미래였다.
‘대체 왜 이런 미래가…….’
나는 본능적으로 아벨을 찾았다. 반 대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익숙한 그의 얼굴을 찾아내고 안도했다.
‘살아있어.’
살아있었지만, 아자르나 가이오니아처럼 다친 모습은 아니었지만, 어 째선지 그의 표정만큼은 이미 죽은 사람 같았다.
빛을 잃은 눈이 멍하니 가이오니아를 응시하고 있었고, 뺨에는 눈물자 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벨, 왜…….”
그에게로 손을 뻗던 나는, 다시 그의 너머에 있는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다.
두려운 표정으로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달달 떨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그녀는 보랏빛 단발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게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데보라?’
아름답다고 자주 묘사되었던 그녀의 옅은 제비꽃 색 머리카락.
아직 어린아이인 아벨과 내가 만나 보지 않은 데보라, 그리고 미하일과 아자르가 어째서, 어디인지도 모를 이곳에 상처투성이인 가이오니아와 함께 있는 건지…….
정말이지 아주 조금도 유추해낼 수없는 미래였다.
‘하데스는?’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떠 올랐을 때에야 나는 내 허벅지께에 놓인 묵직함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심장이 두려움에 조여 들었다. 고개가 뻣뻣하게 아래로 내 려가기 시작했다.
“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굳이 하나하나 뜯어보고 싶지도 않 은, 그런 모습.
성한 데라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두 개의 눈동자와, 내 뺨에 흐른 눈물을 겨우 닦아줄 수 있는 오른손뿐.
“전, 전…….”
“미안.”
내가 그를 미처 다 부르기도 전에, 하데스는 힘겹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 며 사과했다.
왜?
당신이, 뭐가?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저, 전하……. 이게, 이게 대체, 대체…….”
“그대, 를, 내가…….”
말을 끝까지 잇지도 못하고 하데스는 울컥 피를 토했다. 붉은 눈이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마, 말하지마세요. 그, 그만. 그만…….”
이게 꿈이라는 사실을, 아직은 오지 않은 미래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다 급히 하데스를 끌어안고 부탁했다.
“약속, 했는데. 내가…… 그대를, 자, 헉, 자유롭게, 해, 해주겠다고, 그 랬…….”
“아아아아! 제발! 제발요!”
점점 그의 숨이 끊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나는 정신없이 소리치며 눈물 흘렸다.
“어떡, 하지……. 그대, 그대는 또, 계속, 큭…….”
“제발, 아……. 말하지 말아요. 죽 지, 죽지 말아요. 죽으면 안 돼요. 제발…….”
내 빰을 훔치던 하데스의 손을 맞잡 은 순간, 그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그건 마지막 순간에 보인 짧은 작별 인사, 같은 거였다.
가까이서 우리의 눈이 마주쳤고 붉 은 눈은 일순 작게 반짝였다가 생기를 잃었다. 아주,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작은 속삭임이 있었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