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말을 마치고 아이샤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 저…….”
한참 입을 떼지 못하고 망설이던 아자르가 결국 말로는 못 하고 멀어지는 아이샤의 드레스 소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아이샤가 돌아봤다.
“기회가 되면 말하려고 했는데, 그 날 제가 했던 얘기 말입니다.”
“네.”
“신경 쓰지 마십쇼.”
“네?”
“생각해보니 너무 주제넘었습죠. 제가 뭐라고 여기 있으라 마라…….”
“아니예요. 경의 말이 다 맞는 걸요. 전하와 공자님이 걱정되는 마음도 이 해하고요.”
“아뇨. 영애가 주군과 공자님 곁에 있기로 결정한 게 아니고 주군과 공자님이 영애를 곁에 두고 싶어 안달난 게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거기에 대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부터가 어 불성설이었습죠. 신경 쓰지 마십시 오.”
“하하……. 경이 무슨 말 하는지는 알겠어요. 그렇지만 경의 생각과는 별개로 그냥, 제가 떠나는 게 맞는 거 라고 판단했을 뿐이에요. 경이 한 말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마세요. 그럼.”
아이샤는 살짝 고개를 기울여 인사 해 보인 뒤 다시 가려 했다.
“아니!”
아자르가 한 번 더 아이샤를 붙잡았다. 의아한 둣 돌아보는 아이샤에 아자르가 한참 당황해하며 말을 골랐다.
“그, 아…….”
“…….”
“예, 뭐. 그 문제는, 영애의 자유이 니 주군과 잘, 얘기해 보시고 요…….”
어차피 하데스의 반응을 보면 어떻 게든 아이샤를 붙잡을 게 분명하니, 아자르는 일단 그런 걱정은 접어두기 로 했다.
눈을 깜빡이는 아이샤를 바라보며 헛기침하던 아자르가 덧붙여 말했다.
“미안합니다. 그때 무례하게 굴었 던 거,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아, 괜찮아요. 무례하다고 생각하 지 않았어요. 놀라고 화났을 텐데 그 럴 수 있죠.”
“놀라고 화난 건 영애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한 번도 저한테 막 대하신 적 없잖습니까? 제가 원래 배운 것도 없고 주군한테도 막말하는 편이라 너무 생각 없이 굴었습니다. 용서하십 쇼.”
“음…….”
난처해하며 제 뺨을 어루만지던 아이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그렇게까지 말하신다면 자꾸 아니라고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 죠. 사과는 감사히 받을게요.”
“그리고 편하게 부르십쇼. 저도 그렇고 잭스 녀석도 그렇고 자꾸 기사 놈들 부르듯이 하시는데…….”
“네?”
“그 경이라는 호칭 말입죠. 루버몬트 안에서야 주군이 기사들이랑 저 희 토벌대 병사들이랑 동등한 취급 해주시기야 합니다만, 엄밀히 따지면 그 렇게 불릴 만한 위치가 아니라서요.”
“……네?”
아이샤가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 웃했다.
“영애가 저희 같은 놈들도 기사들 취급해주려고 하시는 건 압니다만, 그렇게 대우해주시다 보면 저것들 정말로 뭐나 된 줄 알고 콧대 높아지니 까…….”
“…….”
“저한테도 말 편하게 하시고, 쟤네 도 이름 물어봐서 이름으로 부르시고하십쇼. 싸가지없게 구는 놈들 있으 면 저한테 바로 말씀하시고.”
“아, 그렇군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아이샤가 어색하게 웃었다.
“기사 대접을 해드리려고 했다기보 다는, 몰랐어요. 전 보통 성에서 일하는 기사들을 다 그렇게 불러왔고, 로만 경이나 다른 토벌대 분들도 동등 한 위치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 그러셨습니까? 저 기사 놈들은 저희하고 출신이 달라서 까보면 다 귀족이고 뭐 그렇습니다. 기사 작위아무나 따는 거 아니라서요.”
“그렇군요. 그건 좀 문제가 있어 보 이네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던 아이샤 가 웃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어차피, 지금 제국에서 그 건 거의 명예호칭 수준이고 크게의 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경을 존중하고 싶은 자리에서는 그렇게 부르도록 할게요. 다만 이름을 부르면 친근하게 느껴지기는 하니 까…….”
악수하자는 듯 하얀 손이 뻗어졌다.
아자르는 아이샤가 내민 손을 멍하니 바라볼 뿐 얼른 붙잡지는 못했다.
“둘이 있으면 이름 부를게요, 아자르.”
끝에 덧붙인 이름이 옅은 바람을 타 고 살랑 실려와 귀에 감겼다.
하데스에게는 질리도록 듣는 이름 이건만 아이샤에게 들으니 놀라울 정도로 느낌이 달랐다. 잠시 동안 아자르는 텅 비어버린 머리로 멍청하게 한참 굳어있었다.
“아자르?”
“아, 예!”
다시 한번 이어진 아이샤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 차린 아자르가 내밀어진 손을 살짝 붙잡았다.
힘주어 쥔 것도 아니고 살짝 붙잡아 악수했을 뿐인데도 제 것보다 한참 작은 손이 신경 쓰였다.
혹시나 조금만 힘주면 저 가느다란 손마디가 다 부러질 것만 같았다. 그 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아자르는 손에 힘을 빼느라 애를 먹었다.
“안 오고 여기서 뭐 하고 있는데!”
흠칫, 놀란 아이샤가 맹수에게 걸린 토끼처럼 어깨를 움츠렸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가요, 가요.”
쿵쾅쿵쾅 불만스러운 발 투정을 하 며 걸어오는 하데스를 달랜 아이샤가 다시 뒤돌아 아자르에게 살짝 눈인사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총총 걸어 멀어지는 아이샤와 하데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아자르의 미간이 느릿하게 좁혀졌다.
“음…….”
정말 세뇌에라도 걸린 건 아니겠지. 조금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
기사단의 화려한 행진 연습을 하데스와 구경하고 나서, 조각상 작업의 진척을 보여주겠다는 그를 따라 파르넬리 공저로 향하던 와중이었다.
아자르의 말이 생각나, 나는 소설 내용을 가만히 곱씹었다.
수많은 전쟁 장면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했던 아자르를, 아벨은 항상 ‘로만 경’이라고 불렀다. 사실 나도 그래 서 그와 똑같이 불렀을 뿐이다.
조연이라 그런지, 크레센타와 카지트의 혼혈이라는 출신 빼고는 특별한 배경이 구구절절 서술된 적 없어서 몰랐던 부분.
그런데 생각해보니, 확실히 기사 작 위는 교육받은 하급 귀족 출신들의 전유물이긴 했다.
아벨 또한 아자르가 작위를 가진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를 대우해주기 위해 그렇게 불렀던 거겠지.
나는 옆에서 묵묵히 걷던 하데스를 붙잡고 물었다.
“토벌대 병사들은 따로 작위가 없 나요? 경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죠?”
“아, 그렇지. 작위를 받을 수 없으 니 원칙적으로는 그게 맞아. 그런데 별 상관없어. 부르고 싶은 대로 불 러. 개나 소한테도 다 쓰는 명예호칭 아닌가. 특별할 거 없지.”
“그래도 진짜 작위가 있는 거랑 없는 건 차이가 있겠죠. 혼인법도 마음 대로 개정하시는데 영지 내의 작위 수여도 자율적으로 하게 허락해달라 고 탄원서 한 장 넣어보는 건 어떨까 요?”
내 물음에 하데스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펠 백작님이 로만 경이랑 만 날 때마다 사냥개니 뭐니 인간적으로 무시하는 건, 루버몬트 가문에서 토벌대 병사들의 위치가 확실하지 못해 서일지도 몰라요.”
“그대 말이 맞아. 검토해보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설마 아자르 때문에 이런 부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걷다가 나를 휙 돌아본 하데스가 웃고 있었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전 혀 웃고 있지 않은 무시무시한 웃음이었다.
“토벌대에 로만 경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별……. 그리고 저랑 로만 경 그렇게 친한 거 아니니까 눈 마주칠 때마다 예민하게 굴지 좀 마세요. 친하 긴 무슨. 로만 경, 날 싫어하면 싫어 했지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걸 요…….”
시무룩하게 내뱉는 말에 하데스가 잠시 침묵했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 던 그가 돌연 손을 잡아왔다.
“뭐, 뭐예요?”
그냥 담백하게 손만 잡았을 뿐인데신경 쓰였다. 그대로 하데스는 다시 공저를 향해 걸었다.
“전생의 기억이 다 돌아오고 나서 부터인가?”
“네?”
“그대는 말이야. 이번 생에서는 아 무 죄도 지은 게 없는데 꼭 그대 자신을 죄인처럼 생각하면서 말하는 것 같아.”
“아…….”
“예전이랑 많이 달라. 눈에 띄게 위 축되어있고, 말하는 거나 눈빛을 보 면 꼭, 뭐랄까, 자길 병균이나 벌레취급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그랬어요? 뭐, 틀린 말은 아니니 까. 옆에 있으면 하등 도움될 게 없는 건 똑같네요.”
얼굴을 확 굳힌 하데스가 잡은 손에 힘을 주고 나를 돌아보았다.
“미안한데 난 전생에서도 그대가 죄를 지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서. 그렇게 쫄아 있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군.”
“유념할게요.”
“말만 하지 말고, 앞으로 그럴 때마 다 한 대씩 맞는 걸로 하자.”
하데스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마, 맞아?
“와, 전하 여자도 때리는 분이셨어 요? 맞는다니요?”
“어렵지 않지.”
엄지와 중지를 동그랗게 말아 딱밤이라도 때릴 것처럼 하데스가 내 눈 앞에 손을 흔들었다.
아, 딱밤 말하는 거였어? 아니, 아 무리 딱밤이래도 그렇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데스에게 맞는 딱밤이라면 보통 사람들이 잔뜩 힘을 실어 날린 주먹만큼의 데미지가 들어올지도 모를 일이다.
흠칫 몸을 떠는 내 앞에 빙글 몸을 튼 하데스가 말했다.
“일단 방금 한 번 했으니까 맞자.”
“너, 너무해. 이렇게 폭력적인 사람이었다니? 아니, 폭력적인 거야 알았 지만…….”
“이마 대.”
“앞으로 안 할 테니까 이번에는 봐 줘요!”
“싫어.”
단호하게 고개 저은 하데스의 손이 이마께로 혹 다가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놀라서 눈을 꽉 감고 다가올 고통에 대비했지만, 생각과 달리 이마에 불 이 붙는 일은 없었다.
다만 쪽, 하고 붙었다 떨어지는 낯 선 접촉에 나는 더 놀라고 말았다.
“뭐, 뭐…….”
순간 이마를 붙잡고 뒷걸음질하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태연한 표정의 하데스가 나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해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반사적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이 느 껴졌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이마를 쓱쓱 쓰다듬으며 물었다.
“바,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엄청 세게 한 대 맞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