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갑자기 앞당겨진 루버몬트 후계자 공표식 준비로 성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성주 하데스는 물론이고 성의 모 든 고용인들이 잰걸음이 었다.
그 사이에서 한가로운 건 아자르와, 그가 이끄는 루버몬트 토벌대들뿐.
‘제국의 방패’라는 위명답게 공표식 행사과정에는 루버몬트 기사들의 행진 퍼레이드가 포함돼 있었지만, 그 것은 기사 서임을 받고 제국에서 공 인한 기사 출신들만이 전유하는 것이 었다.
그런고로, 비공식적 루버몬트 정예군인 토벌대 군인들은, 귀족 나리들 이 모이는 이러한 공식 행사와는 매번 연이 없었다.
“안 그래도 연무장 좁아 터지는데 당분간 훈련할 때마다 계속 귀찮겠 네. 우씨…….”
연무장 구석으로 몰려 훈련하는 토벌대들을 지켜보며, 부대장 잭스가 꿍얼거리며 말했다. 옆에 서서 듣고 있던 아자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수 있겠냐? 저놈들이 루버몬트 군의 얼굴인데.”
“헹, 그러면 뭐.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라고, 대장.”
고량의 마력을 보유한 능력자들만으로 편성된 토벌대와 달리, 기사단 은 능력자와 비능력자가 섞여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호위 임무를 기본으 로 하며, 출정 시에는 같은 인간들을 상대하는 ‘기사’이기 때문이다. 토벌대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하나 그들은 제국 공인 기사 서임을 받기까지 다양한 것을 배웠다. 예의 규범과 격식 같은 것들.
귀족들을 상대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었고 실제로 귀족이기도 했다.
크레센타 제국에서 통용되는 최하 급 귀족 작위인 준남작에 준하는 수준.
‘경’이라는 명예호칭이 전부인 작위 지만, 다른 가문이 아닌 ‘루버몬트’의 기사이기에 위세가 좀 달랐다.
“괜히 흰 눈 뜨지 마라. 쌈 붙어서 좋을 거 하나 없어.”
“와 …….”
아자르의 말에, 잭스가 턱 언저리를 벅벅 긁으며 놀랍다는 탄성을 내질렀다.
면도를 며칠이나 안 한 건지 지저분 하기 짝이 없었다. 아자르가 눈살 찌 푸렸다.
“대장 처음 여기 왔을 때 생각해보 니까 진짜 많이 변했네. 옛날이었으 면 어디 샌님들이 흙바닥 구르려고 하냐면서 다 내쫓아버렸을 텐데…….”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없다. 그냥 살다 보니 마냥 쌈닭에 들개처럼 굴어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고 깨달 은 것뿐이야.”
“이야…….”
멋들어진 제복을 차려입고 각을 맞취 행진 연습을 하는 기사단을 아자르가 한참 응시했다.
전쟁터에서 마음껏 쏘고, 베고, 누 비는 것이 어울리는 자유로운 토벌대 들이 저기 들어간다면 좀이 쑤셔 하 루도 못 버티고 기어 나올 테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더 고생하는 자신들보다 주목받는 기사단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자르는 어렴 풋이 부하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기사단들에 밀려 연무장 구석지에 박힌 채, 다닥다닥 붙어 서서도 훈련하겠답시고 꿈틀거리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안타까운 마음 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 과포화상태인 연무장을 훑으며 혀만 쯧쯧 차고 있을 때였다.
“어디까지 따라오려고? 이러다가 씻을 때도 따라 들어오려고 하겠 어?”
“내 눈을 봐요!”
“눈 안 마주쳐도 가능하잖아? 안 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이렇게 집요 해? 하하하……. 우리 부인은 바본 가?”
“보라니까!”
“그으래. 많이 봐. 어디 마음껏 보 십시오, 부인.”
땀 냄새 폴폴 나는 좁아터진 연무장 과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미성이 들 려왔다.
돌아보니 하데스와 아이샤였다.
허리를 숙여 키를 맞추고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하데스의 앞에서, 아이샤가 분한 얼굴로 그를 빤히 노려보고 있었다.
‘빡쳐 죽겠구만 저쪽은 한가하게 연 애나 하고 자빠졌네…….’
흙먼지 자욱한 연무장과 달리 꽃향 기 가득해 보이는 두 남녀의 모습을 못마땅한 듯 바라보며 아자르가 혀를 끌끌 찼다.
문득 아이샤에게로 시선이 간 순간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생각지도 못했던지 아이샤가 화들짝 놀랐다.
“어, 어머……. 내가 언제 여기까지 따라왔담?”
“하하, 바보야? 기사단 연습하는 거 보러 간다고, 나오기 전에 내가 분명 히 말했는데?”
“모, 못 들었어요. 가볼게요.”
“아냐, 아냐? 여기까지 왔으니까 기사단 연습하는 거 구경이나 하고 가 라고. 꽤 볼만하거든.”
“아, 됐어요!”
아이샤의 팔을 낚아챈 하데스가 아자르의 눈치 보기 바쁜 그녀를 질질 끌고 가까이 다가왔다.
안쓰러울 정도로 힐끔힐끔 제 눈치를 보는 아이샤에, 아자르는 괜히 민 망해졌다.
그녀를 찾아가 한껏 몰아붙인 날.
아이샤는 이곳에 계속 남아있을 생 각이 없다고 말했지만, 말과는 달리 계속 여기 있긴 했다.
물론 아이샤가 암속성 능력자든 아니든 상관없다는 하데스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그녀가 제 발로 여길 떠 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아이고, 부인! 오실 줄 알았으면 좀 씻는 건데……. 요즘 식당에 안 오 셔가지고 제가 얼마나 뵙고 싶었다고 요!”
“아, 바리알 경. 저도 보고 싶었어요.”
호쾌하게 인사하는 잭스에, 아이샤는 여전히 아자르를 힐끔거리며 화답했다.
불만스럽게 눈썹을 구긴 하데스가 끼어들었다.
“뭘 또 뵙고 싶어, 뵙고 싶긴? 훈련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아, 주군. 섭하게 왜 그러십니까 아…….”
“징그럽다. 가까이 오지 마라. 그리고 이 지저분한 수염 뭔데? 안 밀어? 맞고 밀래?”
“허허, 좀 그렇죠? 이거 부인도 오 셨는데 죄송하네요.”
“아니예요. 남자답고 잘 어울리는 데요. 멋있어요. 전하는 별것도 아닌 데 사람을 면박주고 그래요?”
“저 지저분한 수염이 멋있다고?”
“저 원래 수염 기른 남자 좋아하는 데요? 남성미 넘치잖아요?”
“……뭐?”
“하핫! 정말요, 부인?”
익살맞은 잭스 때문인지, 아자르의 눈치를 보던 아이샤도 긴장이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둘러선 셋이 도란도란 바보처럼 이 야기 나누는 모습을 무심히 지 켜보면 서 아자르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불편한데.’
사실 하데스와 아이샤의 이야기를 한 날 이후로, 아자르 또한 그녀를 다시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암속성 능력자라고 해서 무조건 그 능력을 휘두를 거라는 확신이 있느냐 며 아이샤를 옹호했던 하데스를 보 곤, 처음엔 황당했다.
그 마음마저 세뇌당한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뭐저리 굳게 믿는지, 자신이 따르던 주군답지 않 다 여겼다.
한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하데스의 말도 일리 있었다.
정말 성의 모든 이들을 세뇌해서 제 편으로만들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잔뜩 적의를 내비쳤던 자신에게 가장먼저 작업 들어가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보라.
그저 아이샤가 연무장에 등장했을 뿐인데도, 훈련 중이던 부하들은 전 부 그녀 쪽을 힐끔거리며 좋아 죽겠 다는 표정들이었다.
가렌 백작의 일이 있고부터 부하들 은 전부 저 상태였다.
그건 아이샤가 부하들을 전부 조종해서 자기에게 호감 갖도록 만들어서 가 아니었다. 그건, 그때 직접 그 자리에 있었던 아자르 자신이 제일 잘 알았다.
그뿐인가?
아자르는 성을 떠나기 전, 자길 찾 아왔던 가렌 백작을 떠올렸다.
「내 이번 정기 방문으로 에스클리프 영애에게 배워가는 게 많다. 아는 게 많으시더군. 영애가 고대에 있었 던 명민한 군사의 일화를 들려주었는 데, 여태껏 갖고 있던 내 생각이 많이 바뀌는 계기가 됐다. 」
「……그래서요? 하고 싶으신 말씀 이 뭡니까? 」
「홈, 내가 알고 행동하던 게 전부 가 아니라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게 됐단 말이야. 앞으로 도 계속 보게 될 사이인데 영애가 너 와의 관계를 걱정하기에 가기 전에 한번 찾았다. 」
실로 백작답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아자르는 그 상황이 현실이 아니라 낮잠 자다 꾼 개꿈인 줄로만 알았다.
「너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던 걸 인 정한다. 군관리를 명받은 가신으로 서 토벌대 훈련에서 아주 손을 뗄 순 없겠지만, 명백히 네 영역인 부분은 네 몫으로 남겨둘 터이니 앞으로도 루버몬트와 전하의 위명에 먹칠하는 일 없게 노력하도록. 」
그렇게 가렌 백작이 돌아가고 한참, 생각이 많던 아자르는, 어느 정도는 아이샤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가렌 백작을 찾아가 시간을 할 애하며 그의 앞뒤 꽉 막힌 신념을 물 렁물렁하게 만들기까지 퍽 많은 노력을기울였을 터.
가렌 백작의 변화가 단순히 세뇌 때 문이었다면, 자신이 알아보지 못했을 리 없다고 아자르는 생각했다.
록사를 마주치고 나서 흘린 사람처럼 등을 돌려 사라지던 가렌 백작의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세뇌당한 인간의 행동에는 그처럼 맥락이랄 게 없으니까.
‘믿을 만한 암속성 능력자?’
마치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앞뒤 맞 지 않는 모순된 말이었지만, 아자르는 홀로 생각하며 천천히 스며들듯 그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상념에 잠겨있던 아자르는 문득, 자길 빤히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쳤다.
어느새 조잘거리던 셋의 목소리가 사라져 있었고 아이샤는 자신과 맞춘 눈을 깜빡이다가 곧 허둥거 리며 고개를 틀었다.
‘아…….’
또 정신을 쏙 빼놓고 있었다.
이번에도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짙은 눈썹을 꿈틀거 리며 하데스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 었다.
“진짜 이 눈깔을 …….”
“파십쇼, 파!”
질린다는 표정으로 대꾸하는 아자르에 하데스가 발끈했다.
으르렁대는 둘 사이에서 눈치 보던 잭스가 토벌대 훈련을 봐주겠다며 사라지고, 멀리서 행진 연습에 한창이 던 기사단 단장이 하데스를 발견하고 인사했다.
“전하, 오셨습니까!”
“어어, 그래.”
기사단장을 향해 휘 손을 한 번 혼 들어준 하데스가 아자르를 노려봤다 가, 아이샤에게 말했다.
“기사단 연습하는 거 잠깐 구경하 다가 같이 공저에 가지. 저거 볼만하 니 까 따라와 봐.”
“아아, 네.”
기사단을 향해 먼저 휘적휘적 걸어가는 하데스의 뒤를 따르려던 아이샤 가, 잠시 멈춰선 다음 아자르를 돌아보고 말했다.
“저, 로만 경. 오해하지마세요.”
“뭘요?”
의아해하며 묻는 아자르를 향해 아이샤가 작게 웃었다. 분명 웃는 얼굴이었지만, 누가 봐도 좋아 보이는 표 정은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안타까워지는 느낌이랄까.
아자르는 그런 그녀의 웃음에 반사 적으로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약속…… 지킬 거예요. 전하랑 공자님 옆에 오래 머무를 일은 없을 테 니까, 너무 걱정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