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나는 하데스가 얼마나 대단한 남자 인지 조금 고민해야 했다.
내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저주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무작정 방법을 찾겠다고 패기 부리는 거라고 여겼던 생각을 좀 재고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는 정말로 뭔가를 꾸미고 있는 것같았다. 당장 내 정신 지배를 피할 방 법까지 찾아낸 걸 보면.
‘진짜 뭐 해내는 거 아니야?’
물론 그런 기대가 치밀었다가도 나는 고개를 젓곤 했다.
그를 못 믿는다거나. 시도도 안 해 보고 좌절하는 게 아니다.
아직 전생의 기억을 모두 되돌려 받 은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기억이 떠 올랐고, 나는 저주를 푼다는 게 불가 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그간의 경험으 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히려 발버둥 칠수록 불필요한 희생이 늘어나곤 했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이그니스도 그걸 똑같이 겪었기에 매번 가 장 빨리 자기 연인을 찾아내 죽이려 고 하는 거니까.
그 와중에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만 들고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낸 프로크레아토르의 뜻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를 꼬박 그런 고민들로 채운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하데스에게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문올 열자마자, 꼭 내가 자길 보러 갈 걸 예상이라도 한 사람 처럼 그가 있었다.
“전하!”
그는 왜인지 아무 말도 없이 한참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혼인 문서 내놔요!’
물론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며 속 으로는 열심히 그를 세뇌해보려 애썼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내 눈동자를 알아봤든지 하데스가 피식 웃으며 어 깨를 으쓱했다.
“우리 부인은 의지가 대단하기도 하지.”
“이이 …….”
대체 왜! 왜 안 먹히는 거야?
제풀에 지쳐 달달 떠는 내 머리 위에 큰 손을 푹 올려놓으며 하데스가 우쭐했다.
“소용없다니까 그래.”
“어떻게 한 건지 알려줘요! 무효화 빼고 제 능력을 피해갈 방법은 없는 데 어떻게!”
“글쎄 …….”
“제국에 나 말고 백속성 최종 개방능력자라도 있는 거예요?”
“그런 게 있으면 진작 이제국이 뒤 집어지지 않았을까?”
“그럼 대체 뭔데요!”
“글쎄…….”
하데스는 나를 놀리듯 고개를 갸웃 거리기만 했다.
와, 얄밉다.
“숨기지 말고 말 좀 해달라고요. 왜 혼자만 알고 있어요? 사람이 뭐 이 렇 게 숨기는 게 많아? 지금 그놈의 방 법을 찾는다고 뭘 하고 다니는지도 알려줘요.”
“숨기는 게 많다니, 그게 그대가 나 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않아?”
하데스는 살짝 허리를 숙여 웃으며 물었다. 약간 화가 났는데도 반대로 웃는, 그런 웃음 있잖은가.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입을 다물었고 하데스는 몸을 바로 세우더니 말했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어.”
“제 능력을 어떻게 피했는지 알려 주시면 대답해드릴게요.”
“그대의 형제, 말인데…….”
내 요구를 간단히 무시하고 방문을 연 하데스가 등을 떠밀며 말문을 열 었다.
진지해진 목소리와 형제—라는 소리에 나는 멈칫했다.
하데스와 다시 방으로 들어오며 내가 물었다.
“형제요?”
본능적으로 내가 떠올린 건 당연히 이그니스와 프로크레아토르였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형제 같은 사이였음을 하데스가 어찌 알고 물어올 텐가.
의아해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하데스가 덧붙였다.
“창조의 대마법사, 라고 불렸다던 그 사람 있잖아.”
하데스의 말에 나는 놀랐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건, 프로크레아토르인 모양이었다.
하데스가 그를 어떻게 알고?
“어떻게…….”
“지금 제국에 토속성의 최종 개방 능력자는 두 명이지. 록사 녀석이랑 황실 아래 있는 마탑의 주인, 위그노어 메이도우.”
나를 지나쳐 걸은 하데스가 의자에 턱하니 앉더니 계속 말했다.
“위그노어, 그자의 선조였다고 하 더군. 프로크레아토르 메이도우라는 자가.”
나는 멍한 표정으로 하데스의 말을 곱씹으며 대답했다.
“네. 그럴 수 있죠. 프로크레아토르 도 결혼하고, 애 낳고 다 했으니까. 내 말은요, 전하.”
나는 다급히 하데스와 마주 보고 앉 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내 형제였다는 걸 전하가 어떻게 아시느냐는 거예요!”
“그자가 말해줬으니까 알겠지?”
“뭐라고요?”
“많은 건 묻지 마. 비밀이 너무 없는 남자는 매력이 없거든.”
“아니, 지금 그런 말 할 때예요? 대 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말 좀 해줘요.”
다급히 묻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단 호히 말했다.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해줘. 내가 모 르는 부분을 알아야겠으니까.”
“조, 좋아요. 궁금한 게 뭔데요.”
“프로크레아토르, 그자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지금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그리고 …….”
“…….”
“그대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용신 가이오니아에 대해서도 말이야.”
날카로운 하데스의 눈을 빤히 마주하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뭐부터 말해야 하지. 음, 일단 프로크레아토르는 지금 …….”
“…….”
“작가 하고 있어요.”
“뭐?”
하데스가 뭔 소리 하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곧 잠시 생각하다가 중 얼거리듯 덧붙였다.
“그래. 글은 좀 잘 쓰는것 같더군.”
“네?”
“아니야. 계속 말해봐.”
“제가 처음 기억하는 생에서 아버지가 만든 이 세계에는 우리 세 형제뿐이었어요.”
“그대와 프로크레아토르, 그리고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네. 이그니스 …….”
나는 잠시 미하일의 얼굴을 떠올리 다가, 계속 말했다.
“그중에 프로크레아토르는 아버지 가 제일 사랑하는 자식이었어요. 그 래서 아버지를 꼭 닮아있었죠. 한 세계를 창조할 수도 있는 능력을 가졌 고, 아버지의 마력을 공유하고 있기 도 했고요.”
“뭐? 가이오니야, 완전 멍청한 놈 아닌가? 왜 그런 힘을 나눠줘?”
“믿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그 믿 음이 틀린 건 아니었어요. 프로크레아토르는 아버지만큼의 힘을 갖고 있 긴 했지만 한 번도 아버지에게 복종하지 않은 적 없었죠. 그건 나도, 이그니스도 마찬가지였고.”
“끝까지 복종했나? 배신하지 않았 어?”
“했어요. 결국 우리 형제들은 전부 죄를 짓고 암속성 능력자가 됐으니까요.”
“뭐?”
하데스는 조금 놀란 눈치로 느슨하게 앉아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물었다.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각각 연인을 죽인 죄, 자식을 죽인 죄, 그리고 프로크레아토르는 마지막으로 부모를 죽인 죄를 저질렀죠. 여 기서 말하는 부모는 용신 가이오니야 예요.”
“이미 죽었다고?”
“물론 어딘가에는 살아있겠죠. 프로크레아토르가 죽인 건 아버지의 인 간형 육체였을 뿐이에요. 아버지 자 체를 죽이는 방법은 아무도 몰라요.
죽일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정확히는 죽일 수 없을 것이다. 가이오니아는 말 그대로, 인간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신이니까.
“프로크레아토르가 아버지를 죽인 이유는 저와 이그니스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였어요. 과연 아버지에게 대적할 수 있는지, 저주를 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확신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죽였죠.”
“죽이면 확신할수 있나?”
“정확히는 암속성의 능력자가 되면 확신할 수 있죠. 우리가 받은 벌은 단순히 매 생마다 연인을 죽이고 자식을 죽이는 것만은 아니예요. 죄를 저 지른 수많은 전생을 기억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죄를 저지를 수많은 미래를 내다보는 것까지 벌이죠.”
“아, 맞아. 미래를…… 볼 수 있다 고 했었지.”
“네. 전지함. 꼭 우리들의 운명만이 아니라 여러 미래들을 보여주곤 하니 까요.”
“그렇군.”
“그 능력을 얻기 위해서 프로크레아토르는 아버지를 죽였어요.”
“그럼 그자도 암속성 능력자가 됐 으니 전생을 전부 기억하고 있겠군. 작가를 하고 있다고? 어디, 제도에 서?”
“아니요. 제도가 아니라 …….”
“그럼 어디? 직접 그자를 만나보는 게 낫겠군.”
프로크레아토르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는지 하데스는 다급히 물었지만, 나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줄 순 없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 말했다.
“이 세계에 없어요. 프로크레아토르는 아버지를 죽이기 이전에, 자기 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거든요. 제 말은, 지금 거기서 작가를 하고 있 다는 거예요.”
내 말에 하데스는 적잖이 충격 받은 모양이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한참 침묵했다.
그리고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혼자 튀었잖아?”
“아뇨, 아뇨. 걔 그런 애 아니예요. 그럴 생각이었으면 저를 그곳에 태어 나게 하지도 않았겠죠. 제가 대신관을 만나고 난 이후에 전생을 기억한 다고 말씀드렸죠? 그 전생이 바로, 프로크레아토르가 만든 새로운 세계에 살았던 기억이에요.”
“그자가 만든 세계에 살았었다고?”
“네. 창조의 이능으로는 못할 게 없 으니까요. 이건 제 추측이지만 프로크레아토르는 암속성 능력자가 되었 어도 여전히 아버지와 같은 힘을 지 니고 있을지도 몰라요.”
프로크레아토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건너간 건, 아버지 세계의 법 칙을 피하기 위함이다.
만약 프로크레아토르가 계속 이곳에 남아있었다면 아버지는 어떻게든 그의 권능을 앗아갔을 테다.
하나 미리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두 었고, 아버지를 죽인 뒤 그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그는 더 이상 아버지의 법칙 아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되 었다.
“아니, 그런 힘을 지니고 있는 자가 그대의 저주 하나 못 풀어?”
“아버지의 법칙이 적용되는 이 세계에서는요.”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인 하데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주먹 쥐게 만든 뒤, 그의 앞에 내 손바닥을 활짝 펼쳐 보였다.
주먹을 감쌀 보자기. 이런 느낌이었다.
나는 하데스의 주먹 위에 펼친 손을 덮듯이 얹으며 말했다.
“뭐 이런 느낌이에요.”
“아하…….”
“이미 저는 아버지의 권능으로 태 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법칙에 속해 있어요. 그쪽 세계로 같이 튀 어서 저주에서 벗어난다거나 할 수는 없을 거예요. 어떻게 한 번은 프로크레아토르가 그쪽 세계에 환생시켰던 모양이지만, 이렇게 다시 돌아오고야 만 걸 보면 알 수 있죠.”
“그렇군. 조금 헷갈리지만 어렴풋 이 이해는 하겠어. 잠깐. 그런데 말이야.”
“네.”
“3년 전에 죽었다 살아났다고 하지 않았어? 그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이 세계에 환생한 거 아닌가?”
“맞아요.”
“그런데 그전에도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지 않았나?”
“아아, 네! 프로크레아토르가 작가 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거기서 책을 한 권 냈거든요. 이쪽 세계의 이야기를 소설인 척 엮어낸 거였어요. 아마 제가 그걸 읽고 뭔가 알아챌 수 있도 록 하기 위해서였겠죠?”
“이쪽 세계의…… 이야기?”
“네. 제가 그 책의 주인공이었 던…….”
잠깐. 아벨을 그렇게 덕질했다는 소리를 이렇게 해도 되나?
멈칫한 나를 빤히 바라보던 하데스의 입꼬리가 쭉 올라갔다.
“그래, 5년 동안 짝사랑했다는 말을 이제야 이해하겠군. 프로크레아토르, 그자,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잖아.”
“어, 그러니까 …….”
턱을 아주 하늘 끝까지 치켜든 하데스는 자의식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주인공이었던 모양이지?”
……어, 아닌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