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탈리오를 안은 채로 제누스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제누스의 품에 안 긴 탈리오를 두려운 듯 바라보던 마을 사람들이 길을 터주었다.
그런 제누스가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아서 아테우스는 애가 탔다. 그러 나 멀어지는 그녀의 작은 등을 바라보며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
“다, 내 탓이에요. 내 탓…….”
“…….”
“더 이상 아이들이 아플 일은 없을 거예요.”
그녀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아이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는지 궁금했 지만 묻지 않았다. 괴물들에게서 마을을 구했을 때처럼 제누스가 분명 뭔가 할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과연 제누스의 말대로, 마을은 평화를 되찾았다.
이튿날 마을에는 예전처럼 해가 가 장 먼저 떠올랐다.
“이제 아이들은 괜찮아질 거예요.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로 사라질 줄 알았던 제누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마을에 나타났을 때, 아테우스는 어머니의 뒤에 겁쟁이처럼 숨어 그녀를 지켜보면서 다 행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새 탈리오는 어디로 갔는지 사 라져 있었고, 그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음을 본능적으로 느끼면서도 아테우스는 그저 제누스가 떠나지 않았음에 마음을 놓는 자신이 조금 역겹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제누스는 그 다음 순간 아테우스를 놀리듯 이별을 고했다.
“저는 떠나려고 합니다. 앞으로 마을이 다시 불행해질 일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제누스는 자신이 없는 마을을 걱정스러워할 마을 사람들을 웃으며 안심시켜주었다.
바로 전날 그 어린아이의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목을 조른 이들에게도 어떻게 저리 웃어줄 수 있는지, 아테우스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더 이상 제누스를 잡을 염치가 없음을 알았다. 그녀가 탈리오를 어떻게 했는지도 굳이 묻지 않았다. 어렴풋이 그녀가 괴로운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예상만 했을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은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힘들겠지만 탈리오를 너무 원망하지는 말아주 세요. 그 아이의 탓이 아니 니까요. 미 워하려거든 나를 미워하세요. 전부내 탓이고 내가 지은 죄가 커서 그런 것이니…….”
제누스는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아테우스는 한참 멍한 채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미 친 사람처럼 뒤를 쫓았다. 급히 걷느 라 몇 번 돌길에 채이고 휘청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야속한 제누스는 아테우스가 따라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번도 멈춰 서서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녀의 걸음이 비로소 멈춘 곳은 마을 밖의 낮은 산 중턱이었다.
제누스는 그곳에서 무릎을 꿇고 오 열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앞에 막 파 고 새로 덮은 듯 풀 한 포기 없는 무 른 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버려진 듯 처량하게 놓인 손바닥만 한 나무 조각이 있었다. 서툰 솜씨로 탈리오가 제누스의 얼굴을 새긴 인형이었다.
아테우스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깨 달았다.
‘죽여도 죽지 않을’ 것이라던 탈리오는 죽었다. 그리고 저기에 묻혔다.
제누스가 어떻게든 살릴 수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던 건 그저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마음을 속 인 것뿐이었다.
마을의 평화와 탈리오의 안위를 모 두 지킬 방법을, 제누스는 알지 못했다.
“어제 그 아이가, 네 얘길 했어.”
제누스는 아테우스가 뒤따라온 것을 알고 있었다. 여전히 등을 보인 채 울며 그녀는 말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네 가족이 되 어서 행복했대. 다정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고 전해달라더라.”
“…….”
“그리고 너무 미안하대. 시냐가 예 쁘게 자란 모습을 꼭 너와 함께 보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만들어서 미 안하대.”
“시냐가, 죽은 건, 탈리오 때문이 아니예요.”
“맞아. 그 아이 때문이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줬어요?”
“그래, 그랬지.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어.”
“…….”
“그 아이에게는 죄가 없단다. 너는, 믿어줄 거지?”
“……네.”
“다…… 나 때문이야.”
“당신 때문도 아니예요.”
“아니, 나 때문이야.”
오열하던 제누스는 그제야 아테우스를 돌아보았다.
눈물이 훙건한 얼굴로 제누스는 웃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사람처럼 위태로운 웃음이었다.
“나는 네 여동생이 죽기 전에 구할수 있었어. 시냐를 죽게 만든 건 내욕심이야.”
“…….”
“그 아이를,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 문에, 내가, 망설이다가…… 그러다 가…… 그러다가 몇 명을, 내가, 그 아이들을 다, 내가…….”
“당신 탓이…….”
아니라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아테우스는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탈리오가 온 이후로 거짓말처럼 마을에 찾아온 재앙과 꼭 그것이 자신의 업보인 양 해결하러 찾아왔던 제누스.
그게 전부 우연이 아닌 어떤 운명에 의한 것이라면, 내막을 알지 못하는 자신이 감히 무슨 말을 얹을 수 있을 텐가.
“이제 아프지 않지?”
제누스는 그녀보다 훌쩍 큰 아테우스를 올려다보며 다정하게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금방이라도 떠날 사람의 마지막 인 사 같았다. 아테우스는 절박하게 말 했다.
“미, 미안해요. 내가 탈리오를 지켜주지 못해서, 내, 내 아버지가 탈리오를……. 미안해요. 사과할 테니까, 떠 나지 마세요. 가지 마요. 내 잘못이고 사람들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
“아니란다, 아이야. 그런 생각 하지마. 나는 너도, 네 부모도 원망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사과하지 말렴.”
“아버지가, 탈리오를…….”
“부모란 그런 것이지. 그 마음을 어 찌 내가 모를까? 나는 말이야, 내 자 식을 위해서 그보다 더한 짓도 수도 없이 해왔단다.”
“…….”
“그래서 더 내가 역겨웠어. 죽어가는 자식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그 찢 어지는 마음을,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그저 내 욕심 때문에…….”
제누스는 슬프게 웃다가 곧 말했다.
“탈리오는 죽었어. 그 아이를 죽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내가 그 아이를 죽였으니까, 이번에는 확실히.”
어렴풋이 예상은 했으나 듣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아테우스는 충격으로 말을 잃었다.
“이제 너와 마을 사람들은 이전처럼 평화로울 수 있을 거야. 해가 가장 먼저 뜰 테고 새로운 아이들이 태어 나 건강하게 자랄 수 있을 거야. 앞으 로는 눈물 흘릴 일 없다고 네 어머니 에게 꼭 전해주렴.”
“가지, 마요.”
“그 아이를 사랑해주고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달이 떠 있던 내내 그 아이가 네 얘기밖에 하질 않았어. 네 가 얼마나 좋았기에 그랬을까.”
“가지 마요 …….”
모든 것이 끝나기 이전에, 어둡고 외로운 이곳에서 나란히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 그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곧 죽임당할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던 탈리오와 그를 죽여야 했던 제누스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아테우스는 그들의 고통스러웠을 지난 새벽을 감히 가늠해볼 수도 없 었다.
“이번에는 이렇게 끝이 났지만, 아테우스. 혹시 다음 생에서 그 아이를 만난다면 말이야.”
“…….”
“진짜 가족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 아이가 꼭,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 고 했거든. 그 아이가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하고 따랐던 적은 처음이라 서…….”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가 지 마요. 내가 뭐든 하면 되잖아요. 내가 탈리오의 가족이 되어줄게요. 그러니까 당신도, 당신도…….”
“…….”
“……다음 생에 또, 탈리오의 어머니가 되어주세요. 그 애는 당신이 너무, 너무 좋다고 했으니까. 그랬으니 까…….”
아테우스는 뿌옇게 흐려진 시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내면서 겨우 말 했다.
“가족, 하면 되잖아요.”
제누스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빙긋웃은 채로 한참 침묵했다. 결코 이루 어질 일 없는 소원을 들은 사람처럼 애처롭고 안타까운 눈빛이었다.
말없이 곁을 지키던 제누스가 떠나 려 했을 때 아테우스는 그녀를 붙잡 았다.
이미 탈리오가 죽고 없는 마을에 남 아 그를 떠올리며 괴로워할 걸 알면서도 아테우스는 그녀가 떠나지 않았 으면 했다. 욕심이었다.
힘으로라도 어떻게든 제누스를 붙 잡아두기 위해 그녀의 옷깃을 잡고 매달리던 아테우스는 놀랐다.
옷자락을 당기자 찢어지듯 드러난 제누스의 가슴팍 위에 상처가 선명했다. 손톱으로 긁고, 주먹으로 때리고 할퀴어 피가 나고 멍든 상처.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지는 상 처를 본 순간.
아테우스는 제누스를 붙잡을 모든 의지를 잃고 말았다.
탈리오를 죽이고, 제 손으로 죽이고 나서…….
혼자 남은 제누스는, 홀로 맞는 아침 해가 떠오를 때까지 쉼 없이 계속, 제 가슴을 치고 때리고 할퀴며 오열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정신적인 괴로움에 가슴 위에 새겨진 상처의 고통 따위는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테우스는 감히 제누스의 썩어문 드러진 속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결국, 홀연히 걸음을 돌려 등을 보이고 떠나가는 그녀를 잡지못했다.
제누스가 떠나가고 홀로 남은 자리에 해가 저물었다. 탈리오의 무덤 위에 남은 목각인형이 퍽 애처로웠다.
“탈리오 …….”
아테우스가 울며 무릎 꿇었다. 그의 주머니에서 미처 전해주지 못한 목각 인형 두 개가 나왔다.
「난 정말 행복해. 형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이제 정말로 가족이 생긴 것 같아. 영원히 행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
「그럴 수 있어. 야, 그런데 제누스님이 그렇게 못생겼냐? 」
「헤헤……. 미안. 형처럼 잘 만들 지는 못하겠어. 원래는 나랑 형 얼굴 도 만들려고 했는데…….」
「됐어. 지금 하고 있는 거나 열심 히 해 봐. 너랑 내 얼굴은 내가 만들 테니까. 」
「고마워. 형이 내가족이라서 너무 좋아. 행복해. 」
“아, 아아…….”
탈리오를 떠올리며 아테우스는 꺽꺽 울고 가슴을 쳤다. 아마도 지난 새벽, 제누스가 그랬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