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형, 있지……. 발레라도, 카시우스 도, 잘 지내?”
“어, 잘 지내. 아무렇지도 않아. 괜 찮아.”
탈리오는 어 렸지만 자신을 향한 의심과 적의를 몰라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시냐가 죽고 더 이상 다정하 게 굴어주지 않는 아테우스의 부모가 있는 집을 떠났다.
달리 갈 곳 없던 탈리오는 제누스의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들과 어울리려 하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마을 사람 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아테우스와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것이 전부였다.
“있잖아. 흐으 …….”
“왜 우냐, 바보야.”
“아손 아저씨가 나더러 악마라고 그랬어. 아닌데, 정말 아닌데, 그런데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어. 정말 내가 오고 나서 이마을에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으니까 …….”
“장난해? 너한테 그런 힘이 어디 있 어? 바보 같은 아손 아저씨가 모르고 한 소리야. 신경 쓰지 마, 멍청아.”
“저, 정말? 정말 나, 나 때문에 그런 게 아니지, 형? 형은 그렇게 생각 안 하지? 내 옆에 계속, 있어줄 거지?”
“당연하지. 네가 대체 ……. 컥!”
그 순간 아테우스는 탈리오의 놀란 눈과 마주쳤다.
울컥 토악질이 나와 입을 틀어막고 보니 손바닥 위에 진한 핏덩이가 홍 건했다.
아테우스는 탈리오 앞에서 피를 토 하다니 낭패라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다른 아이들처럼 힘이 빠 지고 몸이 말라가고 있긴 했지만, 그 래도다를 줄알았는데…….
각혈은 의심할 여지없는 죽음의 전 조였다.
“형…….”
충격 받은 둣 초점 없이 흐려진 탈리오의 눈이 시야에 들었다. 아테우스는 각혈 이후 온몸을 옥죄는 고통을 모른 척하면서 애써 웃었다.
“아냐, 이거. 그런 거 아니고, 그냥…….”
멍해진 탈리오의 시선은 아테우스가 아닌 그의 어깨 너머를 향해 있었다. 당황한 아테우스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가 있었다. 입가에 피가 홍건한 제 모습을 보고 심약한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악마…….”
여동생 시냐를 잃은 슬픔에서 채 빠 져나오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는, 경 멸 어린 눈동자로 탈리오를 노려보았다. 그는 곧 와락 달려들어 탈리오의 팔을 끌고 어디론가 향했다.
“아버지! 아버지! 그만두세요! 탈리오 때문에 이런 게 아니예요! 아버지!”
“이거 놔라! 너까지 잃을 수는 없 다! 이거 놔!”
아테우스는 아버지를 이길 수 없었다. 그는 아테우스를 내팽개치고, 무 력하게 끌려오는 탈리오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은 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각혈과 함께 엄습한 감당하기 힘든 고통에 아테우스는 결국 아버지를 잡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가 깨어났을 때에는 어느새 해가 저물어있었다. 고요한 마을에는 집집 마다 피워놓은 횃불만이 타닥타닥 타 며 일렁였다.
“아……. 탈리오.”
문득 불길함이 그의 온 정신을 갉아먹었다. 작은 소년을 악마라고 손가 락질하며 흰 눈 뜨고 벼르던 마을 사람들이, 왜인지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 것만 같았다.
아테우스는 정신없이 달렸다. 탈리오를 끌고 간 아버지를 찾을 때까지쉼 없이 마을을 뒤졌다. 불길한 예감 이 예감만은 아닌 듯 모든 집들이 비 어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을 사람들에게 둘 러싸인 탈리오를 찾았을 때 아테우스는 절망했다.
그들은 더 이상 마냥 친절하고 상냥 하던,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마을의 인 간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저토록 누군가를 경멸하는 표정을 지을 수 있 음은 아테우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악마라도 보고 있는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은 쓰러져 피 홀리는 탈리오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 었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탈리오를 끌어안고 오열하는 제누스도 함께였다.
“대체 이 어린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제누스는 울며 소리쳤다.
천천히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며 아테우스는 놀랐다.
탈리오의 주변에는 피가 홍건했고 그의 가슴에는 작은 칼이 꽂혀있었다. 정확히 심장을 관통해 있었으므 로 탈리오는 죽었을 것이었다.
누군가 그를 죽인 것이었다. 그렇다 면 대체 누가? 설마, 자신의 아버지 가?
아테우스는 그 순간 두려움에 떨었다.
이유는 순전히, 제누스가 자신을 저 마을 사람들처럼 경멸에 잠긴 눈으로 보게 될까 봐 걱정스러워서였다.
약속했던 대로 탈리오를 지키지 못했고 심지어 그를 죽게 만든 것이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를 일이었으니 까.
탈리오가 죽은 이 순간마저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기보다는 제누스에게 어찌 보일지 걱정하는 자신이 퍽 놀라웠다.
갓난쟁이 여동생 시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을지도 모를, 죄 없는 마을 아이들을 전부 죽게 만들었을지도 모를 탈리오다.
그런 그를 끝까지 옹호했던 게, 단 순히 그가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던 가?
가족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했던 형 으로서, 순수하게 그를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었어?
그래, 어쩌면 은연중에 아테우스는 평화로웠던 이마을에 재앙을 불러온 것이 탈리오임을 인정하고 있었는지 도 모른다.
그런데도 끝까지 그를 지키려고 했 던 이유는 저 여인, 제누스와 한 약속 때문이었을 테다.
그렇기에 아테우스는 지금 이 순간 이 꼭 지옥 같았다. 왜 탈리오를 지키 지 못했냐며 자신을 원망할 제누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고 피 가식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그 아이가 마을의 아이들을 죽게 했어요. 해가 뜨지 못하게 하고, 괴물들을 불러왔 다고요!”
눈물이 훙건한 얼굴로 아테우스의 어머니가 남편에게 안긴 채 소리쳤다.
제누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탈리오의 시체를 끌어안고 눈물만 뚝뚝 홀릴 뿐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제누스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둣도 했 지만 그뿐이었다.
그들은 두려움과 경멸에 찬 표정으 로 하나같이 중얼거렸다.
“악마.”
“저 아이는 악마예요. 이미 확인했 다고요.”
“이리 주세요. 어떻게든 해야 해요. 그 아이가 죽어야 우리가 살아요. 그 악마가 죽어야!”
“제발……. 이러지 마세요.”
이미 심장에 칼을 꽂아놓고서 왜 자꾸 탈리오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지 아테우스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 나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에 그는 놀 랐다.
“나도 믿고 싶었어요! 그 아이가 악마가 아니라고! 그런데 이제는 확신할 수밖에 없죠! 죽지 않았잖아요! 심장을 뚫고 목을 졸랐는데도 죽지 않았잖아요!”
죽지 않았다고? 심장이 뚫리고 목 이 졸렸는데도 살아남아있다고?
이해할 수 없는 말에도 제누스는 그 저 탈리오를 끌어안은 채 한참 눈물 만흘렸다.
“불에라도 태워봐야 해요. 어떻게 든 죽여야…….”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그러지 마 세요. 이 아이를 고통스럽게 하지마세요. 어차피, 어차피 당신들이 뭘 해 도…… 죽지 않아요. 이 아이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제누스에 마을 사람들은 흠칫 놀라며 숨을 삼켰다.
뭘 해도 죽지 않는 인간이라니. 그 것은 이미 인간이 아님을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당신! 당신 뭔가 알고 있지요! 이 아이가 우리 마을에 재앙을 불러온 게 맞지요! 그렇잖아요!”
아테우스의 어머니는 미친 사람처럼 제누스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오열했다.
“우리 시냐! 아직 젖도 못 뗀 내 불 쌍한 아이가 죽었어! 이 악마 때문이 잖아! 당신은 뭔가 알고 있는 거잖 아! 말해! 알려달라고!”
“…….”
“내 아가……. 불쌍한, 불쌍한 내 아가…….”
짓무른 얼굴로 아테우스의 어머니 가 무너졌다. 바닥에 얼굴을 박고 오 열하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제누스는 말없이 입술을 떨었다.
“그 아이가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 아이도 제누스 님을 엄마 라고 부르며 따랐으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을 여자 하나가 말했다. 그녀의 옆구리에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말 라비틀어진 딸이 두려운 눈을 하고 안겨 있었다.
제누스의 시선이 가만히 여자와 여 자의 딸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만 당신의 자식 같은가요? 내 딸도, 내 딸도 당신을 엄마라고 부 르면서 따랐잖아요. 내 딸이 죽어가는 건 보이지 않아요? 죽여도 죽지 않는 그 아이가 피 흘리고 있는 것만 보이나요?”
힘없이 중얼거리는 여자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 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슬픈 눈으로 침묵했다.
제누스의 눈이 천천히 자신을 에워 싼 마을 사람들을 홀었다.
아직 덜 자란 어린아이들이 두려운 눈으로 각자의 부모를 끌어안은 채 떨고 있었다. 하나같이 마르고 수척 해진 그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나는 …….”
제누스는 무언가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그 고뇌를 감당하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지극히 고통스러워 보였다.
순간, 아테우스는 머리를 박고 울고 있던 자신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입술을 물고 슬픔을 참으 며 손을 들어 아테우스를 가리켰다.
“제발요. 당신이 뭔가 할 수 있다 면, 제발……. 내 아들만은 살려주세요.”
제누스의 고개가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천천히 돌아왔다. 비로소 제누스는 멀리 서 있던 아테우스를 발견했다. 그녀의 눈이 놀라 움에 물들었다.
아테우스는 순간적으로 입가를 문 질렀다. 이미 말라붙어 닦이지는 않 았지만 여전히 핏자국이 선명할 것이 었다.
제누스는 텅 비어버린 눈으로 한참, 미친 듯 입가를 문지르는 아테우스를 응시했다.
그녀는 곧 축 늘어진 탈리오를 안고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