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하데스는 나를 놀리듯 비죽 웃었다.
아마도 그는 정신 지배를 걸 나를 예상하고 무언가 대비를 한 모양인 데…….
‘무효화 말고, 암속성의 정신 지배를 피할 방법이 있었다고?’
아니, 없다. 그런 방법은 확실히 없다. 무효화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그렇다면 내가 하데스에게 무효화를 걸었나?
‘당연히 아니지.’
그럼 나 말고 무효화를 개방한 백속성 제국인이 있는 건가?
있다고 해도 그런 사람을 사흘 만에 찾아냈을 리가 없다. 아무리 하데스 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한들.
“뭐, 뭐예요.”
“뭐긴. 쉬운 남자 아니라서 그래.”
“자, 장난하지 말아요. 난 지금 엄 청 당황스럽다고요. 어떻게, 어떻 게…….”
초조한 나와 달리 하데스는 느긋했다. 다시 서류를 뒤적거리는 그에게 로 내가 훌쩍 달려들었다.
책상을 돌아와 무작정 멱살을 잡은 내 행동에도 하데스는 그저 여유롭게 웃을 뿐이었다.
“이러지, 이러지 말아요. 약속했잖 아요.”
“아이샤.”
문득 하데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가 한순간에 내 팔을 당겨 제 품으 로 안았다.
어정쩡한 자세로 안긴 내 귓가에 그가 중얼거렸다.
“내가 그대를 죽이지 않고도 자유 롭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
“그렇게 하자. 응?”
“그런 방법은 없어요.”
“그대가 어떻게 확신해.”
“내가 그동안, 그동안 그저 운명이 거니 순응하면서 아벨을 죽여 온 줄 아세요? 매번 노력해보지 않은 적이 없어요. 매번 그 방법이란 걸 찾아보 지 않은 적이 없다고요. 매 생에 서…….”
“이번에는 달라.”
“대체 뭐가요 …….”
“이번에는 내가 있잖아.”
북받치는 감정에 떨고 있는 내 몸을 강하게 한 번 끌어안으면서, 하데스 가 말했다.
“아벨을 죽이기 전에 그대는 누구 에게도 죽을 수 없다며. 그런데 나는 그 법칙을 벗어나는 인간이잖아.”
“네, 그래서 전하가 꼭…….”
“내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그대를 죽이지 않고도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여전히 나를 안은 채로, 하데스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머리를 쓰다 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이번에도 또, 그는 나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실패란 걸 해본 적 없는 사람이야.”
“무슨…….”
“그리고 갖고 싶었던 걸 가져보지 못한 적도 없어.”
나를 품에서 떼어낸 하데스가 지그 시 눈 맞춰왔다. 그는 천천히 이마를 맞대오면서 말했다.
“내가 갖고 싶은 건 가족이야.”
“…….”
“아벨이 내 아들이고, 그대가 내 사랑하는 아내인…….”
숨이 섞일 만한 거리에서 지극히 가 짜웠던 두 입술이, 얼핏 스친 것도 같 았다.
“그런, 가족.”
***
아이샤는 생각이 많은 얼굴로 돌아 갔다. 홀로 남은 하데스 앞에는 위그노어에게서 받아온 비본이 놓여있었다.
록사에게 주문해 만든 무효화의 물 약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부탁을 아이샤가 순순히 들어줄 거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무효화의 이능이 사라지기 전에, 하데스는 그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아테우스.
신을 믿지 않는 자라는 고대어가 쓰인 비본의 표지를 들여다보며 하데스 가 긴장으로 한숨을 뱉었다.
‘이걸 읽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손가락이 표지 위에 적힌 고대 어를 스쳤다.
‘……내가 그대를 오랜 형벌에서 구 할 수 있는, 운명이기 때문이겠지.’
배운 적 없는 말이었다. 이미 오래 되어 잊히고 만 고대어를 알고 있는 자들이 이제국에 남아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하데스는 배운 적도 없는 옛 제국인들의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읽을 수 있었다.
공작위에 오르고 첫 토벌의 보상으 로 황실에서 내렸던 영지. 그곳에서 오랜 세월 묻혀있던 고대의 보물들을 발견했을 때.
낡고 찢어진 고서 몇 권에는 현재 통용되는 제국어와는 너무나도 다른 언어가 빼곡했다. 그 누구도 그것을 해석하지 못했지만, 하데스에게는 그 것이 꼭 익숙한 제국어처럼 느껴졌다.
나중에야 그게 이미 잊히고야 만 고 대어 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고민해봐야 이유를 알 수 없었고, 결국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러나 비로소 이유를 알 듯했다.
비로소.
‘프로크레아토르 메이도우.’
하데스는 비본 위에 손을 올려놓고 마력을 주입하기 전, 잠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디 내 마음에 들 만한 방법을 알 려주면 좋겠군.’
그는 지그시 눈을 감고 마력을 운용했다. 낡은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았던 비본이 마력에 감응하기 시작했다.
아테우스—라는 고대어 위로 붉은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
소년, 아테우스는 해가 가장 먼저 뜨는 선한 인간들의 마을에서 태어났다.
다정한 어머니와 성실한 아버지, 갓 태어난 늦둥이 여동생을 가진 소년은 행복했다.
작은 마을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유 난히 선했고 욕심이 없었으며 화목했다. 서로의 집에 빗장이 없어도 담을 넘는 일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아테우스를 가장 사랑했다. 귀한 불을 다룰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 가신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테우스는 기꺼이 마을 사람들과 자신의 능력을 나누었고 그들은 어린 소년에게 감사할 줄 알았다.
아무도 배를 곯지 않고 누구도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마을은 평온하고 행복했다.
“탈리오라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처 없이 떠돌다가 마을로 찾아든 깡마른 어린 소년을 기꺼이 길러줄 만큼 정도 있었다.
언제 태어나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 고, 부모도 가족도 없었다. 아는 것은 오로지 이름뿐이었던 작은 소년 탈리오는 그렇게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형, 가족이라는 건 뭐야? 나도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있었을까?”
“당연하지.”
“나도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으면 좋겠다. 형이 정말 부러워.”
“왜 그런 걸 부러워하냐? 우리 어머니가 네 어머니가 되어주고, 내가 네 형을 하면 되지. 어려울 것 없어.”
“헤헤 ……. 정말?”
아테우스는 복숭앗빛 뺨을 가진 어린 소년 탈리오에게 좋은 형이 되어 주었다. 탈리오는 불쌍하고 사랑스러 운 아이였고, 사랑받고 자랐던 아테우스는 기꺼이 가족 없는 어린 소년 에게 자신이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항상 같은 시간에 떠오르던 해가 웬 일인지 자취를 감춘 날이었다.
언제나 평온하던 마을은 쑥대밭이 되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모를 흉포한 생김새의 괴물들은 마을 사람 들의 터전을 짓밟고 가축을 찢어 먹 었으며 어린아이들을 산 채로 잡아먹 었다.
탈리오가 마을에 오고 나서 얼마 되 지 않아 일어난 일이었다.
“어머니, 피하세요!”
“아가! 우리 아가는……!”
“걱정하지마세요! 시냐는 무사하 니까! 어머니부터, 네?”
“나는 괜찮아. 우리는 괜찮다. 너 랑, 너랑 시냐부터…….”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괴물들은 해가 뜨지 않는 동 안 가축과 작은 어린아이들만 잡아먹 었다.
아테우스는 어린 여동생 시냐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몸을 숨기고는 벌벌 떨었다.
‘아 ……. 탈리오!’
미처 그를 챙기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아테우스는 절망했다. 갓난쟁이 여동생을 안고 불씨 없는 아궁 이 안에 숨어 덜덜 떨면서도 아테우스는 눈으로 연신 탈리오를 찾았다.
초토화가 된 집. 마당 한복판에 울 며 넘어진 탈리오를 찾아낸 순간 아테우스는 소리쳐 그를 부르는 대신 본능적으로 숨을 참았다.
탈리오의 바로 뒤에서 아가리를 쩍 벌리고 선 괴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도무지 그를 구하러 뛰쳐나갈 용 기가 나지 않았다.
“……형!”
하필 멀리서 탈리오와 눈이 마주쳤 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다. 아테우스는 입을 막고 눈물 흘렸다.
그러나, 기적이었는가?
툭 튀어나온 눈깔을 굴리며 겁에 질 린 탈리오를 한참 응시하던 괴물은, 산 채로 그를 잡아먹는 대신 얌전히 몸을 돌려 사라졌다.
어린아이들을 발견하면 닥치는 대 로 잡아먹는 괴물이 왜 그랬는지의 아했으나, 이유야 뭐가 됐든 다행히 었다. 아테우스는 평생 시달렸을지도 모를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있었다.
새벽이 밝아오고서야 아테우스는 눈물 마른 얼굴로 탈리오를 끌어안고 말했다.
“미안해. 모른 척해서. 너무, 너무 무서워서……. 죽는 게, 두려워서 그 랬어.”
“응? 형이 뭐가 미안해. 나 같아도 그랬을 거야. 나는 괜찮아. 이것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울지 마, 형.”
눈을 마주친 찰나의 순간에 입을 틀 어막고 숨을 삼켰던 못난 형에게 탈리오는 기꺼이 괜찮다며 웃어주었다.
아테우스는 이보다 더 착하고 다정 한 아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동 시에, 다음에는 무슨 일이 생기더라 도 너를 지켜줄 거라며 약속했다.
과연 아테우스는 약속을 지 켰다.
해가 늦게 떠오른 세 번째 밤, 아테우스는 또 한 번 괴물들에게 둘러싸 인 탈리오를 이번에는 모른 척하지 않았다.
“이, 이번에는…… 내가 꼭.”
“혀, 형…….”
작은 탈리오의 몸을 꼭 끌어안고 죽 음 앞에서 두려워하던 그 순간이었다.
“혀엉…….”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괴물들은 거짓말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기적?’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 두 번이나 일어났을 때 아테우스는 조금 두려웠다. 연이은 기적이 정말로 기적인지 헷갈렸다.
‘탈리오는…… 왜?’
그저 기적이고 우연이었을 뿐인가?
마냥 다행이라는 듯 웃는 탈리오를 바라보며, 아테우스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