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허리 숙여 인사하는 위그노어를 웅시하던 하데스가 펼쳐놓았던 책을 덮 었다.
이 책에는 내용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무나 열람할 수 없을 뿐이 었다.
노출되어서는 안 되는 기밀을 보관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마법으로, 가 문의 극비 사항을 수록한 문서에 이 와 같은 종류의 마법을 걸어두는 고 위 귀족이 많았다.
.‘허락받은’ 자만이 그 내용을 볼 수 있는 비본이었다니.
과연 자기 자신도 아는 것이 없다 말했던 위그노어의 말이 이해되었다.
다만 하데스는 놀랐다. 그 ‘허락받 은’ 자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에.
위그노어 메이도우를 찾아오긴 했으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수확하기는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저 암속성 능력자들에 관해 묻고, 차근차근 아이샤의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한데 마치 자신을 기다린 것 같은 위그노어의 반응이 놀랍지 않았던가.
위그노어는, 이 비본의 ‘주인’이 하데스라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그의 선조인 프로크레아토르는 하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문득, 신을 믿지 않는 하데스 그만 이 형벌의 굴레를 끊을 수 있을 거라고 울부짖던 아이샤가 떠올랐다.
정말 아이샤의 말대로 자신에게 저 주를 풀 힘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그녀가 요구했던 방법은 아니어야만 했다.
신과 맞먹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 다던 프로크레아토르, 그가 자신에게 남겨둔 메시지가 부디, 아이샤의 형 벌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이기를.
그리고 부디, 그것이 아이샤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방법이 아니기를.
벽에 걸린 프로크레아토르의 초상 화를 바라보는 하데스의 눈이 날카로웠다.
***
이튿날 눈을 떴을 때, 하데스는 곁에 없었다.
‘이 인간, 도망간 거 아니야?’
절로 한숨이 났다.
얼마 안 가 마력이 돌아올 터였다. 하데스가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줄 알기에 이미 정신 지배의 능력을 사용하겠다는 말까지 해두었다.
세뇌와 달리 정신 지배는,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함께 눈을 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없이 사라진 그의 자리를 보니 마음이 무거웠다.
‘싫겠지. 정말로…….’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어떨까?
사랑하는 아벨을 살리려면 나는 하데스를 죽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럴 수 있나?
‘아니, 절대로. 난 못해.’
나는 할 수 없는 일을 그에게 강요하려는 게 미안했다. 이기적이고 또이기적인 내 선택에 괴로웠다.
처음 북부에 와 하데스를 만날 때까 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 었는데, 얼 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는데도 그는 내게 이미 아벨만큼이나 큰 존재가 되어버린 둣했다.
만약 하데스에게도 내가 그렇게 느 껴진다면…….
‘정말, 정말 못할 짓이야.’
죄책감이 심장 언저리를 아릿하게 짓눌렀다.
퍽 간절한 얼굴로, 나와 아벨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되겠냐고묻던 하데스가 떠올랐다.
정말 그런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나는 이미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오 며 단 한 번도 아벨을 살리는 데 성 공하지 못했다.
나와 이그니스가 직접 자식과 연인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것.
저주의 법칙을, 딱 한 번 비껴가는 것.
프로크레아토르, 그가 찾아준 그 방 법만이, 비로소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전의 생에서 필사적으로 하데스를 찾았던 이유도, 아마 그 때문 일 테고…….
“하아 …….”
누운 채로 긴 한숨과 함께 하데스가 있었던 자리를 쓸어보았다.
온기라곤 없었다. 아주 오래전에 방을 나간 모양이 었다.
‘정신 지배 같은 거, 하데스한테쓰고 싶지 않은데…….”
어차피 이기적인 선택을 그에게 종 용할 거라면, 적어도 죄책감은 덜한 쪽이 나았다.
‘아닌가. 하데스 입장에서는 자의보다는 정신이 지배당한 상태에서 날 죽이는 게 나을지도.’
고민이 길었다.
“아, 맞다.”
문득 나도 모르게 잠들었던 터라 따 로 챙겨 놓지 못한 혼인 문서가 생각 났다.
내 흔적이라 곤 하나도 남겨놓고 싶 지 않았다. 그저 내가 없이도 아벨과 하데스가 빨리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벌떡 일어나 테이블을 살폈지만 혼 인 문서는 온데간데없었다.
“아, 정말…….”
하긴. 먼저 일어났다면 발 빠른 하데스가 그걸 챙겨 가지 않았을 리 없 지.
직접 하데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그놈의 혼인 문서는 꼭 찢어발기고 갈 것이었다.
“어머니…….”
“아, 아벨.”
돌아보니 방금 일어난 듯 부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키는 아벨이 있었다.
그는 배시시 웃으며 내게 안겨들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으응. 아벨은? 좋은 꿈꿨어?”
“네에! 어머니랑 아버지랑 남부에 놀러가는 꿈 꿨어요. 아버지가 어제, 어머니랑 결혼식을 하고 나면 다 같 이 남부에 놀러 가자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헤헤……. 그런 꿈을 꿨나 봐요.”
안긴 채로 내 품에서 얼굴을 비비적 대는 아벨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죽고 난 후 아벨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쓰럽고 절로 눈가가 시 려왔다.
“아벨.”
“네에…….”
그렇지만 아벨, 슬픈 건 딱 한 순간이면 될 거야.
영혼은 죽지 않고, 새로운 몸에 새로이 깃들며 무한의 삶을 반복한다.
그 모든 삶을 계속 고통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이미 아벨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삶을 고통과 슬픔으로 끝을 냈다.
‘이번 딱, 한 번만.’
영혼이 지워질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 존재가 아예 사라지더라도 미련 없었다. 그저 이 작은 아이가 다 음 생부터는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 었으면 하는 바람뿐.
나는 먹먹해지는 가슴을 누르고 아벨을 마주 안으면서, 마지막이 될지 도 모를 고백을 했다.
“사랑해.”
“네, 네?!”
너의 모든 생에서 나는, 단 한 번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그리고 그건, 내가 죽어 없어지더라도 남게 될 유일한 감정일 거야.
“너를, 너무 사랑해. 아벨.”
***
「저, 저, 저 너, 너무 부, 부끄러워 서! 저, 저 가, 같은 마, 마음이긴 한 데 조, 조금 마음, 마음의 준비를 하, 하고 저는 다시 말해드릴게요! 」
내 고백에 시뻘게진 얼굴로 당황하 며 소리치던 아벨이 후다닥 방을 나 서고, 아침 해가 하늘 가장 높이 떠올 랐을 때쯤.
마력이 돌아왔다.
나는 백색의 핵석이 올라와있는 손 목을 내려다보며 마력이 제대로 운용 되는지를 확인했다.
정신을 집중하자 핵석은 금세 손목 안으로 숨어들었다. 가슴팍에 징그럽 게도 박혀 있던 흑색의 핵석도 마찬 가지였다.
잠시 쇄골 아래, 핵석이 있던 자리를 어루만지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인지 마음이 편했다. 정말로 죽음을 코앞에 두면 이렇게 초연해지는 걸까?
‘그래.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여러 생을 떠올려보면 이상할 것도 아니었다. 아벨을 죽이고 매번 내 손으로 목숨을 끊을 때에 한 번도 주저한 적 없었으니까.
나는 하데스의 집무실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그는 다행히도 그곳에 있 었다.
어디론가 숨지 않았을까 걱정했는 데, 의외로 하데스는 태연한 표정으 로 나를 반겼다.
“왔어? 일찍 일어났군.”
오히려 너무 태연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는 으레 그랬듯 자기 집무실 책상에 각 잡고 앉아 서류를 보 느라 바빴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제 제가 지장 찍은 혼인 문서 지금 찢고 싶어요. 주세요.”
본론부터 꺼내자 예상대로 하데스의 짙은 눈썹이 불만스럽게 구겨졌다.
“또 그 소리야? 내 부탁 뭐든 들어주겠다며.”
“싫어요. 전제 조건 달래요. 그게 전하를 위한 부탁이면 들어드릴게요. 혼인 문서에 지장 찍는 거 빼고 아무 거나 말해보세요.”
“옹, 난 그거 빼고는 바라는 거 없 어. 그리고 거기에 얌전히 지장 찍는 게 나를 위한 거야.”
하데스는 아주 가볍게 내 말을 무시하고는 다시 보던 서류로 시선을 돌 렸다.
“저 이제 죽어야 해요.”
그 말에 다시 그의 고개가 들렸다.
“아침부터 진짜 꼭 그런 말 해서 사람 우울하게 만들어야겠어?”
“약속하셨잖아요.”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하데스는 또 나를 무시하고 서류 위로 눈을 돌 렸다.
“하아…….”
정말 내키지 않지만, 능력을 사용해 야 할 때였다.
‘우선 그 혼인 문서부터.’
잠시 눈을 감고 하데스를 대상으로 떠올리며 나는 찝찝한 명령을 내렸다.
‘혼인 문서, 당장 내게 주세요.’
잠시간 더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하데스는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양손으로 턱을 괸 채 나를 뺀히 응시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분명 명령을 내렸지만 그의 손 어디에도 혼인 문서는 없었다.
‘뭐지?’
정신 지배가 먹히지 않을 리 없었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하데스 와 빤히 눈을 맞추고 다시 한번 명령했다.
‘줘! 주세요! 혼인 문서!’
그러나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똑 같았다.
빤히 눈을 맞추며 실시간으로 변하는 내 표정을 응시하던 하데스의 입 가에 슬쩍 웃음이 걸렸다.
재미있다는 듯 당황하는 나를 계속 바라보던 하데스가 말했다.
“우리 부인께서, 내게 무슨 명령을 했을까?”
“뭐, 뭐 ……. 왜?”
혼란스러웠다. 이럴 리가 없는데?
신을 믿지 않는 자라고 신이 만든 제국인의 능력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건 이미 미하일이 하데스에게 세뇌를 걸었을 때 확인하지 않았나?
‘나는 왜 안 돼?!’
내 표정은 아마도 볼만할 것이었다. 하데스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나 그렇게 쉬운 남자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