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저도 놀랐습니다. 굉장히 한미한 가문이지요.”
행정대신이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파멜라가 무슨 말을 하 려는지 대강 이해한 모양이었다.
파멜라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 혼인으로 루버몬트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없지.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행보이긴 해.”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파멜라가 빙긋 웃었다.
“바로 그겁니다, 폐하. 이번에 혼인법 개정을 요구하는 공작을 보며 저는 확신할 수 있겠더군요.”
루버몬트에 하등 도움될 리가 없는 한미한 가문의 귀족 영애를 배우자로 맞고자 혼인법 개정까지 요구했다.
그것은 곧, 냉정하고 계산에 밝은 루버몬트 공작을 한없이 눈먼 자로만드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뜻이다.
사생아를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선 언한 것도, 그가 충분히 루버몬트의 유지를 이을 만큼 강해서라기보다 는…….
‘아이가 중하기 때문이겠지.’
쓸데없는 정은 사람을 유약하게 만 드는 법이었다. 파멜라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았다.
그녀는 양손으로 턱을 괴고 테이블 깊숙이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루버몬트 공작에게 지켜야 할 것이 생겼습니다. 그에게는 약점이 생기고, 황실에는 기회가 찾아온 셈이 지요.”
긴장한 대신들이 숨을 참으며 파멜라를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싶다 면, 루버몬트 공작은 …….”
그녀는 하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섣불리 ‘소중한 것’을 만들면 안 됐지요.”
그것이 곧 약점이 될 테니까.
파멜라는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지금이 루버몬트를 견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점입니다. 기회를 날 리려 하지마세요.”
필요하다면 아내와 자식의 안위를 위협해서라도 루버몬트 공작을 견제하자는 뜻.
일견 비열하게 들릴 수도 있었으나 날로 위세를 떨치는 루버몬트의 목을 눌러놓는 데는 그만한 방법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는 자신의 냉 철한 책사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야말로 권력을 위해 그 어떤 행 동도 주저하지 않는 냉혈한이었다.
고귀한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어린 딸까지 제도에 내다버리고 황실로 들어온 여자.
적으로 돌리기에는 실로 무서운 그 녀가 황실의 편임은, 불행 중 다행히 었다.
***
지루한 회의를 마치고 마탑에 있는 자신의 서재로 돌아온, 그 순간이었다.
위그노어 메이도우는 명백히 달라 진 분위기를 읽을 수 있었다.
고요한 서재는 나가기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쥐새끼 하나 없 이 조용했고 이따금씩 창을 때리는 겨울의 바람소리만 들려왔을 뿐이다.
하지만, 낯선 침입자가 지닌 마력이 너무도 거대해서일까?
위그노어는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순간.
등 뒤에서 그를 덮쳐온 기척이 있었다. 불쑥 튀어나온 팔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그노어의 주름진 목 언저리를 압박했다.
“소리 지르지 마시오. 그대를 위협하러 온 게 아니고 대화를 나누고 싶을뿐이니.”
위그노어는 가만히 눈을 감고 식은 땀을 흘렸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 넘실거리는 낯선 침입자의 힘과 위압감이 대단해서 긴장을 풀 수 없었다.
“허튼짓은 안 했으면 좋겠소. 나는 되도록 신사적으로 그대를 존중할 생각이니까.”
“……예.”
순순히 대답하자 침입자는 위그노어를 결박하고 있던 팔을 풀었다. 자 유로워진 위그노어가 천천히 뒤를 돌 아보았다.
그곳에는 두 얼굴이 있었다.
오래전 자신의 밑에 있던 제자 하나의 얼굴과, 처음 만나는 것이었지만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얼굴.
“하, 하하 ……. 스, 스승님. 오랜만이어라…….”
록사 트리볼트. 오랜 제자와 잠시 눈을 맞추던 위그노어의 시선이 그의 옆에 선 남자에게로 움직였다.
자신을 위협한 침입자의 얼굴은 익 히 들었던 대로였다.
맹수처럼 빛나는 붉은 눈에서 고스 란히 느껴지는 위압감. 상대와 자신의 힘 차이를 정확히 인지하는 데서 오는 여유.
남자는 실로 맨 정신으로 마주하기 힘들 만큼 그 기세가 대단했으나, 그 마저도 잊어버리고 시선을 뺏길 만큼아름답게 빚어진 피조물이었다.
몰래 마탑에 잠입하기 위함이었는 지 차림새는 단출했으나, 얼굴과 몸 짓에서는 숨길 수 없는 위엄이 느껴 졌다.
하데스 루버몬트 공작.
실제로만나보니 신의 편애를 받아 만들어졌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신을 찬양하지 않는 그의 작태에 황실이 분노하는 것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스승님, 여기 이분으로 말할 것 같 으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록사의 말을 자르고 끼어드는 위그노어에, 하데스가 살짝 놀랐다.
그는 곧 흥미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꼭 내가 올 줄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말하는군.”
“예, 메이도우가문의 일원으로서, 오랫동안 지켜왔던 숙명을 마칠 날이 비로소 온 모양입니다.”
위그노어가 후련한 표정으로 말했다.
“……숙명?”
“아마도 지켜야 할 것이 있으시기에, 어떠한 방법이 필요하여 저를 찾 으셨겠지요.”
위그노어의 말에 하데스의 눈이 날 카로워졌다. 그를 방문한 이유를 그 대로 꿰뚫어본 것이 놀라웠다.
“어떻게 알았지?”
“짐작해봤을 뿐입니다. 들리는 말 로는, 황실을 상대로도 무척 대단한 행동력을 보여주셨다 하여.”
막 마치고 왔던 황실 회의 내용을 상기하며 중얼거리던 위그노어가 말을이었다.
“하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해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아는 것이 없는 무지하고 작은 인간일 뿐이기에…….”
“…….”
“다만 전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담 겨 있는 기록을…… 내어드릴 수는 있겠지요.”
위그노어 메이도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선조가 남긴 비본과 함께 오랫 동안 후손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던 ‘전언’을 상기했다.
「신을 믿지 않는 자가 나타날 것이다. 그만이 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비로소 불쌍한 내 형제들을 자유롭게 하리라」
그 전언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제대로 해석해 낸 후손은 아무도 없었다. 위그노어 메이도우 또한 마찬가 지였다.
하나 오랫동안 그 전언을 지키기 위 해 기다렸던 만큼, 위그노어는 자신 이 해야 할 일을 하고자 할 뿐이었다.
잠시 정신을 집중한 위그노어가 눈을 감고 마력을 집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그노어의 마르 고 주름진 두 손 위에 무언가가 생겨 났다.
거룩한 창조의 이능으로 불러온, 선조가 남긴 가문의 비본.
낡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책 안에 담 긴 내용을 위그노어는 알지 못한다. 아마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이가 아니 기 때문에,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로소 자신의 대에서 이 비본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위그노어는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신을 믿지 않는 자.
「이번에도 신을 기리는 과정을 배 제하고 공표식을 진행하려 한다면, 명백히 황실에 반기를 드는 행위로 보아도 될 겁니다. 」
「이번에도 루버몬트 공작은 공식 행사에 찬신 과정을 쏙 빼놓을 모양이었나 보지요. 」
황실은 그저, 루버몬트 공작이 황실의 아래 무릎 꿇기 싫어서 신을 기리 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나 위그노어는 하데스를 마주한 순간, 깨달았다.
이런 자에게, 한없이 약한 피조물들의 위계 따위가 무엇이 중할까?
그가 신을 기리지 않는 이유는 그 저.
‘신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위그노어는 드디어 비본의 주인을 찾았음에 감격했다.
지금까지 신의 축복을 받은 제국인의 몸으로도 신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선조가 찾던 인 물들은 아니었다.
영원히 선조의 뜻을 이루지 못하게된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입니다.”
의아해하는 하데스에게 위그노어는 비본을 넘겼다. 그것을 받아든 하데스가 낡은 표지 위에 쓰인 글자를 눈으로 홀었다.
아테우스(Atheus).
고대어였다. 이를 읽을 수 있는 이 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신을 믿 지 않는 자.]
옆에서 책을 슬쩍 들여다보던 록사 가 갸웃했다.
“뭐라 쓰인 거지라?”
대답하지 않고, 하데스가 책을 펼쳤다.
하데스와 함께 책 안을 들여다본 록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히이이익!”
록사가 화들짝 놀란 소리를 냈다. 동시에 하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록사가 식은땀 흘리며 위그노어에게 말했다.
“스, 스숭님. 저기…… 스숭님이 마탑에만 박혀 계셔가 이분이 누군지 잘 모르시는 모양이지예? 루, 루버몬트 공작 전하이신디……. 이, 이런 장난 치셔블믄 1초 만에 스승님 수염이 재밖에 안 남을 거지라……. 이러지 마시고 그 …….”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록사가 하데스의 눈치를 봤다.
책 안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휘리릭 넘겨보았지만, 안에는 글자 하나 없는 누렇게 변색된 백지뿐이었다.
명백한 기만. 록사는 화가 난 하데스가 한순간 위그노어를 저세상으로보내버릴까 봐 호들갑 떨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 전하! 전하! 원래 스승님이 이런 분이 아니시지라! 황당하시겠지만 조금 진정하시고, 심호흡 하시고, 자 ……. 후, 하!”
“고맙군.”
그러나 록사의 걱정이 우습게도 하데스는 아무 짓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위그노어 에게 감사 인사를 할 뿐이 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록사가 하데스와 위그노어를 번갈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