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같은 시각, 크레센타 제국 황궁.
제38대 황제 발록 프랑세즈 크레센타가 기거하는 케룸 성의 그라치아 저 (邸).
아직 날이 완전히 밝으려면 한참 남 은 새벽인데도, 황제를 비롯한 대신 들이 피곤한 눈으로 모여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황실 입법기관인레지슬라스의 국법 개정에 관한 논의 가 한창이었다.
루버몬트 공작이 혼인법 개정을 요 구하는 반 협박의 서신을 보내온 이 후로 레지슬라스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마탑주, 대마법사 위그노어 메이도우는 황실 소속의 고위 인사라는 이유로 이곳에 불려와 있었지만, 지금 한참 열띤 논의 중인 이 사안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이미 법전 개정까지 마쳤는데 서 둘러 공표하시는 게 낫지 않을 지…….”
아레오파구스(*크레센타 제국의 사법기관)의 대법관이 약간은 초조 한 목소리로 슬그머니 말을 꺼내놓았다.
논의를 시작한 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법 개정은 마쳤으나 공표를 망설이 고 있는 상황. 어차피 루버몬트 공작의 입맛대로 굴어줄 거라면 한 시라 도 삘 리 행동하는 게 나았다.
그 무시무시한 작자와 척을 져 황실에 이득 될 거라곤 없으니까…….
황제는 마른 손가락으로 하얗게 센 수염을 쓰다듬으며 침음을 삼켰다. 그는 며칠 새 반쪽이 된 얼굴이었다.
“그래……. 대신들은 전부, 같은 생각인 것이지?”
그라치아 저에 모인 다섯 명의 고위 대신들 얼굴을 하나하나 훑어보며 황제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전부 루버몬트 공작의심이기를 건드릴 필요 없다는 의견들이었다.
“어차피 공표할 생각이시면 최대한 빠른 게 좋습니다, 폐하.”
“예, 대법관의 말이 맞습니다. 루버몬트 공작이 재차 재촉하는 서신을 보내게 할, 필요는 없지요…….”
대법관과 행정대신이 차례로 말했다.
식은땀까지 흘리는 그들의 얼굴을 응시하던 황제가 결정을 내린 듯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버몬트 공작이 요구한 개정 사항 은 단 하나였다.
성인인 제국인이라면 가주의 허락 없이도 자신의 혼인을 결정할 수 있 도록, 자유를 부여해달라는 것.
황실의 행정에 관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혼인법 하나 개정하는 것쯤 이야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이번 법 개정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는 루버몬트 공작가의 위세에 힘을 실어줄 터였다.
겉으로만 보면 황실이 냉큼 공작가의 요구를 들어준 웃지 못할 그림이 아닌가.
지금이야 ‘내가 필요하니까 법전을 좀 고치시오!’ 수준이지만, 이런 식이라면 언젠가는…….
‘이제 황제 한번 해보게 비켜보시오! ’가 될지, 누가 알겠는가?
“하아 …….”
늙은 황제는 아직 어 리고 유약한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리며 죽을상을 지 었다.
날이 갈수록 위세가 더해지는 루버몬트니, 이제 더 이상 ‘천하가 바뀔 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우스갯말은 아니었다.
“그래, 그럼 대법관은 개정 사안을 공표하도록 하고…….”
“폐하, 휘스트리너 공께서 드셨습 니다.”
포기한 듯한 황제의 목소리가 결정을 내리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라치아 저의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반가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황제가 허겁지겁 들어올 것을 명하 자, 곧 모습을 드러낸 이는 중년의 귀 족이었다.
드문드문 하얗게 센, 보랏빛의 짧은 머리를 말끔히 넘긴 헤어스타일은 그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내주었다.
얼굴에 잡힌 주름 하나하나마저 보는 이들을 휘어잡을 만한 카리스마가 있었다.
제국 남성 귀족들의 전형적인 옷차림을 한 중년이었지만, 놀랍게도 그는 제법 풍채 좋은 여성이었다.
파멜라 휘스트리너.
행정부의 말단 대신에서 황제의 책 사가 된 이후, 영예로운 공작위를 하 사받은 황실의 인재.
영민하고 냉철한 책사 파멜라를 향 한 황제의 의존도는 대단히 높았다.
그녀의 둥장에 그라치아 저에 모인 대신들은 전부 숨을 죽이고 허리를 세웠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가이오니아의 축복이 제국 황실에 영광을.”
정중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파멜라의 등장이 어지간히 반가웠던 모양. 황제가 금세 밝아진 얼굴로 그녀 에게 어서 앉으라 손짓했다.
“가스펠에 다녀왔다 들었는데, 먼 길 고생 많았소. 어서 앉으시게.”
“예, 폐하.”
파멜라가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대신들 사이에서 바짝 긴장한 분위기가 여실히 느껴졌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위그노어 메이도우는, 날카로운 인상의 파멜라와 하나같이 긴장한 대신들의 얼굴을 찬찬히 훟어보았다.
그녀야말로 명실상부 이 자리의 실 세였다.
“가스펠에는 무슨 일로 다녀왔소?”
“루버몬트의 후계자 공표식이 일 년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어찌 진척 이 있는지 상황을 좀 알아볼 겸 들렀 지요.”
“그래……. 가스펠 백작이 뭐라던 가?”
“사실 제 요구사항을 전달하기 위해 방문한 것도 있었습니다.”
“요구사항?”
“예. 루버몬트의 후계자 공표식은 제국의 눈이 전부 모이는 중대 행사 가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도 신을 기 리는 과정을 배제하고 공표식을 진행하려 한다면, 명백히 황실에 반기를 드는 행위로 보아도 될 겁니다.”
다소 공격적인 언사에 대신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덩달아 긴장한 황제가 침을 꿀꺽 삼 키고는 물었다.
“그래서…… 그대가 가스펠에 전달한 요구사항은 무엇인가?”
“공표식 과정에 무조건 찬신(讚神) 과정을 편성해 달라 말하고 왔습니다. 가이오니야 상을 세울 것, 개회 시에 루버몬트의 수장은 신을 믿는다는 기도문을 낭독할 것.”
오른손을 뒤집어 검지와 중지를 펼 쳐 보이며 파멜라가 거침없이 말했다.
그에 그라치아 저에는 정적이 내려 앉았다. 중간에 누군가가 놀라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터졌다.
황제가 다급한 표정으로 마른 입술을 적시며 물었다.
“그대의 뜻대로 하겠다 하던가?”
“물론 백작이 당황하더군요. 이번 에도 루버몬트 공작은 공식 행사에서 찬신 과정을 쏙 빼놓을 모양이었나 보지요. 루버몬트의 방만함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을 지경입니다.”
파멜라가 쯧, 혀를 차며 고개 젓고는 덧붙였다.
“이번 공표식에서 루버몬트 공작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에 따라 황실의 입장을 달리 취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선택하셔야지요, 폐하. 루버몬트를 무릎 꿇릴지, 계속 눈치 보며 그자 에게 권력을 쥐여 줄지.”
“휘, 휘스트리너 공. 그대의 생각은 잘 알겠으나 너무 시 기상조가 아닌지 요? 지금은 루버몬트의 위세가 가장 대단한 때입니다.”
행정대신의 당황한 목소리가 끼어 들었다. 파멜라의 눈이 덜덜 떠는 그를 날카롭게 일별했다.
그 기세에 눌려 행정대신은 흠칫 떨 었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똑똑한 책사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 녀가 어째서 루버몬트를 압박한다는 결정을 내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공께서는 현 루버몬트 공작의 불 같은 성격을 모르시는지요? 황실이 루버몬트를 적으로 돌려 하등 이득이 될 게 없는데…….”
“맞는 말씀입니다.”
파멜라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번 대공작이 즉위하고 나서 루버몬트는 황실도 충분히 위협할 만큼 성장하지 않았는가?
사실, 이전에는 양측의 권력 관계가 이렇게까지 긴장될 정도는 아니었다.
전대공작이 다스릴 때까지만 해도 황실과 루버몬트 공작가는 적당히 견 제하며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다.
황실은 눈치껏 루버몬트를 대우해 주었고, 루버몬트도 황실의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하며 공생했다.
그렇지만…….
하데스 루버몬트, 그 새파랗게 젊은 공작은 어떠한가?
제국의 방패라는 위치를 휘두르며 황실에서 루버몬트의 눈치를 보게 하 기 시작했다.
황실 병력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마수들과의 전쟁을 도맡는 대가로 제국 영토 중 수많은 알짜배기 영지와 수 십 개의 작위들을 요구했다.
이전까지 루버몬트가 제국 황실에 대한 예의로 기꺼이 방패 역할을 자 처해왔다면, 하데스 루버몬트는 제 힘을 이용해 분명히 황실의 권위를 삼켜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로 인해 조용한 견제를 유지해오 고 있던 황실과 루버몬트의 관계에 눈에 띄게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파멜라는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어린 공작의 건방진 얼굴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폐하. 루버몬트 공작이 명백 히 위세를 키우려 하고 있고, 이대로 라면 황실이 허수아비 취급당하는 것도 시간문제이니까요.”
“그러면 어떻게 하자고? 루버몬트에 선전포고라도 하자는 말인가?”
황제도 도무지 파멜라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작게 웃 으며 고개 저었다.
“루버몬트 공작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봐야지요.”
“……뭐?”
“서신을 보내십시오. 공작이 요구 한 혼인법 개정은, 루버몬트의 후계 자 공표식 날 함께 선포하겠다고 말입니다. 또한 공표식 날짜를 근시일 로 당기라 명해주십시오.”
“뭐, 뭐라?”
“공작은 바로 알아들을 겁니다. 공 표식에서 순순히 신을 기리는 의식을 올리지 않으면 황실이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음을요.”
가이오니야 상을 세우고 신에게 복종한다는 기도문을 옲는 것은 곧, 신의 후예인 황족을 인정하고 황실에 충성한다는 의미였다.
후계자 공표식에서 하데스가 신을 인정한다면, 비로소 황실과 루버몬트의 숨 막히는 견제는 소강상태에 들 어갈 것이었다.
상하관계를 확립하자는 말이다.
루버몬트의 무시무시한 젊은 공작을 떠올리면 일견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렸으나, 황제는 파멜라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의견을 낼 인물이 아 님을 잘 알았다.
황제가 다급히 물었다.
“공작이 요구대로 하겠는가?”
“아마도요.”
“아마도라니?”
애매한 파멜라의 대답에 황제가 입술을 떨었다.
“하데스 루버몬트가 사생아를 후계 자로 지목했습니다.”
문득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하나 쓸데없이 입을 놀릴 이는 아니었다. 모두 파멜라의 목소리에 귀를 기 울였다.
그녀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왜? 출정 한 번 할 때마다 철저히 이익을 따져가며 보상을 요구하던 그 루버몬트 공작이?”
피식 웃는 파멜라의 얼굴은 여유 만 만했다. 마치 루버몬트 공작의 약점이라도 잡은 듯 느긋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추측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명망 있는 귀족 가문과 연을 맺고 고귀한 피를 후계 자 삼으면 루버몬트는 더 위세 둥둥해지지 않겠습니까? 실리 따지는 공작이라면 입지 쌓기도 힘든 사생아를 굳이 후계자로 공표할 리 없지요.”
“그건 그렇지요.”
신중히 파멜라의 말을 경청하던 행 정대신이 동의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약점이라 하기 애매합니다. 사생아라 하더라도 루버몬트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능력만큼 은 막강할 테니까요. 한데.”
느긋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파멜라 가 눈을 빛냈다. 흥미롭다는 표정이 었다.
“혼인법 개정까지 요구하면서, 결혼을 강행하려는 상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