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전하…….”
힘없이 하데스를 부르자 그가 미간을 문지르며 한숨지었다.
“그대 말이야. 솔직히…… 너무 이 기적인 거 아니야?”
“이게요? 전 전하를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전생에 제가 살아본 다른 곳 에서는 그래도, 한 번 갔다 온 게 크게 흠이 되지는 않았는데……. 여긴, 여기는 진짜 아니예요.”
나는 절레절레 고개 저었다.
대제국이라는 위명과는 달리 구시 대적인 요소들을 고대로 답습하고 있는 크레센타였다.
철저한 귀족사회 속에서 연애결혼 은 꽃노래였고, 이혼이라는 선택은 법 전에서만 존재하는 환상이 었다.
아주 가끔 가다 그 환상을 실현시키는 귀족들이 출몰하곤 했으나 전부 눈총 받기 일쑤였다.
어떤 이유로 이혼에까지 다다르게되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몇몇 기억나는 얼굴들이 전부 가문에서 강제로 탈적당한 것만 떠올려 봐도, 이 크레센타의 혼인 제도는 정말이지 앞뒤로 꽉 막혀있었다.
그건 남녀 모두에게 통용되는 사안이었다.
이혼이 아닌 예기치 않은 사별이라 고 다른 것도 아니 었다.
젊은 나이에 결혼했다가 남편을 잃 은 어린 아내들이 죽을 때까지 수절하는 것도 흔했고, 몸이 약한 안주인을 잃고 가문을 평생 홀로 돌보는 가 주들도 많았다.
‘물론 하데스야, 맘먹으면 재혼이 어렵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굳이?
참하고 똑똑한 귀족 영애들이, 과거에 부인 있던 남자라고 하데스를 진 지하게 만나보기도 전에 꽁지 빠져라 도망가면 어찌할 텐가.
안 될 말이지, 안 될 말이야 …….
“아벨에게는 엄마가 필요해요.”
“그러니까 찍으라고.”
“전하가 좋은 분이랑 괜찮은 가정을 꾸리셨으면 좋겠어요.”
“아이샤.”
“네.”
“사람이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 고……. 뭐, 그게 인간관계의 기본 아 닌가?”
기브 앤 테이크? 맞는 말이긴 하지.
나는 천천히 하데스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내게 한 부탁이 얼마나 허 무맹랑하고 들어주기 힘든지 몰라서 이래?”
“아, 그건…… 그렇죠…….”
“심지어 안 들어주면 세뇌해서 듣 게 하겠다고 협박까지 했잖은가?”
“……죄송해요.”
“그래놓고 내 부탁은 하나도 안 들 어주겠다고?”
“들어드릴게요! 뭐든 말만 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면 뭐든 할게요. 그 혼인 문서에 지장 찍는 것만 빼고요.”
“다른 건 필요 없어. 내게 필요한 걸 들어줘.”
여태껏 장난스럽던 하데스는 사뭇진지하게 눈을 뜨며 말했다.
정말로 진심인 모양이었다.
“허 …….”
“정 찍기 싫으면 다른 이유를 대. 내가 치 떨리게 싫다든가. 그러면 순 순히 물러나겠어.”
“…….”
“어때? 거짓말은 못하겠지?”
테이블 위로 팔을 짚고 얼굴을 쭉 들이민 하데스가 자신만만하게 물었다.
가만히 그 자의식 넘쳐나는 표정을 응시하던 나는, 순순히 인정했다.
“못 하죠. 제가 전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생각보다 즉각 튀어나오는 대답에 하데스가 멈칫하더 니, 곧 거 보란 듯 턱을 치켜들며 다시 내 눈앞에 혼인 문서를 내밀었다.
“그럼 찍어.”
“주세요.”
당장은 하데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을듯했다.
일단 일보 후퇴.
하데스의 손에서 잉크병과 혼인 문 서를 받아든 나는, 대충 빈 곳에 지장을 찍었다.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지장이 찍힌 문서를 훑어보았다.
마냥 흐뭇한 모양이었다.
‘새벽에 기회 봐서 빼돌려야 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꿈에도 모른 채.
“제국법이야 시간 지나면 무조건 개정될 거고, 지장 찍었으니 우린 오늘부로 합법적인 부부야. 아벨도 그 대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겠군.”
“아 …….”
그의 말에 나는 아차 싶었다.
생각해보니 나는 당장 내일 사라질 사람인데, 괜히 아벨의 마음을 싱숭 생숭하게 만들고 떠나는 꼴이 될 것이었다.
“전하, 생각해보니까 역시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요. 아벨에게는 나중에 따로, 전하께서 잘 얘기해주 세요. 괜히 어린애 마음 들쑤셔놓기 싫어요. 전 내일이면 여기 없을 사람인데…….”
“그대는.”
하데스가 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려는 거지? 꼭 당장이라도 일을 낼 사람처럼 말이야. 오늘 당장 아벨을 죽일 운명이기라도 하나?”
“그건 아니지만…….”
“전생을 기억하고, 미래도 볼 수 있 다지 않았나? 적어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가질 수 있는 거잖아. 이렇 게 서두르는 이유가 대체 뭐야?”
침묵하는 나를 보며 하데스는 격앙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대가 억제제를 먹어서, 그날부 터 사홀이라는 시간이라도 번 게 얼 마나 다행인지 몰라. 안 그랬다면 난 대비도 못한 채로 살인자가 됐겠 지?”
“그렇게는…….”
“아니라고 말하지마. 그대는 뭔가에 쫓기는 것 같아. 당장 죽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 군다고.”
“…….”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난 그대에게 아무것도 아닌가? 인사도, 준비도 없이 헤어지게 되더라도상관없을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서, 그런 거예요.”
“뭐?”
“맞아요. 사실 욕심껏 버텨볼 수도 있을 거예요. 아직은 아벨을 죽이는 미래를 보지 못했으니까요. 어쩌면 십 년도, 이십 년도, 모른 척 머무를 수 있을지도 몰라요.”
“…….”
“그런데 지금도…… 지금도 욕심이 생기는 걸요. 그렇게 오랫동안 전하와 아벨 곁에 머물다 보면요? 미래를 봤 으니 이제 죽을 때가 됐지, 하고 아무 렇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까요?”
덤덤히 말하려고 했지만, 본능적으 로 목소리가 젖어 나왔다.
하데스는 흔들리는 눈으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는 생각했던 거랑 너무 다른 사람이 었어요. 차라리 냉정하고 무서 운 분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쓸데없 이 다정하고, 그리고…… 너무할 만큼 사람을 설레게 해요. 모른 척 전하의 곁에 있다 보면, 아마 전 분 명 …….”
“…….”
“살고 싶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게 두 번은 없을 기회라는 걸 아는데도, 바보처럼.”
매 생에서 그래왔었지.
아벨의 곁을 맴돌면서 그를 지켜보 고, 미래가 보이면 필사적으로 피하 려 하고…….
결국 실패하면서 후회했다.
매번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그 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커진 마음을 붙들 어놓을 길 없어 운명 앞에서 괴로워하게 되었으니까.
조금이라도 덜 괴로울 수 있는 방법을 알면서도 나는, 한 번도 그렇게 하 질 못했다.
“이그니스, 아니, 미하일 대신관이 왜 필사적으로 연인의 영혼을 먼저 찾아 죽이려고 하는지…… 이해하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돼요.”
“…….”
“정을 주고 나면 냉정해질 수가 없거든요. 비극인 걸 알면서도 책장을 넘기게 돼요.”
“…….”
“저만 그런 것도 아닐 거예요. 아벨 은 어떡해요. 아직은 추억이랄 게 없는 아이샤 에스클리프의 빈자리랑, 몇 년을 엄마라고 불러왔던 사람의 빈자리가 같을 수는 없잖아요.”
묵묵히 내 말을 듣던 하데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젖혀 눈을 감 은 채로 중얼거렸다.
“그대는 아마……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괴로워했겠지.”
조금, 슬프고 고마웠다. 한없이 이 기적인 나는 하데스에게 나를 죽여 달라고 떼를 쓰는데, 그는 그런 나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수많은 전생을 기억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온 나인데도, 고작 삼십 년을 못 산 그보다도 못해 보이는 게 우스 웠다.
감았던 눈을 뜬 하데스가 담백하게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말을 쉽게 했 군. 사과하지.”
“네? 아뇨, 아뇨. 전하가 왜 사과를 해요. 틀린 말, 한 것도 아닌데. 저야말로 전하에게 미안한 짓밖에 안 하는 걸요.”
“…….”
“그러니까 제 마음이라도 편하 게…… 사과 같은 거 하지마세요. 오히려 저를 잔뜩 미워해주셨으면, 좋 겠어요.”
그 부탁은 진심이었다.
무리한 요구를 할 수밖에 없는 나를 하데스가 미워해주길, 아무런 죄책감 없이 보내줄 수 있길…….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으로 서로를 한참 응시하며 침묵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아벨이 빼꼼 얼굴을 내밀고 나서야, 우리는 숨 막 히던 침묵 속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저, 저 왔어요!”
오랜만에 셋이 함께 잠에 드는 자리를 퍽 고대했던 모양이었다.
잔뜩 들뜬 얼굴로, 아벨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있던 나와 하데스를 향해 달려왔다.
한달음에 다가와 내게 안기려던 아벨이 왜인지 멈칫했다.
약간 놀란 듯한 눈으로 아벨은 어느 한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보인 건,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혼인 문서.
두 사람의 지장이 나누어 찍힌 그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챈 듯했다.
“와, 와, 와…….”
아벨은 홍분한 얼굴로 작은 손을 들 어 그것을 가리켰다.
“아, 아버지. 이거…… 맞아요?”
“어어……. 그거, 맞아.”
방금까지만 해도 당장 지장 찍으라 며 난리였던 것과 달리 하데스는 약 간 긴장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어머니’로 나를 대하며 정붙일 아벨이 걱정스럽다고 했던 내 말에, 조금은 동요한 모양이었다.
“아…….”
꿀꺽, 긴장한 듯 마른침을 한번 삼 킨 아벨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의 고개가 쪼르르 나에게로 돌아왔다.
왠지, 지금 아벨이 뭘 하고 싶은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아 덩달아 나도 긴장했다.
“저,공자님.”
“여, 영애. 저…….”
“네, 네에…….”
“부, 불러 봐도, 돼요?”
수줍은 얼굴로 시선을 피한 아벨이 괜히 발끝을 꼼지락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