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하데스와의 일이 있은 이후로 꼬박 이틀이 지났다. 그는 그동안 얼굴을 한 번도 비치지 않았고, 나도 그를 찾 지 않았다.
차라리 그게 나았다. 마력억제제의 효력이 사라지려면 하루 정도 남았다. 나는 지체 없이 하데스에게 정신 지배를 걸 생각이었다.
그에게 짐을 지우는 주제에, 한가하 고 염치없게 인사나 하려 한다면 정말로 양심 없는 거겠지.
「산책이나 하지. 」
그러나 마음을 비우자마자 하데스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한 얼굴로 정원을 산 책하자 했고, 나는 조금 당황하다가 조용히 따라나섰다.
“안 온 사이에 정원이 볼만해졌군. 비싼 돈 들여 정원사들 고용한 보람 이 있어.”
“그러게요.”
“남부는 다 이런 풍경 인가? 가본 적 도 별로 없지만, 딱히 주변 구경에는 흥미 없어서 몰랐군.”
“네, 좋아요. 북부도 나쁘지는 않지만 거긴 사시사철 따뜻해서 예쁜 꽃 이 많이 피어있으니까요.”
“그래. 아벨의 생일 때 같이 가는 게 좋겠어. 에스클리프 남작을 생각 하면 항상 마음이 불편하니, 그때 가 서 정식으로 인사하면 괜찮겠군.”
“…….”
“딸을 데려가게 돼 고맙고 미안하 다는 말은 해야 인간의 도리지. 선물은 뭐가 좋겠나? 남작부인은 뭘 좋아하지?”
“전하.”
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하데스의 말을 잘랐다.
그가 말하고 있는 미래에는 내가 있 었다. 터무니없는 말임을 그도 알 텐 데도.
아마 하데스는 모른 척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죽지 않는’ 소설의 결말은 비극이었고, 나는 그것을 아 주 잘 알았다.
내 수많은 전생을 미처 알지 못하는 하데스는 안이하게 굴 수 있어도, 나는 아니라는 얘 기다.
미안한 마음을 감추며 나는 냉정히 말했다.
“제 마력이 돌아오려면 이제 딱 하 루 남았어요.”
정신 지배로 나를 죽여 달라—는 명 령을 내리겠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대신 나는 하데스가 알아듣도록 말했다.
그는 멈칫하다가 피식 웃고는 나를 바라봤다.
“아이샤. 내가 만약…… 그대를 죽 이지 않고도 그대의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면 말이야.”
“…….”
“그러면, 그대는 나를 믿고 기다릴 수 있나?”
“제가 왜 이번 생에는, 성녀 아벨라 에스클리프의 몸에 환생했는지 아세 요?”
하데스는 내 질문에 잠시 미간을 좁 히며 고민하다가 고개 저었다.
“……글쎄.”
“아벨라는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의 연인이에요. 불쌍한 영혼이죠. 그녀도 매 생에서 대신관의 손에 죽 어왔어요.”
덤덤한 내 말에 하데스는 놀란 눈치였다.
“암속성 능력자들이 신에게 받은 벌은, 전생을 기억하는 것뿐만이 아니예요. 그 생에서의 미래도 볼 수 있 죠.”
“……미래?”
“네. 대신관은 수없이 연인을 죽여 왔던 전생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나는 잠시 씁쓸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미래에 자기가 어떻게 연인을 죽이게 될지도 내다볼 수 있어요. 알 고 죽이는 거예요. 물론, 저도요. 고 통스러운 일이죠.”
천천히 걷던 걸음을 우뚝 멈주어 선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걸었다.
“……그렇군.”
“아직은, 아벨을 죽이는 미래를 보 지는 못했지만 곧 보게 될 거예요.”
“…….”
“그러니까 아주 만약에, 제가 이번생에도 아벨을 죽이게 된다면 말이에요.”
“…….”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는 대신관의 손에 죽게 될 거예요.”
“내가 …….”
“전하가 아무리 대단한 분이라도 그 운명은 바꿀 수가 없어요. 미하일, 그 사람도, 연인을 죽이고 싶어서 죽 이는 게 아니니까요.”
우뚝 선 하데스를 마주 보고 서서, 나는 웃었다.
웃고 싶은 기분은 전혀 아니었지만왜인지 그 앞에서는 태연해 보이고 싶어서.
“그렇지만 지금의 제가, 대신관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음을 맞는 다면.”
“그래…….”
하데스는 뭔가 이해한 듯, 입을 벌 린 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빌어먹을 운명이라는 게 깨지 게 되겠군. 그대는 자식을 죽이는 데 실패하고 대신관은 연인을 죽이는 데 실패하게 될 테니까.”
“맞아요. 그게 아마, 수백 년을 반복하면서 찾아낸 유일한 방법일 거예요.”
프로크레아토르는 신을 죽여 미래를 내다보는 전지함을 얻었고,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들었다.
그는 운명을 풀 미래가 보이지 않는 다면, 벗어날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본거겠지.
비로소 이 형벌의 굴레를 풀고 자유 로워질 형제들, 나와 이그니스의 영 혼을.
“그러니까 이번 생에서는…… 다른방법 같은 거 없어요. 대신 다음에…… 다음에는…….”
내게 다음 생이 약속되어있다면 기 쁘겠지만, 안타깝게도 확실하진 않았다.
억지로 신이 내린 형벌의 굴레를 풀 고 자유로워진 대가로 무엇을 지불해 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렇지만 믿고 싶었다.
내게 다음 생이라는 것이 존재할 거 라고.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다음에는 아무 걱정 없이,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이번 생에서 우리의 미래는 약속되 지 않았어요.
그 잔인한 말보다는, 다음 생에서 보자는 희망적인 말로…….
나는 하데스와, 그리고 나를 위로했다.
“전하를 기억할게요. 마지막 세뇌는 저 자신에게 걸 거예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더라도 전하를 기 억 할 수 있도록.”
울면 안 되는데…….
눈물이 나서,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게 차올라서.
나는 어린아이처럼 입술을 문 채 손 등으로 눈가를 쓸었다.
“그러니까, 엄청 이기적인 부탁이 지만, 전하…….”
“…….”
“다으, 다음 생에, 전하의 옆에 있 게, 해주세요…….”
“…….”
“저, 전하의 바로 옆자리는 바라지 도 않아요. 하녀라도 시켜주세요. 전하가 싫으시면, 할 수 없지만 요…….”
하데스는 말이 없었다.
나는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연 신 훔쳐내며 계속 말했다.
“아벨 말고,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싶은 사람이, 생기게 될 줄…… 몰랐는데.”
“…….”
“저는 너무 욕심이 많은 사람인가 봐요. 죄송해요 …….”
“아이샤.”
나지막이 나를 부른 하데스가 손을 뻗어왔다.
그는 내 뺨을 잡고 숙인 고개를 들 어 눈을 맞춰왔다.
“울지 마.”
그는 위로하듯 말하며 검지로 부드 럽게 내 뺨을 쓸어 눈물을 닦아냈다.
울지 말라는 말에 아이러니하게도 더 눈가가 시렸다.
연신 흘러내리는 눈물을 쓸어주던 하데스가 천천히 나를 끌어안았다.
“잘 이해가 안도다.”
그는 나를 끌어안은 채로 조심스럽 게 말했다.
“이렇게 착한 그대가 왜, 그런 끔찍 한 벌을 받고 있는지 말이야.”
“저는 죄를, 저질렀어요.”
“그것이 죄라고 판단한 게 신인가? 나는, 그대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저는 자식을, 그 애를, 아벨을…….”
“그대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짓을 저질 렀을 거 라고 생각하지 않아.”
나를 안은 하데스의 팔에 힘이 들어 갔다.
내가 처음으로 자식을 죽였을 때의 기억은,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었다.
그러나 하데스는 퍽 단호하게 나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믿겠다고 결심한 것을 믿어.”
“…….”
“그리고 그대의 부탁은, 언제고 들 어줄 테니 걱정하지마.”
진심 어린 허락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행이었다. 이보다 더 이기적일 수는 없겠지만.
이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운명에 서 나를 구해줄 구원자가, 하데스라는 사실은.
***
「오늘은 같이 자지」
「네에에에?! 」
「뭘 그렇게 좋아해? 아벨도 같이 말이야. 나랑, 그대랑, 아벨 셋이 서. 」
「조, 좋아한 거 아니거든요? 」
「응, 그래. 그렇다고 치자. 」
산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하데스는 뜬금없이 나를 놀렸다.
아무래도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남 지 않았으니 아벨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은 모양이었는데…….
‘그러면 처음부터 아벨이랑 같이 자는 거라고 얘길 하든가!’
대뜸 같이 자자는 말은 분명 나를 놀리려는 의도였을 테다.
나쁜 사람…….
“오늘은 막 옷 벗기고 안겨들지 마.”
“안 그럴 거거든요?”
오늘의 동침 장소는 내 방.
이를 닦고 오겠다는 아벨을 기다리 며, 나와 하데스는 티격태격하느라 바빴다.
낮만 해도 진지하게 분위기 잡으며 울고불고 난리였던 우리가 맞는지 헷 갈릴 정도였다.
“그리고 이것 좀…… 저리 치워요!”
“지장 찍기 전엔 못 치워.”
그리고…….
하데스는 내 방으로 오자마자 폭탄선언을 날렸다.
분명 내가 찢어버린 걸로 기억하는 데, 언제 복구해서 가져왔는지 모를 혼인 문서를 들이밀면서 말이다.
「지장은 찍어줘야겠어. 결혼을 안 하려는 이유가 내가 사별남 될 게 걱 정되어서라면. 」
나는 도무지 하데스가 이해되지 않 았다.
그는 당장 내일 죽기로 결심한 나와 예정대로 꼭 혼인 신고들 해야겠다며 바득바득 우기고 나섰다.
물론 내가 혼인 문서를 찢은 건, 하데스가 싫어서도 아니고, 결혼이 부 담스러워서도 아니다.
대 루버몬트 공작가의 수장을 하루 아침에 홀아비 만들 수는 없지 않는 가.
“왜 이렇게 떼쓰시는 거예요? 애도 아니고…….”
어차피 죽음을 결심한 나인데, 대체 서류상 부부로 엮여 무슨 이득을 얻 겠다고 이러는 거지?
아벨이 오기 전에 빨리 지장을 찍으 라며 강요하는 하데스에 나는 당황스 러웠다.
“내가 싫어? 아니면 루버몬트 공작 부인이 되는 게 싫어? 그것도 아니면 유부녀가 되는 게 싫은가? 그중에 이유 있어?”
“아뇨! 전하가 말한 이유가 맞아요. 전하를 위해서 결혼하지 않으려는 거 예요.”
“그런 거면 찍어.”
“저기요, 전하. 제가 죽어도 혼인 문서는 남는다고요. 재혼이 불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서류상 한 번 갔다 온 남자가 되는 건데, 뭐 하러 사서 그런 짓을 해요?”
“내 마음이야.”
“아, 물론 전하처럼 멋지고 완벽하 신분이 재혼하기 어렵지는 않겠지만 …….”
“직접 손가락에 찍어줄까?”
하데스는 두말하기 싫다는 듯, 혼인 문서와 함께 챙겨온 붉은 잉크병을 열고 내게 까닥까닥 손짓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