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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103화 (103/221)

103화.

“이제 믿지 않으실 수 없겠죠.”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하데스의 혼 란스러운 얼굴이 어렴풋이 잡혀왔다.

나는 무작정 손을 들어 날카롭게 가 슴 위의 핵석을 쥐었다.

“뭐 하는……!”

당장이라도 핵석을 부술 듯 파고드는 내 손짓에 하데스가 놀라 뛰었다.

하나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파짓, 스파크가 튀는 것처럼 강렬한 거부반응.

핵석을 파괴하려던 의도가 다분한 내 손은 그에 닿기도 전에 무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륑겨 나왔다.

나를 말리려 뻗었던 하데스의 팔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저는 이번 생에도 죗값을 치러야 해요. 벌써 수백 번 죽여 왔던 내 자 식의 영혼……. 아벨을 제, 손으로 죽이기 전까지는 절대, 스스로 죽을 수도 없어요.”

“…….”

“죄송해요. 이런 부탁을 해서. 그런 데 전하만, 전하만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어요. 제발요. 제발 …….”

“……왜 나지?”

잔뜩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하데스가 물었다.

무심한 표정. 그 너머로 그는 명백 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아마 전하는…… 신을, 우리의 아버지를 믿지 않는 분이기 때문일 거예요. 신의 힘을 받은, 신을 가장 닮아 있는 제국인이면서도 신을 믿지 않는.”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신의 저주가 가진 법칙도 거스를 수 있을 만 큼?”

“아마 그렇기 때문에 제가 필사적으로 전하를 찾으려 했던 거겠죠. 그 때 오비투스에 마수를 풀었던 것도 저예요. 전하를 만나서 아벨을 맡기 고, 저를 죽여 달라 부탁하려고요.”

“그대는 참…….”

하데스는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힘없이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이기적이군.”

“네. 맞아요. 그래서 정말, 미안해요. 정말 …….”

“내가 그대의 부탁을 거절하겠다고 한다면?”

예상했던 범위의 대답이었다.

나는 가만히 하데스를 바라보며 웃 었다.

“전하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지는 않아요. 벌이나 다름없는 이 저주 받 은 능력을, 되도록 그 어떤 곳에도 쓰고 싶지 않아요.”

“하, 하하…….”

지금 죽지 못하더라도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었다.

마력이 돌아오면 하데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쯤은 쉬우니까.

이기적인 협박을 바로 알아들은 하데스는 메마른 시선으로 허공을 더듬 으며 허탈하게 웃음 지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

“정말로 미안해요. 그렇지만 제가, 제가 아벨을 죽이는 걸 옆에서 지켜보게 되는 것보다는, 그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전하…….”

어쩌면 이 비극 속 최대의 피해자는 하데스일 테다.

이제 그만 안식을 찾고 싶다는 내 욕심은, 그의 고요한 삶에 파문을 일 으켰다.

죽음도 불사할 정도로 아벨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나 자신은 그의 삶에 끼어들어 혼적을 남겼다가, 이제는 제멋대로 지워 달라 떼쓰고 있었다.

“정말 미안해요. 죄송해요. 정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렸다.

허벅지 위에 놓은 꽉 쥔 주먹 위로 뚝, 뚝, 쉴 새 없이 감정이 추락했다.

“나를 봐.”

무심한 하데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결심을 굳힌 듯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냉정하고 차가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흐린 시야를 손으로 지워냈을 때, 하데스는 얼굴에 서 모든 감정을 지워낸 채였다.

당황도, 좌절도, 분노도 없었다.

나를 안쓰러워하는 얼굴도, 괴로워하는 얼굴도 아니 었다.

처음 오비투스에서 그를 만났을 때.

누구보다 냉정하고 감정 없던 본모 습 그대로의 표정.

나는 비로소 웃었다.

그가 결정을 내렸음에 기뻐서.

“가만히 있어.”

천천히 거리를 좁혀 다가온 하데스 가 내가슴팍 위에 달린 핵석 언저리를 어루만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 어떤 거부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곧 찾아올 안식을 기다렸다.

다시 태어나 평범한 삶을 살게 되는 것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더라도 괜찮았다.

이그니스, 이그니스의 연인, 그리고 나의 자식.

이 희생으로 자유로워지는 이들은 셋.

퍽 가치 있는 죽음이 아닌가.

“…….”

핵석 위를 어루만지는 뜨거운 손길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망설이는 손길에 긴장을 삼키고 있 던, 그 순간이었다.

“아!”

당장 핵석을 깨뜨릴 줄 알았던 하데스의 손이 내 뒷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놀라 눈을 뜬 순간, 나는 몸을 숙인 하데스에게 잡힌 채였다.

안듯이 내 목을 당겨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로,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싫어.”

“전하…….”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자유로운 손 만 들어 엉망이 된 내 드레스 앞섶을 추슬렀다.

훤히 드러난 핵석을 가린 그는 위험 한 짐승처럼 계속 내 귓가에 속삭였다.

“조용히.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돼.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

“…….”

“이건…….”

그는 옷자락 아래로 자취를 감춘 핵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대와 나의, 비밀이야.”

***

「이 촉새 새끼야, 주군이 당장 돌아오라신다. 」

하루하고 반나절이 꼬박 지나있었다. 록사는 본거지로 가던 길에 들러 온 아자르의 전음에 다시 루버몬트로되돌아와야 했다.

최대한 마력을 아끼고 회복하라는 이해 못 할 하데스의 당부와 함께 루버몬트로 되돌아온 록사는, 그와 단 둘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곧바로 본론을 꺼낼 줄 알았던 하데스는 한참 록사를 앉혀두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묵했다.

마주 앉은 엉덩이에 좀이 쑤셔올 때쯤, 하데스가 입을 열었다.

“록사 트리볼트.”

“예이, 전하!”

록사가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아이샤에게서 뽑아낸 성력의 양이 어느 정도지?”

“음? 아……. 그때 제가 마력이 부족해가 많이는 못 빼냈지라. 한데 성력의 질이 좋아서리, 생각했던 것보 다는 훨씬 많이 만들 수 있어예. 한…… 쉰일곱 개쯤?”

“다른 것을 만들어라.”

“……예?”

록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거라면…… 뭘 말하시는 거 지라?”

“백속성의 이능은 전부 흉내 낼 수있겠지?”

날카로운 하데스의 눈빛에 록사가 잠시 생각하다가 웃었다. 무리한 부탁을 하려는 걸 내다본 사람처럼 어 색한 웃음이었다.

“아마, 무효화를 말씀하시는 모양 인디…….”

“맞아.”

“회복 물약이야 쉰일곱 개지마는, 무효화는 최종 개방 능력인지 라…….”

“몇 개.”

“허허…….”

팔자 좋은 질문이다. 록사가 허허 웃다가 표정을 싹 굳혔다.

“몇 개라니요. 당연히 하나지라. 그 것도 오래가지도 못하지라.”

“약효는 며칠 정도 가나?”

“최대로 잡아야 나흘?”

록사의 자신 없는 대답에 하데스가 이를 악물었다.

“그 질 좋다는 성력으로 고작?”

“아이고, 전하. 진정하셔라. 무효화 가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셔예? 괜히 성녀가 성녀라 불리는 게 아닌 디……. 지는 그냥 홍내만 낼 수 있을 뿐이지 라.”

“알았다. 일단 만들어. 얼마나 걸리 지?”

“무효화는 많이 어려울 것 같은디, 엄, 지금부터 시작하면 최대로 사흘 정도는 생각해 주셔야…….”

최대로 사흘.

아슬아슬하긴 해도, 아이샤의 마력 이 돌아오기 전에 시간을 맞출 수 있을 듯했다.

하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작업 시작해라. 필요한 건 내게 말해. 곧바로 준비해줄 테니.”

“그냥 구상을 하는 거니 종이랑 펜이면 되지라. 한데 갑자기 무효화의 이능은 왜 필요하심까? 전하가 뭐, 세뇌 말고 달리 무효화의 이능까지 받아가며 피하실 게…….”

중얼거리던 록사가 화들짝 놀라 소리 쳤다.

“대신관을 잡으러 가시는 거지라!”

“그런 거 아니니, 긴말 말고 얼른 만들어. 그리고 곧바로 나와 갈 데가 있다. 포털을 좀 열어줘야겠어. 마력 은 얼마나 남았지?”

“거리에 따라 다른데, 어디로 가실 라고예?”

“마탑.”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록사의 가느 다란 눈이 열렸다.

웬만큼 놀라지 않고서는 눈동자 보 이는 법이 없는 그이니,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록사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전하께서 저를 버리시는 거지예……. 루버몬트 사정이 안좋 슴까? 제 현상금이 고작해야 얼마나된다고? 분명 그제는 4억이나 쾌척 하시드니만…….”

“걱정하지마.”

“까, 까먹으신 모양이지라? 지는 제 국 공식 지명수배자란 말여예! 지를 잡을라고 혈안이 돼 있는 황실에 포 털을 열라고예? 진심이심까?”

“아무도 너 못 건드려. 네 목숨을 가지고 황실이 협박하면 다 죽인 뒤에 수배지를 태워버리겠다고 약속하 지.”

“아니, 무슨…….”

“황제가 가로막는대도 문제없어.”

“푸하하……! 죽이기라도 하시게요?”

“어.”

웃자고 한 말에 하데스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록사가 킬킬거리던 표정 그대로 굳 었다.

서서히 그의 입꼬리가 내려왔다.

“진심이시네예……?”

“나는 항상 진심이야.”

“그렇다면 돌으신 거겠지라?”

“어쩌면 그럴지도.”

“황제를, 아니…… 제국을 망하게 하실 생각이셔예? 반역?”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당장 마탑으 로 가 위그노어, 그자를 만나야 할 뿐 이야.”

“무사히 그곳에 다녀올 수 있을 리 가…….”

“그래. 역시 황실과 충돌은 불가피 하겠지.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곧 황좌가 비게 되겠군. 그래도 상관없어. 빈 황좌에는 아무나 앉히면 될 게 아닌가.”

“와…….”

“원하면 네가 앉든가.”

“전하!”

록사가 빽 소리쳤다.

“확실히 돌으신 거 알았으니 그만 하시지라! 아무리 제가 지명수배자 라고 해도 이렇게 나랏님 암살 계획에 태연하게 동참하고 싶지는 않거든 예?”

“포털, 열겠다는 거지?”

거절하면 이 자리에서 제 머리롱이 불탈지도 몰랐다.

록사는 잠시 남은 마력을 가늠했다. 무효화의 물약을 만들고 나면 겨우회복되고 있던 마력이 현저히 줄겠지만, 다행히도 루버몬트에서 마탑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을지도.

지금 하데스의 표정을 보면, 남은 마력이 있든 없든 뭔 짓을 해서라도 포털을 열어야 할 듯했으니까.

록사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 덕였다.

“예. 알겠어라…….”

“고맙다.”

담백한 인사에 록사가 또 흠칫했다.

수고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어도, 이렇게 진심이 물씬 풍기는 인사는 또 처음이었다.

하데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반역까지 들먹일 정도로 중차대한 사안임은 확실해 보였다.

어차피 물어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을 표정이 라 록사는 궁금함을 삼키 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해 만들어보겠어라.”

“그래, 준비가 되면…….”

몸을 일으키던 하데스가 멈칫했다.

여느 때처럼 품 안에 제 몸처럼 지 니고 다니는 주판을 꺼내 튕기는 록사 때문이었다.

“무효화. 백속성의 최대 개방 이능이라 계산하는 데 상당히 준비가 필 요하니 추가수당 적용하고, 마탑까지 왔다 갔다 포털 두 번 열어드리는 데 기본 운임비 받아야 하는디 단골 고 객이신께는 반값 할인 해드리겄어라. 편도 금액만 책정할게예.”

“후…….”

지그시 눈을 감은 하데스가 길게 한 숨을 내질렀다. 그럼 그렇지.

“그리고 마탑이라니. 당연히 위험수당도 챙겨 받아야겠어라. 아시지 예?”

눈을 찡긋하는 록사를 마주 보며 하데스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원하는 만큼 다 털어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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