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착각 …….”
목이 턱 막혔다. 나는 억지로만이든 목소리를 겨우 뱉어내야 했다.
“……아니예요.”
한순간 싸늘하게 굳어지는 하데스의 눈빛을 마주한 채로, 나는 드레스 소매 안쪽에 돌돌 말아 넣어두었던 종이 한 장을 꺼 냈다.
그건 일전에 하데스가 내게 줬던 거였다.
「하자, 결혼. 」
나를 위해 황제에게 제국법까지 개 정해 달라 요구하면서, 멋없는 프러포즈와 함께 건넸던…….
혼인 문서.
그는 법이 개정되는 대로 효력이 생 길 거라며 이곳에 지장을 찍어두라 했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혼인 문서를 알아본 하데스가 약간 은 다급하게 손을 내밀었다.
“지장, 찍었어?”
“아니요.”
나는 고개 저었다.
문서를 받으려던 하데스가 손을 뻗 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뜬금없이 왜 이러는 거지?”
“전하의 옆자리는 제게 너무 과분 한 것 같아요.”
“하, 뭔가 했더니 또 그런 말도 안 되는……. 혹시 그대에게 누가 뭐라 고 하기라도 했나? 젠장, 아자르 녀 석이지? 그놈이 하는 말은 …….”
“아니예요. 로만 경은 아무 말도 하 지 않았어요.”
“그럼 대체 왜 …….”
“죄송합니다. 결혼은 할 수 없어요.”
“아이샤.”
“이건 아이샤 에스클리프가 드리는 부탁이에요. 제 부탁이라면 뭐든 들 어주겠다고 약속하셨죠.”
하데스는 황당하다는 듯 웃음을 터 뜨렸다.
“표정을 보니 장난치는 건 아닌 듯한데.”
“네. 장난 아니예요.”
“내가 괜한 소릴 했군. 이런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서 한 약속은 아니었는 데 말이야.”
“네, 알아요. 죄송합니다.”
“이유는?”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일단은 부탁, 들어주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잠시 침묵했다.
한숨을 쉬었다가, 입술을 물며 한참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결국에는 약간 화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대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데에는 뭔가 이유가 있겠지. 그대, 마음대로 해.”
하기 어려운 말을 하는 사람처럼, 하데스는 아주 느릿하게 대답했다.
그의 반응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마음 약해질 시간이 없었다. 나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혼인 문서를 반으로 주욱 찢었다.
내 주저 없는 행동에 하데스가 흠칫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결혼이, 부담스러운 거라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아이샤.”
그는 다급히 덧붙였다.
“아벨이, 아벨이 서운해할 거야. 그 애가, 그대가 어머니가 되어주기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 몰라? 갑자 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떠난다고 하 면…….”
횡설수설하는 그의 표정에는 당황 이 역력했다.
“……그러니까 결혼은 생각해본다 고, 하더라도 아벨의 곁에는, 그대 가…….”
입술을 떨며 말을 잇던 하데스는 곧 한숨지었다.
큰 손으로 눈을 가리며 잠시 헛웃음을 터뜨리던 그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못났군. 아들을 핑계 삼아 그대를 설득하려는 게.”
그는 다시 나와 눈을 맞추고 진지하 게 말했다.
“아벨…… 때문이 아니야. 내가, 내가 그대를 원해. 그대가 이곳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전하.”
“결혼이 싫고, 루버몬트의 안주인 자리가 부담스럽다면 굳이 짊어질 필 요 없어. 강요하지 않아. 그냥…….”
“…….”
“그냥 이곳에, 내 곁에 있어줘. 안 되는 건가?”
붉은 눈이 하릴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절박해 보이는 얼굴은 지금까지 봤던 하데스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진심이 절절한 호소에 가슴이 만 갈 래로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애써 하데스의 시선을 무시하며 말했다.
“네.”
단호한 내 대답에 하데스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적잖이 충격 받은 듯 그의 어깨에서 힘이 빠지는 게 보였다.
“안 돼요.”
다시 한번 못을 박았다.
“대체, 왜 …….”
“전하.”
“…….”
“5년 전에 저랑 약속하신 거, 기억하시죠.”
“뭐?”
미간을 좁힌 하데스가 예민하게 대꾸했다.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죽여주기로 하셨잖아요.”
그 말에, 하데스의 눈이 커졌다. 놀 랐는지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제누스’와 약속한 그 사실을, 아이샤 에스클리프가 알고 있음에…….
“그걸 그대가 어떻게 …….”
“약속을 지켜주실 때가 왔어요.”
“……뭐라고?”
“약속했던 것, 지금, 지금 지켜주세요.”
“장닌, 하나? 하……. 뭐가 뭔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는군.”
냉정하게 말하면서도 하데스는 분명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가 떨리는 입술로 덧붙였다.
“그대가, 그대가 5년 전에 내가 겪 은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지금에 와서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설명해줘야겠어.”
“약속하셨잖아요. 제누스, 그 여자 랑.”
“그러니까!”
하데스가 핏발 선 눈으로 소리치며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매서운 반응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하데스가 떨리는 몸으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어떻게 알았지? 그 여자와는 무슨 사이야?”
“약속, 지켜주세요. 제발…….”
“되지도 않는 소리 마! 그대가 그 여자와의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래전에 받은 허무맹랑 한 부탁이었어. 지금은 기억도 잘 안 나.”
“기억이 안 난다고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전하는 분명히 약속하셨어요. 전생을 기억하는 여자가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죽여주시기 로. 그 여자는 전하와 아벨을 위협할 테니까요.”
“그대가?”
하데스는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코 웃음 쳤다.
“그래. 그대의 말이 맞아. 그런 약속을 하긴 했었지. 제누스, 그 여자 말대로 전생을 기억한다며 아벨 곁에 나타난 자는 그대가 맞지. 한 데…….”
혼란스러움을 감추려는지, 하데스는 일부러 입꼬리를 비죽 기울였다.
“……그대가 무슨 재주로 나와 아벨을? 그대가 어떻게 위협이 된단 말 인가?”
“…….”
“백속성 능력자. 남을 위협할 수단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 대가? 뭐, 그 꼬챙이 같은 손모가지 로 내 목이라도 졸라볼 텐가? 우습 군.”
다시 자리에 앉은 하데스가 매서운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아니, 웃기지도 않아. 더럽게 재미없는 농담이야. 나는 물론이고 아벨 도 마찬가지지. 그대는 아벨의 털끝 하나 위협 못 해.”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런데요 …….”
먹먹한 가슴을 붙잡고 나는 열리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떼었다.
“아마 제가 가진 유일한 재주가 그 것뿐일 거예요. 아벨을 죽이는 것.”
“말도 안 되는 소리!”
소리치며, 하데스는 다시 한번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지, 말라고. 재미없다고 말 하지 않았나?”
나는 침묵하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위로 오랜 고요가 흘렀다.
분노를 감추지 못하던 하데스가 결 심한 듯 내게로 불쑥 다가왔다.
그는 내 어깨를 불잡으며 눈 맞췄다. 살짝 젖은 붉은 눈이 벌겋게 충혈돼 있었다.
“그래……. 아이샤 에스클리프. 한 번 들어나 보지.”
“…….”
“그 대단한 그대의 전생은 어땠지?”
나의 전생.
아마 하데스는 묻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 또한 답하고 싶지 않았다.
해서 우리는 계속 겉도는 대화를 하 고 있었고, 그 사실을 하데스도 나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나 벼랑 끝이었다. 우리는 더 이 상 외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어땠기에, 내게, 이런 말을…….”
“만나보셨잖아요. 이미 한 번.”
“…….”
“아벨을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죠. 그 부탁,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때 그 여자, 제누스가 나였다는 고백이었다.
곧바로 이해한 하데스의 손이 힘없 이 아래로 떨어졌다.
“처음에 전하께 전생을 기억한다고 말했을 때, 기억하시죠? 그때는 저조 차도 몰랐어요. 제가 저주받은 신의 자식이라는 거.”
“…….”
“제가 기억하고 있던 한 번의 전생은, 비극적인 제누스의 삶이 아니었 거든요.”
“그게 …….”
“그런데 어제.”
뭐라 대꾸하려던 하데스의 말을 막 고, 나는 계속 말했다.
“수많은 전생들이 하나씩 떠오르면 서, 다 알게 됐어요. 전하, 이렇게 수많은 전생을 기억하게 되는 자들은 이 세계에서 한 부류뿐이에요.”
제누스였을 때, 하데스에게도 똑같 이 해줬던 말이었다.
“아버지, 용신 가이오니아에게 버림받은 자식들. 저주받은, 암속성 능력자들이요.”
흔들리는 눈으로 침묵하는 하데스를 마주 보며 나는 겨우 눈물을 삼키 고 말을 이 었다.
스아버지는 말씀하셨죠. 자각하는 순간, 저주받은 힘이 나타날 거라고 말이에요.”
“…….”
“전하, 제누스는요, 아주 옛날에…… 자기 손으로 사랑하는 자식을 죽인 끔찍한 죄를 저질렀어요.”
하데스는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가 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천천히 말을 하는데 눈가가 간지러 웠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느껴 졌다.
눈물을 닦을 생각도, 그로 인해 불 쌍하게 보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나는 하데스의 붉은 눈을 피하지 않 고 똑바로 마주하며 한 자, 한 자 또 박또박 말을 이 었다.
“그 벌로, 매 생마다 그 아이를…… 내 자식을 죽여 왔어요. 전생을 기억하는 건 그것 때문이에요. 원하지 않는 살생의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것 또한 벌이니까요.”
“…….”
“전하께 이런 짐을 지워 죄송해요. 그렇지만 너무 고통스러워요. 제발,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도와주세요.”
“뭘 도와달라는 거지? 그대를…….”
“네, 죽여주세요. 그래야만 이 지긋 지긋한 형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 같아요.”
하데스는 넋이 빠진 얼굴로 나를 가 만히 응시하다가, 황당하다는 듯 웃 으며 고개 저었다.
“글쎄. 내게 그런, 그런 부탁을 한 건 제누스 그 여자였지.”
혼란스러운 눈으로 하데스는 말했다.
자기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 통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 었다.
“내가, 내가 무조건 부탁을 들어주 겠다고 한 건 그대의, 얘기잖아. 난, 그 여자와의 약속을 지킬 생각은 없 어. 그런 걸 내게 강요하지마.”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아니면 그 냥 믿고 싶지 않은 건가요? 그때 전하께 그런 부탁을 했던 게, 바로 저예요. 그게 바로 아이샤 …….”
“아니!”
하데스는 이를 악문 채 소리쳤다.
“그대가 제누스, 그 여자였다고? 중 명할 수 있나? 내가 그대의 말을 어 떻게 믿지? 그 여자를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
잔뜩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소리치 던 하데스는 그대로 굳었다.
무작정 드레스 앞섶을 뜯어내듯 찢 어 당긴 내 행동 때문이었다.
파헤쳐진 가슴팍 위로 드러난, 명백 한 중거.
내 가슴 위에 닿은 하데스의 눈이 하릴없이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