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죽음을 앞둔 사람치고 나는 퍽 초연했다. 아마 절망 속에서도 다행인 점 이 있어서일까?
다행스럽게도 난, 나도 모르게 아벨을 죽이게 될까 봐 걱정하지는 않아 도 되었다.
나는 항상 자식의 영혼을 죽이기 전에 그를 죽이고야 마는 미래를 보곤했다.
신이 내게 준 저주 중의 하나인 그 ‘전지함’은, 때로 자식을 죽이는 미래 말고도 여 러 가지를 보여주곤 했다.
‘그러면, 미래가 보일 때까지만, 그 때까지만 살아있으면 안 될까?’
문득 머리를 치켜드는 욕심에 나는 고개 저었다.
어차피 죽을 생각이라면 조금이라 도 빠른 게 나았다. 계속 아벨의 곁에, 하데스의 곁에 있다 보면 나는 살 고 싶어질 테니까.
“아가씨, 왜 이렇게 죽을상이에요?
무슨 일 있었어요?”
내 머리를 빗어주던 앤이 걱정스러 운 표정으로 물었다.
화장대 앞에 앉아있던 내 시선이 가 만히 거울 너머를 들여다보았다. 확 실히 걱정스러울 만한 표정이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고개 저었다.
“그런 일 없어.”
“거짓말. 제가 아가씨를 몰라요? 고 민 있으면 말해주세요.”
빗을 내려두고 내 어깨에 손을 짚은 앤이 거울 너머로 눈을 맞춰왔다.
다정한 앤.
그래, 버리고 가기에는 아쉬운 것들 이 너무나 많구나.
울컥 눈물 나려는 걸 참고 나는 다 정하게 내 어깨에 올라 있는 앤의 손 등을 맞잡았다.
“앤, 아벨 귀엽지?”
“공자님이야 당연히 귀엽죠. 또 덕질할 시간이에요?”
익숙한 듯 앤이 쿡쿡 웃었다.
“아직 어려서 많이 챙겨줘야 하는 데, 지금까지 엄청 힘들었을 거야.”
“그래도 이제는 아가씨가 잘 챙겨 주시니 괜찮아요.”
“맞아, 너도 있고.”
“맞아요, 저도 있고.”
웃는 앤을 돌아보며 내가 말했다.
“식사 거르지 않게 챙겨주고, 혹시 누가 괴롭히지는 않는지 잘 봐주고, 간식도 너무 많이 주진 마. 양치 꼭 시켜주고.”
“걱정 마세요. 알아서 다 하고 있으 니까요.”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고마 워, 사랑해.”
“으익!”
놀란 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친하기야 했지만 한 번도 이런 식으 로 진지하게 표현해본 적 없어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앤은 조금 허둥거리다가, 곧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저도요, 아가씨.”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요. 예쁘고 상냥한 아가씨를 만나서 따뜻한 옷 입고, 좋은 식사하고, 북부에 와서 귀여운 공자님도 보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말하는 앤을 잠시 보다가, 나는 화장대 서랍에 넣어두었던 도장을 꺼냈다.
차명인 더글라스 후라네의 도장이 었다.
“자, 너 가져.”
“네? 이걸 왜요?”
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 쓰는 줄은 알지? 처분하고 싶은 땅 있으면 처분하고, 팔고 싶은 상단 있으면 팔고, 그 돈으로 갖고 싶 은 거 있으면 사고 먹고 싶은 거 있 으면 먹어. 예쁜 옷도 사 입고, 남자도 만나 봐. 대신 찌질하고 나쁜 놈은 안 돼.”
“아니, 갑자기 왜…….”
어리둥절해하던 앤이 화들짝 놀라 흠칫했다.
“아가씨, 설마 저 자르시려는 건 아니죠?”
“뭐래. 그냥 고마워서 주는 거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후라네 인 감도장을 저한테 왜요? 아가씨가 앞으로 돈 쓸 일 없는 것도 아니 잖아요. 제도의 이름 있는 화가 부른다고 하 지 않으셨어요? 공자님 초상화 그리게?”
앤은 도무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앤은 아벨과는 달랐다. 언제 고 내가 떠나버릴까 봐 걱정하느라 이런 말에 예민했던 그와 달리, 앤은 곧 있을 내 부재를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그래, 그럼. 그냥 너한테 맡겨두는 걸로 하자. 필요하면 너한테 달라고 할게. 대신 너도 이거 마음대로 써도 좋아. 넌 내 …….”
코끝이 찡해졌다. 여기서 울면 눈치 빠른 앤은 분명 이상하다는 걸 느낄 터였다.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방 긋 웃으며 말했다.
“……제일 소중한 친구니까 말이야.”
***
모든 것을 정리하자 마음은 초연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벨을 보고 왔다. 같이 저녁을 먹지 못한 것, 함께 잠을 자 주지 못한 것을 사과하고 시답잖 은 얘기들을 나눴다.
여전히 불안한 눈치이던 아벨은, 마음을 정리한 이후 퍽 태연한 척하는 나를 보며 의심을 거뒀다.
그를 보고 돌아온 이후에는, 하데스를 내 방으로 불렀다.
아자르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울고 불고 미친 사람처럼 굴었던 나다. 이유를 물을 법한데도 그 이후 하데스는 조용했다.
어째서인지 나를 찾지도 않았기에 하는 수 없이 내 쪽에서 먼저 그를 부른 거였다.
그를 기다리며 나는 내 방 창문으로 보이는 시린 북부의 정경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싸늘하고 고요한 북부의 밤.
모든 형벌의 굴레를 마치고 눈을 감 기에, 지나치게 안성맞춤인 밤이었다.
“왜 불렀나?”
방으로 온 하데스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마치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이라 도 한 사람처럼, 그답지 않게 불안한 표정이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그를 달랬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해요?”
“아하…….”
태연한 내 목소리에 하데스는 곧바 로 표정을 풀었다.
그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앞으로는 보고 싶으니 와달 라고 전해주겠어? 괜히 긴장했잖아.”
“맞아요. 보고 싶었어요.”
순순히 인정하는 내 말에 하데스가 멈칫하더니 헛기침했다.
“그래, 좋은데…….”
“…….”
“밤이 너무 깊어. 장소도 애매하고. 차라리 정원에 나가 산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네?”
갸웃하는 내 얼굴 가까이 제 얼굴을 쓱 들이민 하데스가 웃어 보였다.
“이 야심한 시각에 방으로 부르다 니 너무 야속하지 않나?”
아…….
그의 말뚯을 이해하고 나니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마 분명 붉어졌을 내 얼굴을 바라보며 하데스가 짐짓 뚱한 표정을 했다.
“내가 무슨 성인군자인 줄 알아.”
“아, 제가 생각이 짧았…….”
“아니야. 그런 말 들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
피식 옷은 그가 내 맞은편에 몸을 앉혔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익숙한 포즈 로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치 보고 싶었던 얼굴 마음껏 감상 하라는 듯 여유로운 모습에, 나는 잠 시 지금의 상황도 잊고 웃고 말았다.
“전하, 록사 씨한테 부탁했던 약 말인데요.”
“옹.”
“아마 내일쯤이면 완성될 거예요. 전하가 대신 받아서 가지고 있어주세요.”
내 말에 멈칫하던 하데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벌써 마력이 회복됐다던가? 일주 일은 꼬박 걸릴 줄 알았는데.”
“저번에 대금 얘기하면서, 제가 부탁했어요. 당장 가능한 만큼만 만들 어달라고요.”
“그래?”
하데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 로 어깨를 으쓱하다가 웃었다.
“거 있어 봐야, 누가 나한테 흠집 낼 수 있다고.”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꼭 전하뿐 아니라 공자님이 아플 때도 있을 거예요. 그때 꼭, 약 써주세요.”
“그래, 그러지.”
“그리고 그거 하지마요. 신관도 아니면서 툭하면 상처 흡수하는 거. 전하도 사람이에요. 무적 아니라고요.”
“걱정돼?”
픽 웃는 하데스를 보며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전하가 아프지 않고 오 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하……. 별 걱정을.”
“저기, 전하. 전하가 저번에 그랬잖 아요. 제 부탁은 뭐든 들어주시기 로…….”
문득 무거워진 목소리에, 하데스가 날카로운 시선을 맞춰왔다.
어제 일 이후로 나는 따로 변명하지 않았다. 하데스도 묻질 않았다. 그러 나 우리는 둘 다 알고 있었다.
내게 생긴, 어떤 문제.
역시나 하데스는 그것을 염두에 두 고 있었던지 잔뜩 신경을 곤두세운 얼굴이었다.
가느스름하게 뜬 눈으로 잠시 나를 바라보던 하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샤 에스클리프의 부탁이라면뭐든 들어주기로 하셨어요. 그렇죠?”
“맞아.”
“저, 선물 받고 싶은 게 있어요.”
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하데스는, 다행히도 그 말에 웃었다.
“갖고 싶은 게 있어? 뭐지? 말만 해. 그대가 원한다면 뭐든 가져다주 지.”
그는 꼭 이런 말을 기다렸던 사람처럼 만족스럽게 말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에 나는 푸스스 웃었다.
황후가 되고 싶다 하면 기꺼이 반역이라도 일으켜 황제가 되어주겠다고 할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그래, 그런 선물을 받고 싶다고 말 하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할지도 모르 지.
하지만 지금 내가 하데스에게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죽음.
모두를 평화롭게 할, 안식이지.
내 부탁에 한없이 일그러질 하데스의 얼굴을 상상하는 건 퍽 유쾌하지 못했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일분일초가, 내게는 급하니까.
“우선…….”
“…….”
“아벨을 사랑해주세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 사랑을 듬뿍 받은 기억이, 아벨에게 남아있으면 좋겠어요.”
“뭐 그런…… 당연한 소릴 하고 그 래?”
예상치 못한 아벨의 이야기가 나와 의아한 모양이 었다. 하데스는 의아한 듯 미간을 좁힌 채로 살짝 고개를 기 울였다.
당연한 소릴 하냐는 그의 말이 퍽 믿음직스러웠다.
나는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애가 가끔 무모하게 굴어도 너무 흔내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는 아벨은 절대 바보 같은 행 동 하는 아이가 아니 니까요. 다 이유 가 있을 거예요.”
“그건 그 애의 아버지인 내가 더 잘 알아. 걱정하지마.”
“그리고요. 전하가 바쁘신 건 알지만, 아직 아벨은 어리니까…… 가끔 은 시간 내서 아벨이랑 같이 있어주세요. 아닌 척해도 외로움 많이 타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내 말에 하데스는 의아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침묵하 면서,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전에 들었는데 북부는 너무 황량 해서, 성의 정원 말고는 놀 곳이 없어 아쉽대요. 밖에 나가도 볼 거라곤 얼 어붙은 강이 전부고요. 그러니까, 따 뜻한 남부에 한번 데리고 놀러가 주 세요.”
“…….”
“에스클리프도 나쁘지 않아요. 공 기 좋고 날씨 따뜻해요. 전하도 많이 지치셨을 테니까 아벨 데리고 한번 꼭 다녀오세요.”
“…….”
“그리고 전하는, 너무 일만 하지마 세요. 아벨 때문이 아니라 그냥 전하 가 좀 걱정돼서 그래요. 체력 좋으신 건 알지만 그래도 사람인데 언젠가는 지칠 거예요.”
“…….”
“혼자서도 가끔 정원 구경 나가시고, 피곤하면 다 제쳐두고 잠도 푹 주 무시고, 식사도 거르지 마세요. 집무실에서 대충 때우시는 거 걱정돼요. 아벨이랑 식당에서 꼭, 꼭 챙겨 드세요. 또…….”
“아이샤.”
하데스가 내 말을 자르고 끼어들었다.
그때까지 미처 마주치지 못하고 있 던 시선이 닿았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하데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착각인지도 모르겠는데 말이야.”
“네.”
“왜 그대가 바라는 나와, 아벨의 미래에…….”
“…….”
“……꼭 그대는 없는 것처럼 들리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