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단호한 하데스의 대답에 아자르의 표정이 잠시 멍해졌다.
그는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물었다.
“주군. 제 말이…… 안 믿기시는 겁 니까?”
“아니, 믿지. 네가 아벨 얘기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그냥 그런 능력을 숨기고 있었다고만 해도 난, 널믿었을 거야. 너는 내가 믿기로 결정 한놈이니.”
“예! 그런데 왜요? 그 여자, 암속성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게 확실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하데스가 잠시 말을 멈췄다가이었다.
“왜 그녀를 내쳐야 하는 이유가 되 냐고.”
“……그걸 지금,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그래. 모르겠는데.”
“이런 젠장! 암속성 능력자들은 타 인을 세뇌하는 자들이에요. 꺼림칙한 놈들이란 말입니다. 주군이라고 그 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줄 아십 니까?”
“아니, 그럴 수 없다는 거 잘 알지.”
직접 당해봤으니까.
“한데 그녀가 암속성 능력자라고 해서 그 능력을 남발할 거라는 확신 이 있나?”
“뭐요?”
아자르의 입에서 황당한 웃음이 터 졌다.
“확실히 세뇌라는 능력은 꺼림칙하 지. 한데 그 능력 때문에 무조건 암속성 능력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난 그 건, 잘 모르겠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가 봤을 때 주군은 진작 그 여자한테 세뇌당하신 것 같습니다!”
“나는 지금 아주 멀쩡해.”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아자르가 소리쳤다.
흥분한 그에게는 시선 한 끗 주지 않고, 하데스는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걸음이 천천히 창가로 향했다.
소름끼치게 고요한 북부의 새벽 풍 경은 아이러니하게도 어둡지는 않았다.
절대 녹지 않는 만년설을 품은 산자 락이 빼곡했기 때문이었다.
희미한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설산.
하데스는 꼭, 아이샤가 그것과 닮았 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 차리십쇼, 주군. 암속성 능력자들은 저주받은 자들이란 말입니다. 제가 까막눈이긴 하지만 주워들 은 제국 역사는 알아요. 건국신에게 서 버림받은…….”
“그래, 잘알지. 그런데.”
창밖 너머를 응시하던 하데스의 눈 이 날카로워졌다.
그 빌어먹을 저주.
신이 내렸다는 벌.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나?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리 오래도록 벌을 받 고 있지?
그들이 저지른 죄가 과연, 수많은 전생을 기억하고 그토록 고통스러움에 몸부림 칠 벌을 감내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인가?
하데스 루버몬트는 신을 믿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신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가 반드시 옳다고 믿을 생각 없 었다.
그는 아벨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더 라도 용서할 테다. 혹시 벌을 준다 하더라도, 그 시간은 길지 않겠지.
사랑하는 자식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부모인가?
그의 기준에서는 아니었다.
제국인의 피를 가진 사람이 하기에 는 발칙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데스는 무정한 그들의 ‘아버지’를 이해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놈의 신보다는 내 믿음이 옳아.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빙글 몸을 돌려 선 하데스가 입꼬리를 기울여 웃었다.
“나는 내가 믿기로 결정한 것들을 믿어. 그리고 적어도 그것이, 빌어먹을 신은 아닐 거야.”
***
까무룩 정신을 잃고 난 뒤로는 또 오랜 꿈을 꿨다.
아니, 그게 꿈이 아니라 천천히 하 나씩 기억하는 전생이라는 사실은 이제 확실했다.
여러 번의 생에서 수도 없이 내 자 식을 죽여 왔던 기억.
그것을 맨 정신으로 받아들이기란 퍽 어려워서, 나는 자꾸 깨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피할 수 없는 벌을 받고 있는 거라 지만 어쨌든 나는 명백한 살인자였고그 사실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깨어났을 때는 자기혐오에 휩싸여 괴로웠다.
나 자신이 역겨워 헛구역질을 수백 번 정도 하고, 깨어있다는 사실이 괴 로워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고, 그러면 또 거짓말처럼 잊고 있던 전 생이 떠올랐다.
‘언제쯤 끝이 날까?’
그리 길지 않은 새벽이 금세 끝날 법도 했건만, 수백 번의 전생을 떠올 리는 동안 시간은 참 더디게도 흘렀다.
겨우 창밖이 뿌옇게 밝아올 때쯤 내게는 더 버틸 정신도, 홀릴 눈물도 남 아있지 않았다.
‘아벨…….’
나는 그의 영혼을 죽인 죄로, 신께 끝나지 않는 벌을 받고 있는 저주받 은자식.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피해 가지 못하고 그를 죽이게 될 것이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원작에서 아벨의 죽음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원작대로 다 자랄 때까 지 살아있을 거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아마 원작에서 흐르던 시간에는 내가없었을 테니까…….
지금 이것은 아벨라가 환생할 몸이 었으니, 아마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 그러니까 이그니스의 손에 그 녀는 이미 죽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프로크레아토르.’
나는〈페르소나〉의 작가, 아니, 나 와 이그니스의 끝나지 않는 형벌을 안타까워하며 기꺼이 자신도 함께 버 림받기를 자처한 그를 떠올렸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받는 자식으로남기보다, 형제들을 구원하기를 선택했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알아서는 안 돼. 나는 그래서 많은 것을 숨길 거 야. 」
신의 눈을 피해 그가 해놓은 안배는 어떤 것이었을까?
이곳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고, 그곳에 나를 한 번 환생하게 만들었다.
그가 책으로 써놓은 이곳의 세계를 내게 접하게 했고, 다시 이곳으로 돌 아오게 될 것까지 내다봤겠지.
‘프로크레아토르, 내가 뭘 하면 돼?’
물었지만 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애초에 신의 눈을 피하고자 하였으 니, 그의 입으로 이 형벌의 굴레를 피 할 방법을 내게 알릴 수는 없겠지.
「그러니까 꼭, 네가 알아주기를 바 란다. 」
프로크레아토르, 그는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길 바랄 터였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는걸.’
저쪽 세계에 환생하기 전, 이곳에서의 마지막 삶. 이곳에서의 가장 가까운 전생.
나는 그곳에서 자식의 영혼인 아벨을 지키다가…….
지키다가…….
‘하데스를 찾은 이유는 뭘까.’
나는 하데스를 만나려 했고, 아벨을 부탁했다.
당시 아벨이 머무르고 있던 오비투스가 마수들의 출몰에 혼란을 겪 었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암속성의 능력을 이용해 마수들을 조종했고 결국 하데스를 오비투스로 불러냈으며, 일부러 그에게 목숨을 빚지게 하고 아벨을 맡겼다.
왜 하필, 하데스였을까?
그저 아벨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 그가 강하기 때문에?
안타깝게도 신은, 내가 그것까지 기 억하게 두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분명히 어떤 이유가 있겠 지. 하데스가 그냥 강하기 때문만은 아닐 거야.’
내 부탁을 기 억하고 있었다.
하데스에게 나를 ‘죽여 달라’고 했 었다.
그러나 분명히 그 부탁은 의미 없는 것이었다. 나는 형벌의 굴레에 든 사람이므로.
다시 말해 죗값을 치르기 전에는 그 누구의 손에도 죽을 수 없었다. 나 자신조차도 나를 죽일 수 없다.
전생의 내가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는데도, 어째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데스가 나를…… 죽일 수 있는지도 몰라.’
꽤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하데스는…….’
문득 가스펠 백작이 그를 조롱하려고 가져다줬던 책의 내용이 떠올랐다.
불세출의 천재들.
그들이 전부 요절해버렸던 공통적 인 이유는.
‘……신을 믿지 않기 때문에.’
만약 내 의심이 맞는다면, 하데스를 비롯해 신을 믿지 않는 존재들에게는 어떤 특별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신이 우리에게 내린 형벌의 원칙, 그 제약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데스는, 아벨을 죽이기전에는 결코 죽을 수 없는 나를 죽여,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확실히 아벨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필사적으로 하데스를 찾은 게 아닐까?
나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프로크레아토르는 말했었다.
「아버지가 내린 형벌에는, 유일한 실수가 하나 있어. 」
「너는 자식을 죽이기 전에는 죽을 수 없고, 이그니스는 연인을 죽이기 전에는 죽을 수 없지. 」
이그니스는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 럽기 위해 일부러 연인의 영혼을 찾 아다녔다.
그는 모든 생에서, 최대한 빠르게 형 벌을 마치길 원했으니까.
반대로 나는 죽기 살기로 자식의 영 혼을 피해 다녔다.
어차피 신의 뜻대로 될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알면서도, 내 손으로 내 자 식의 목숨을 거두기가 지극히도 고통스러워서.
‘이그니스의 연인의 몸에 나를 환생시킨 건, 프로크레아토르의 짓이겠지?’
내가 아벨을 죽이기 전까지, 이그니스—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은 무 슨 짓을 해도 나를 죽일 수 없을 테다.
그건 아벨을 죽이지 않기 위해 필사 적으로 시간을 벌 나를 내다본 프로크레아토르의 안배가 분명했다.
내가 아벨라의 몸을 차지함으로써 우리는 그나마 많은 시간을 벌 수 있 게 된 것이다.
아벨의 영혼을 알아본 나는, 그를 죽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버티고 또버틸 테니까.
‘그렇지만 의미 없지. 매 생에서 그를 죽이지 않고자 했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해본 적이 없는걸.’
언제가 됐든.
직접적으로든 다른 외부적인 요인에 의해서든, 나는 아벨을 죽이고야 말 것이다.
항상 그래왔듯이 신은 ‘미래’를 보 여줄 것이고, 그 미래를 피하기 위해 나는 수도 없이 노력할 테다.
미래가 항상 그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나는 자식을 죽이는 미래를 바꾼 적이 몇 번 있었다.
다만 그것조차, 나를 종국에는 좌절하게 만들기 위한 신의 잔인하고도 달콤한 독주였다.
몇 번 성공을 경험하고, 그에 또 희 망을 갖고.
드디어 형벌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진 것인가, 싶을 때에 다시 새로운 미래를 보고.
또 노력하지만 실패하고, 그 아이를 죽이고, 좌절하고 울고 고통스러워하 고 …….
‘그렇지만 만약 이번 생의 내가, 형벌을 치르지 않고 죽게 된다면 어떨 까?’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만약에 성공한다면?
아벨을 죽이지 않고. 이그니스에게 죽임당하기 전에 누군가에게 죽는다 면?
이번 생에서는 나도, 이그니스도 그 형벌의 굴레를 깨뜨리게 되는 것이다.
설마 한 번이라도 그 굴레를 깨뜨리 면, 이 형벌이 끝나는 것인가?
‘프로크레아토르가 찾아낸 방법이, 그거였을까?’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내가죽어야 해.’
이그니스의 손이 아닌, 다른 이의 손에 죽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비로소, 나는 자식을 죽이지 못하고 이그니스는 연인을 죽 이지 못하게 되니까.
‘그래, 그거였어.’
나는 하데스에게서 받아두었던 마력억제제를 꺼내들었다.
무작정 그에게 죽여 달라고 한들, 뜻대로 움직여줄 하데스가 아니었다.
하나 내 몸에 새겨지게 될 명백한 중거.
흑색의 핵석.
그 저주받은 증거를 보여준다면, 하데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내가 소중한 아벨을 죽이고야 말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을 테니까.
아벨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하려고.
그 아이를 지키게끔 하려고.
또,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아마 내가 하데스를 찾은 건, 그것 때문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물도 없이 작은 알약을 삼키자, 작은 목구멍으로 뻑뻑한 이물감이 들어 찼다.
잠시 후, 천천히 몸 안에 휘돌던 마력이 예민하게 날뛰는 것이 느껴졌다.
묶이기 싫어 날뛰듯 요동치던 마력 은 곧 잠잠해졌다.
동시에 나는 왼쪽 손목을 내려다보 았다. 순결해 보이는 백색의 핵석이 어느새 올라와 있었다.
내가 아닌 아벨라의 것이겠지만, 찰 나의 순간 나는 기대했다.
전생을 떠올리고 저주받은 힘을 자 각했음에도 나타나지 않은 ‘증거’.
여전히 백색을 띠고 있는 아름다운 핵석.
그게 내 것이라는 쓸모없는 착각을 잠시 동안 하느라, 미처 느끼지 못했다.
“아 …….”
매 생마다 얻은 몸에서, 지워지지 않는 각인처럼 내가슴에 새겨져있던 …….
“역시나네.”
힘없이 입꼬리가 기울었다.
옷으로 가려진 쇄골 아래쪽이 왜인 지 욱신거렸다. 올라간 손이 천천히 그 위를 더듬었다.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의 핵석 이 만져졌다.
앞섶을 살짝 끌어내렸을 때, 나는 퍽 오랜만에 조우할 수 있었다.
내가 신께 받은 저주받은 선물.
역겨운 어둠을 담고 있는 혹색의 핵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