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울다 탈진해 쓰러진 아이샤를 방에 눕혀두고 돌아온 새벽, 하데스는 잠 들지 못하고 있었다.
지쳐 잠에 든 듯, 울다 힘에 부쳐 정신을 잃은 듯, 아이샤는 눈을 감은 채로도 연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내용들은 대부분 한결같았다.
「용서해주세요……」
「아버지, 제가 잘못했어요. 」
「너무 괴로워요. 그만하고 싶어요. 」
「……행복하고 싶어요. 」
그녀는 무언가를 병적으로 두려워하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들리지도 않을 용서를 빌었다.
하데스는 그녀의 이상한 모습이 분명, 기억하고 있다는 전생과 관련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신에게 벌을 받은 자들.
그리하여 전생을 기억하는 자들.
‘암속성 능력자 …….’
그렇다면 정말, 아이샤는 암속성 능력자인 것인가?
떨며 부르던 그 ‘아버지’라는 것 은…….
‘신?’
그런 것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제국의 역사서 첫 줄에 등장하는 용신 가이오니야.
한 인간에게 수없는 전생의 기억을 심어놓고 괴롭힐 수 있는 그는, 가히 절대자에 가까울 것이다.
신을 믿지는 않았으나 이제는 그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아이샤에게는 그녀의 걱정을 전부 지워주겠노라 약속했지만, 하데스는 도무지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가이오니아를 어떻게 찾고, 전생을 기 억한다는 암속성 능력자들의 저주를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 것인가?
“젠장.”
그늘이 내려앉은 눈가에는 피곤함 이 역력했다. 하나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그때 고요한 침묵을 가르고 기척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놀란 하데스의 시선이 문가로 향했 다가 떨어졌다.
“빌어먹을 놈. 무례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럽지.”
혹시 아이샤가 아닐까 싶었지만, 늦 은 새벽 노크도 없이 제 방을 찾아온 건 아자르였다.
그는 불쾌한 하데스의 표정에도 아 랑곳 않고 휘적휘적 걸어왔다.
몇 번 두리번거리던 아자르가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를 쭉 끌어와 하데스와 마주 보고 앉았다.
“뭐야?”
신경질적인 하데스의 물음에. 가만 히 생각에 잠겨있던 아자르가 입을 열었다.
“그 여자, 수상합니다.”
“또 같은 소리 하려고 왔나? 내가 알아서 한다고 했지.”
피곤한 미간을 문지르며 하데스가 신경질 냈다.
테그롯 산맥에서 토벌을 마치고 돌 아왔던 아자르가 길길이 날뛰었던 이유는, 이미 하데스가 전부 파악한 것 들이었다.
세뇌당한 에스클리프 남작이 암속성 능력자인 대신관 미하일 라이가르트와 내통한 증거.
대신관의 일은 조용히 처리해야 했 기에 아자르에게 사건의 전말을 털어 놓을 생각은 없었다.
하여 대충 알고 있다는 뉘앙스로 그를 달래 보냈는데, 왜 이리 끈질기게파고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전하도 수상합니다.”
“뭐?”
느슨하게 팔짱을 낀 아자르가 몸을 깊숙이 당겨 앉으며 거만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공자님에 대해서, 뭔가 숨기는 게 있으시죠?”
“뭐라고? 뜬금없이 이 새벽에 뭐 하 자는 거야? 아벨이 왜?”
“대체 공자님의 오오라가 왜 보이 지 않을까, 제가 많이 생각을 해봤는 데 말입니다.”
“오오라? 그건 뭔 소리고?”
“5년 전 공자님을 데리고 처음 성에 오셨을 때, 전하께서 열심히 찾으 시던 게 생각나서요.”
“…….”
“무(無)속성 능력자에 대해 조사하 시던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아자르의 지적에 하데스 가 흠칫했다.
아벨의 비밀은 지금 하데스, 그밖에는 알지 못한다.
만약 오비투스에서 아벨을 돌봐주 던 제누스라는 여자가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그녀까지 두 명.
여러모로 주목받을 수밖에 없는 능력이었기에, 아벨이 조금 더 자라 강 해질 수 있을 때까지는 무조건 비밀에 부치려고 했던 것인데.
아자르가 어떻게?
“너…….”
“무속성이니까 오오라가 안 보였던 것, 맞죠?”
“뭐야, 대체?”
“숨긴 건, 아니, 정확히는— 말 안 해주신 건 별로 안 서운합니다. 괜찮 아요. 저도 숨기는 거 있으니까.”
아자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빛 냈다.
그저 힘주어 눈을 뜬 것과는 조금 달랐다.
신비로운 그의 금색 눈동자가, 옅은 촛불 하나가 전부인 어두운 방 안에 서도 유독 밝게 일렁거렸다.
“카지트인들의 축복인 천리안 말입 니다. 제국인의 피가 섞인 제 눈은, 그보다 조금 더 특별한 능력을 가지 고 있습죠.”
특별한 능력?
하데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보통 사람이 아벨의 비밀을 꿰뚫어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아자르가 아벨의 속성을 알아봤다면, 그건 분명 그에게 어떤 특수 한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게 분명했다.
그것이 저 눈인가?
“지금 제 눈에는, 전하가 가진 고유의 오오라가 숨 막힐 정도로 짙게 보입니다. 불을 닮은 적색의 오오라요. 한데 공자님에게서는 처음부터 속성의 오오라라곤 아무것도 안 보였죠.”
“그거 참 신기하군.”
“말씀 안 드린 건 죄송합니다. 어머니께서 이런 건 죽어도 비밀에 부치 라 하셔서.”
“죄송할 거 없지. 그런 특별한 능력을 알려봐야 뭐 하나. 네놈 어머니는 꽤 현명하셨군. 그런데 진작 알아보 지 못하고, 왜 이제야?”
“처음에 만났을 때에야 공자님이 능력을 개방하지 못한 상태셨으니까요. 그때는 속성의 오오라가 보이질 않으니.”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 지, 아벨을 다시 한번 엿본 이유는 뭐 야?”
“화속성의 이능을 개방하셨더라고요.”
“……뭐?”
그 말에는, 조금 놀랐다.
나머지 세 속성의 이능을 개방한 건 알고 있었지만, 어째선지 화속성 능력을 발현하는 데만 더딘 아벨이었다.
그런데 대체 언제?
‘아.’
문득, 루버몬트 정예군이 돌아오고 나서 그들과 함께했던 저녁 식사 자리가 생각났다.
그때 아벨이, 아이샤에게 할 말이 있다고 그랬었지.
‘아니,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아이샤에게 먼저 알리려 했어?’
끙, 소리를 내며 하데스가 이마를 짚었다.
그를 가만 바라보던 아자르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능력 개방이야 언젠간 했을 테 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요. 아무튼 전하처럼 적색의 오오라가 보여야 할 공자님에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길 래 의심하다가, 감이 온 거죠.”
“하아…….”
“제가 왜 제 비밀을, 이 새벽에 여기까지 와서 말씀드리는지 아십니 까?”
갑자기 아자르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가만히 아자르를 마주 보던 하데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아이샤.’
속성에 따른 고유 오오라를 볼 수 있다는 천리안의 능력.
아자르는 분명, 그 능력으로 아이샤를 본거였다.
식당에서 뻰히 아이샤를 지켜보다 놀라던 아자르를 떠올린 순간, 하데스는 바짝 굳고 말았다.
“아이샤 에스클리프, 그 여자.”
“…….”
“암속성 능력자일 겁니다. 확실히.”
아자르의 확신에 하데스는 말문을 잃었다.
그의 말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바 로 이전에 아벨의 비밀을 곧바로 꿰 뚫어보았으니까.
하데스는 떨리는 손을 책상 아래로 내려 감추며 무심한 척 물었다.
“암속성은 뭐, 다른가? 검은 오오라 라도 보이는 건가?”
“아마도 그렇겠죠. 만나본 적이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아이샤가, 정말…….”
“그런데 백속성이기도 합니다.”
“뭐?”
“천리안을 떴을 때 곧바로 그 여자 에게서 보인 건, 주군만큼이나 강한 크기의 백색 오오라였습죠. 전에 만 나본 신전의 신관들이 꼭 그런 색깔의 오오라를 갖고 있었어요.”
“……한데?”
되묻는 하데스의 표정에는 일말의 기대가 어려 있었다.
그래, 아이샤의 손목에 박혀있던 백 색의 핵석을 하데스는 두 눈으로 똑 똑히 확인했었다.
대체 백색의 핵석을 단 제국인이 어 떻게 암속성 능력자일 수 있지?
말도 안 됐다. 심지어 아이샤는 마력을 개방하자마자 백속성의 능력들 도 쉽게 다뤄왔다.
“그 여자의 오오라가 신관들과 달 랐던 점은, 검은빛의 오오라도 분명 히 존재했다는 거.”
하데스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백색의 오오라가 끝나는 지점에서 흑색의 오오라가 보였습죠. 보통 마력 수치에 따라 오오라의 크기는 무 한정으로 뻗어나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자르는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제가 보는 세상은, 거의 전부 시뻘겋게 물들어있어요. 주군의 어마 어마한 마력 수치 때문에요.”
“…….”
“그 여자의 오오라는 최종 개방이 충분히 가능한 수준만큼 뻗어 나와 있었죠. 그리고 그 끝자락은 검게 물 들어있었고요. 이게 뭘 뜻하는지 아 십니까?”
입술을 꽉 문 아자르가 덧붙였다.
“암속성의 최대 개방 능력자라는 겁니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두 개의 빛 이 공존하는 오오라.
아자르는 천리안을 통해 봤던 아이샤의 오오라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 두 가지 속성을 가진 인간은 본적도, 들은 적도 없어요. 암속성 능력자를 직접 마주쳐본 적도 없고. 그래 서 처음 그 여자의 오오라를 봤을 때, 제 눈이 잘못됐다고 생각했습니다.”
능력을 개방한 아벨의 오오라도 보 이지 않았기에, 정말로 처음에는 그 저 착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아벨은 무(無)속성이었기에 능력을 개방해도 그 오오 라가 보이지 않았던 거다. 아자르의 천리안은 거 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새벽, 두 개의 오오라를 가진 아이샤의 정체를 확신할 일도 생기지 않았던가.
“그 여자가, 능력을 사용하는 걸 제 눈으로 봤습니다. 어제 새벽에 촉새 녀석이 밖에 나갔을 때, 가렌 백작과 맞닥뜨렸거든요.”
아자르의 말에 하데스의 눈이 가늘 어졌다.
“그렇지만 가렌 백작은 어제 촉새 녀석을 본 걸 전혀 기억하고 있지 않을 겁니다. 왜냐면 …….”
“그 자리에 아이샤도 있었나?”
“예. 정확히는 저처럼, 둘을 홈쳐보 고 있었습죠.”
아자르의 말에 하데스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록사와 마주친 가렌 백작이 지금까 지 조용한 이유는, 과연 마주친 기억이 없기 때문일 터였다.
그렇게 만든 것이 아이샤라면.
‘세뇌는 아니군.’
눈을 맞추고 명령해야만 대상을 조 종할 수 있다는 암속성의 1차 개방 이능, 세뇌.
그러나 아이샤가 록사도, 가렌 백작 도 모르게 멀리서 능력을 사용했던 거라면…….
‘정신 지배.’
하, 하데스의 입에서 작은 헛웃음이 터졌다.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아자르는, 조금 망설이다가 굳게 결심하곤 말했다.
“위험한 능력입니다. 곁에 둘 만한 여자가 아니예요. 당장 내보내야 할 겁니다.”
“…….”
“주군도 뭔가 눈치는 채셨겠습니다 만, 이런 사실까지는 전혀 모르셨을 거 아닙니까?”
“그래, 그랬지.”
“내보내세요. 주군도, 공자님도 어 떤 세뇌를 당하고 있을지 모르는 거 아닙니까? 무서운 이들이라고요. 암 속성 능력자들은.”
“맞아. 무섭지.”
가만히 두 손을 올린 하데스가 턱을 괴고 생각했다.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에게 처음으로 세뇌를 당했던 순간을.
“무서운 이들이야. 네 말이 맞다.”
“그럼 하루라도 빨리 …….”
“그런데.”
하데스가 아자르의 말을 잘랐다.
왜인지 이상해진 분위기에, 아자르 가 눈을 날카롭게 뜨고 하데스를 직 시했다.
그는 침묵하며 아자르를 마주 보다 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중얼거 렸다.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