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시간이…… 없어?”
“예. 누가 심하게 다쳐부린 건가 싶 었는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무슨 시간?
하데스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초조해 보이던 아이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며 당장 록사에게 회복 물약을 만들라고 한 건, 그냥 한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직접 물어 알아내야지.’
찝찝하게 둘 순 없었다.
하데스가 록사에게 명 령했다.
“아이샤에게 받은 성력은…….”
“내일? 아니, 오늘 새벽이면 다 만 들수…….”
“……가지고 있어. 약으로만들어놓을 필요는 없다.”
“예?”
“귀 먹었어? 만들지 말라고.”
“그게 무슨 소리시지라? 부인께서 당장 내일 달라고 하셨는데예?”
“어차피 아이샤가 쓸 것도 아니었 잖아. 필요하다면 내게 필요한 거 아 닌가? 시키는 대로 해.”
“그건 안 되겠지라.”
“뭐야?”
록사가 품 안에서 수표 한 장을 꺼 내 팔랑팔랑 흔들어 보였다.
“지는 돈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서 라. 돈 주는 분 말을 들어야지라. 지 가 언제 2억 노르트나 만져보겠어 라?”
“두 배.”
“……예?”
샐쭉하니 비아냥거리던 록사가 놀 란 표정으로 굳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하데스가 피 식 옷으며 말했다.
“두 배 주마. 물론 선불.”
“……진심이셔라? 뭐 다른 거 주문하는 게 아니시고예? 그냥 공작부인의 주문을 안 받는 거로 4억? 4억 노르트?”
하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록사가 망설였다. 간절히 부탁하던 아이샤가 떠오르자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하데스가 그를 재촉했다.
“돈으로 움직이는 인간이라며?”
“홈 ……. 하믄.”
품 안에서 주판을 꺼내 튕기던 록사 가 하데스의 눈치를 보며 헛기침했다.
“예, 그라믄 부인께 받은 성력은 일 단 갖고만 있는 걸로……. 하긴, 이런양질의 성력을 지가 언제 갖고 있어 보겠어라? 다 약으로만들어놓기도 아까운 거 아니 겠어라?”
“그리고 당장 떠나라. 여기 있어봐 야 일만 치겠어. 고위급 전령을 붙여 줄 테니 최대한 빨리.”
“그, 그래도 되는 거여라?”
“그래. 그리고 마력은 최대한 아끼 도록. 조만간 또 너를 부를 일이 있을 것 같으니까.”
말을 마치고 하데스는 잠시 침묵했다. 아이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궁금했다.
***
내게는 시간이 없다.
내가 저주받은 암속성 능력자 제누스임을 99퍼센트나 확신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제누스는 수많은 전생에서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고 매번 운명을 피해 가기 위해 발버둥 쳤으 나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누스의 운명은 제누스 그녀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니까.
이곳은 다른 의미로 책 속이 맞다. 제누스에게 끔찍한 벌을 준 신은 전 지전능한 작가나 다름없기에, 그녀의 삶과 죽음, 운명은 모두 그의 손에 달 려있었다.
그렇다면 순응해야 하나?
아니, 내가 어떻게, 내 손으로 아벨을 죽일 수 있겠는가?
매 생에서 발버둥 쳤던 것처럼 이번 에도 그래야만 한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뭐라도 해야 한다.
아벨을 가장 안전하게 만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를 죽이고야 말 운 명인 나의 존재를 아예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운명이 언제 나를 덮칠지 알 수 없 기에 내게는 시간이 없다.
최대한 빨리.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끝마친 뒤에는…….
“영애, 영애!”
“아! 네, 공자님.”
기분 좋은 듯 톤이 높아진 아벨의 목소리에 상념에 잠겨있던 정신이 돌 아왔다.
낮에 하데스의 집무실에서 나오자 마자 내가 찾아간 곳은 아벨의 방이 었다.
우리는 항상 하던 대로 그의 방에서 간식을 먹고, 정원에 나와 시간을 보 냈다. 아벨이 능력을 연습하는 것도 봐주었다.
그 다음엔 옷을 단단히 챙겨 입고 기사 몇 명을 대동한 채 도개교를 넘 어서까지 산책했다. 북부의 명소, 한 번도 녹은 적 없는 강이라는 겔코르누도 구경했다.
물론 오늘의 오랜 산책은 내가 제안한 거였다. 추운 북부의 날씨에도 아벨은 기쁜 얼굴로 촐랑촐랑 잘도 따 랐다.
“겔코르누는 어땠어요?”
“아, 정말 예뻤어요. 꼭 얼음 왕국에 온 것 같았어요. 보여줘서 고마워 요, 공자님.”
“헤헤 …….”
명소 같은 것은 잘 모르고 제안한 성 밖의 산책이었지만, 아벨은 완벽 한 로판 남주답게 데이트 코스도 척 척 찾아냈다.
북부의 날씨 덕에 365일 얼어 있던아름다운 강을 떠올리며 말하자 아벨 이 기분 좋은 듯 배시시 웃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이제 슬슬 식 사하러 가요.”
들어가는 게 아쉬워 호위들을 물리 고 다시 들렀던 정원.
꽉 잡은 손에 힘주며 말하는 아벨에 나는 망설였다. 약간 아쉬운 마음이 었다.
“그래요. 가야죠.”
말을 질질 끌며 망설이는 나를 알아봤는지 아벨이 고개를 갸웃하며 쥐고 있던 내 손에 힘을 줬다.
아무 말, 아무 말이라도…….
“아.”
“…….”
“앤도 같이 데리고 나갈걸. 앤도 예 쁜 거 좋아하거든요. 겔코르누 같이 봤으면 좋았을 텐데.”
“내일 앤이랑 같이 오면 되죠.”
“공자님, 앤이랑도 많이 친해졌 죠?”
“그럼요.”
아벨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가 곧 입술을 삐죽이며 웃었다.
“앤이 매일 제 침대랑 옷이랑 봐주는 걸요. 영애 신경 써주기도 바쁠 텐 데 …….”
“으으음. 그거, 앤이 공자님 봐주고 싶다고 그래서 제가 그러라고 한 거 예요. 원래 공자님 봐주던 하녀들이랑 안 친했다면서요.”
“네. 헤헤…….”
“앤이 있어서 다행이에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 공자님 다음으로 착 하고 다정한 게 앤이거든요. 먹고 싶 은 거 있으면 앤한테 말하고, 힘든 일 있어도 앤한테 말하고 …….”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리다가, 나는 멈칫했다. 갑자기 쥐고 있던 손에 아 플 정도로 힘을 준 아벨 때문이었다.
내려다보니 그는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인지 조금 의아해하는 것도 같았다.
“영애 ……. 혹시 어디 가세요?”
“아뇨?”
“아니죠? 음, 갑자기 어디 떠나려는 사람처럼 말하셔서 놀랐어요.”
“그냥 공자님이 걱정되니까 하는 말이에요.”
“헤헤……. 그럼 다행이고요.”
“아, 또. 할 말 더 있어요.”
“네, 네!”
“혹시 전하께 배운 적 있어요? 마법 쓸 때 말이에요, 제일 중요한 건 정신을 집중하는 거래요.”
“네.”
“공자님은 마법을 네 가지나 쓸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보 다 더, 더 정신을 꽉 잡아야 해요.”
“네!”
“대답만 우렁차게 하는 거 아니죠?”
“아니예요.”
아벨이 배시시 웃으며 내 허리를 끌 어안았다. 나는 그를 마주 안으며 다시 당부했다.
“누가 나쁜 말을 하면 화가 날 거예요. 소중한 사람이 다치면 슬플 거예요. 그렇지만 그럴 때마다 쉽게 동요하면 안 돼요. 그러면 공자님도 아플 지 몰라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은 내 말이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약속해요. 알았어요?”
“네, 그럴게요.”
순순히 대답하는 아벨의 뺨을 한번 쓰다듬어주고 나는 계속 당부했다.
“잘 참아도 아플 때가 올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가 공자님을 위해서 약을 만들어놨어요. 전하께 말해서 갖 고 있으라고 할 테니까, 아플 때마다 꼭, 잊지 말고 챙겨 먹어요.”
“영애.”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아벨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 그가 말했다.
“약이 꼭 필요해요? 그냥 영애가 옆에 있어주시면 되잖아요.”
“공자님이 아플 때 제가 없을 수도 있잖아요.”
“네? 왜, 왜요? 역시, 어, 어디 가시 려는 거죠? 왜 이런 말을 하세요?”
“아뇨, 아뇨. 공자님이 당장 아픈데 제가, 음, 자고 있을 수도 있고, 씻는 중일 수도 있고…….”
대충 변명했지만, 눈치 빠른 아벨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표정을 풀지 않았다.
“정말로 아니예요. 진짜 혹시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
“키 크려면 식사는 꼬박꼬박 해요. 맛없어도 거르지 말고.”
“…….”
“이 썩으니까 간식은 앤이 챙겨주는 것만 먹어요. 먹고 나서는 치카치카 꼭 하고.”
“영애, 왜…….”
“아빠 말, 잘 들어야 하는 거 알죠.”
무릎을 굽혀 아벨과 눈을 맞추며 말 했다. 당황했는지 큰 눈에 금세 물기가 어려 있었다.
“뭐예요, 울지 말아요. 정말로 그냥 공자님이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니까요.”
“그렇게, 그렇게 안 보여서 그래요. 왜 그러지? 왜 …….”
손등으로 눈을 훔치며 아벨은 자꾸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같이 자 주세요.”
당장 내가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았 는지 아벨은 다급히 목을 안고 달라붙었다.
나는 아벨의 등을 토닥여주면서 말 했다.
“응, 그래요.”
“아버지 말 잘 들을게요. 식사도 꼬 박꼬박 하고 간식도 조금만 먹고 치카치카도 안 까먹을게요. 그러니까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어디 안 간다니까요. 공자님은 전하랑 오래오래 행복하고 싶죠? 그러 려면 아플 때 꼭 약 먹어요. 그래야 해요. 알았어요?”
“네, 그럴게요. 근데 아버지랑, 아버지랑 영애도 …….”
“네에……. 당연히 저도 있죠. 저도…….”
아, 울면 안 되는데.
아벨을 안은 채로 나는 시린 눈을 치켜뜨며 흐르려는 눈물을 막았다.
“공자님이랑, 전하 곁에…….”
……있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