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내 말에 록사는 의아한 눈치였다.
“그게 무슨…….”
“그리고 록사 씨도, 마력이 전부 회 복될 때까지 여기 머무르는 게 불안 할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걱정을 그대 로 꿰뚫어보는 내 말에 록사가 흠칫 했다.
그는 어제 가렌 백작에게 이곳에 머 물고 있다는 걸 들켰고, 아직 하데스 에게는 사실을 불지 않은 듯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루버몬트 성을 떠나 자기 은신처로 돌아가고 싶겠지만, 내 부탁 때문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 처지다.
가렌 백작이야 정신 지배에 걸려 록사를 만난 사실을 잊어버렸지만 록사 가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을 터.
지금 록사가 얼마나 초조해하고 있을이지는 뻔했다. 내 욕심 때문에 그를 계속 여기 묶어두는 것도 못할 짓이 었다.
“아직 마력이 다 회복되지 않아서 제가 주문한 만큼은 힘들겠지만, 여 력이 허락하는 한에서만 만들어주셔 도 괜찮아요.”
“지, 지금 당장이예?”
“네.”
“한데 부인, 시간이 없으시다는 말 이 무슨 뜻이지라? 뭐 당장 심각하게 다친 사람이라도 있는 것이어예?”
“자세한 건 묻지 말아주세요. 그냥 한시가 급해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보니까 성력을 뽑으려면 제가 직접능력을 써야 하는 것 같던데 …….”
“예. 회복의 이능을 지닌 물약이라 하셨으니까네, 지한테 함 시전해주시 면 알아서 뽑아보겠지라.”
“고마워요. 아, 맞다.”
나는 드레스 소매 안주머니에 숨겨 왔던 수표 한 장을 꺼 냈다.
“여기서 마차로 쉼 없이 달려서 한 달 반. 그리고 황실 눈이 닿지 않을 만한 곳이면 남부 파르고니아 영지쯤일까요? 록사 씨의 은신처 말이에요.”
내 말에 록사의 눈이 커졌다. 보통사람에 비하면 크게 뜬 것도 아니었 지만 항상 실눈 뜨고 다니는 그의 눈 동자가 보일 정도였으니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입을 헤 벌리고 어버버거리다 가 화들짝 놀라 쓰러지듯 몸을 물렸다.
“저, 정확히 파르고니아인데예. 아, 아무리 부인이시라지만 전하가 함부 로 제 은신처를 말해주실 분은 아닌 데, 어, 어떻게 아셨지라?!”
“전하가 알려준 거 아니예요. 그렇 게 입 가벼운 사람 아니니까 오해 마요. 그냥 한 달 반 걸리는 거리라고 들어서, 유추해봤을 뿐이에요.”
“아니 그걸 …….”
“아무튼 파르고니아라면 더 잘됐네요.”
나는 록사의 손에 수표를 들려주며 말했다.
“그곳에 후라네 상단이라는 데가 있어요. 영주인 후라네 자작님의 직 계 상단인데, 거기 가서 이걸 보여주 면 돈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은행과 수표의 개념이 아직 제대로 확립되지는 않은 제국이었기에 나는 선불 좋아하는 록사가 언짢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사기 칠 거라 고 의심하지는 않는 모양인지 록사는 더글라스 후라네의 도장이 들어간 수 표를 냉큼 받아들었다.
“아, 그런데 당장 만들라 하시면 주 문한 물량은 맞출 수가 없지라. 계산 올다시…….”
수표를 쓱 훑어본 록사는 지불하기 로 했던 2억 노르트가 적힌 금액을 확인했는지, 입고 있던 옷 안에서 또 주판을 꺼냈다.
나는 다시 주판을 튕기려는 록사의 손을 잡아 말렸다.
“상관없어요. 처음 약속했던 거니 까 전부 그대로 지불할게요.”
“예에?!”
“왜요? 많이 벌면 좋은 거 아니에 요?”
“그렇긴 하지마는, 전하가 부인에게 바가지 씌웠다고 지한테 뭐 라…….”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요.”
웃으며 말했는데도 록사는 선뜻 돈을 전부 받기가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내가 처음 봤던 수전노다운 모습 과 퍽 달랐다.
쓸데없이 돈 낭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하데스를 도울 주요 한 인물에게 쏟아 붓는 돈이 아까울 리 없었다.
뭐, 열심히 모아둔 돈이 제국 쌈 싸 먹고도 남는데, 이걸 전부 쓰고 죽을 만큼 내게 시간이 많이 남지도 않은 것 같고…….
“그렇게 마음 쓰이면, 차액은 잘 달 아뒀다가 좋은 데 써주세요. 돈은 없 는데 록사 씨의 약이 절박한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잖아요. 그때 너무 모 질게 굴지 마시고.”
“아 …….”
록사는 내 말에 잠시 멍해졌다가, 곧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예, 글믄…….”
“네. 지금 바로, 하면 되죠?”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하데스가 당장 서재 문을 박차고 들어오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 나는 곧바로 록사에게 바짝 얼굴을 붙였다.
흠칫 놀란 록사가 또 화들짝 놀라며몸을 물렸다.
“오메, 깜짝아! 부, 부인. 지가 노총 각이라가……. 미인이 이렇게 혹 들 어와 버리시면 당황스러워가지고 예…….”
“미안해요. 그렇지만 이렇게 안 하 면 정신 집중이 잘 안돼서요.”
“아니, 홈, 예…….”
알아들었다는 듯 록사가 다소곳이 무릎 꿇고 앉았고 나는 허리를 굽혀 그와 이마를 맞댄 뒤 정신을 집중했다.
파르넬리 공저에서 신관들에게 세례 받았던 것처럼, 나는 록사에게 회 복의 이능을 시전했다.
잠시 후 내 주위에는 하얀색 오오라 가 짙게 떠올랐고, 그것은 곧 록사의 손바닥 위로 모여들어 작은 마력구가 되었다.
미처 모이지 못한 오오라들이 남아 있었으나 금세 사라졌다.
이마를 떼자 록사가 조금 놀란 얼굴 로 말했다.
“부, 부인. 지가 신관들 몇 명을 만 나본 적이 있기는 한데예…….”
“네.”
“부인에 비하면 신관들은 어린아이 가 붕대 감아주는 수준이겠는데예? 진짜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준의 마력치여라. 대단하시지라.”
500년 묵은 성녀의 몸에서 나온 성 력이니 당연하지. 뻔한 칭찬은 내가 들을 것도 아니 었다.
나는 그냥 한번 웃고 물었다.
“이제 끝난 건가요?”
“예. 한디 지가 지금 이거를 전부 뽑을 힘까지는 없어서 가능한 만큼만 가져왔어라.”
“네, 그걸로도 괜찮아요.”
“그란디 처음 만드는 데다가 물량 도 좀 되어서 하루 정도는 계산을 해 야할 건디…….”
“아, 그래요?”
예상 못 했던 딜레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초조해할 일은 아니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 지가 않다.
내가 정신 지배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한 이후로는 정말 일 분일초가 두렵고 아까웠다.
그래도 약이 뚝딱하면 나오는 게 아니라 하니, 억지로 록사를 채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 었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알겠어요. 내일 다시 올게요.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록사 씨 도 무사히 돌아갔으면 좋겠네요.”
“신경 써주셔서 대단히 감사하지 라.”
방긋 웃으며 수표를 품 안에 넣는 록사는, 역시 수전노 캐릭터에 퍽 충 실한 스타일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한 번 더 남겨놓고 나는 하데스의 서재를 나섰다. 여전히 불퉁한 표정으로 밖을 지키고 선 하데스가 있었다.
“다 끝났어?”
“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뭐? 벌써?”
“왜요?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 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아마도 하데스는 기왕 온 김에 내가 더 있다가 갔으면 하는 눈치였지 만…….
“음, 이따가 공자님이랑 산책하기로 해서요. 씻고 준비 좀 하게 먼저 가볼게요. 저녁식사 할 때 봐요, 전하.”
지난 새벽 가렌 백작에게 정신 지배를 건 뒤로 나는, 시간제한이 걸린 생 존 게임을 시작한 기분이었다.
물론 플레이어인 내 생존을 쟁취하는 게임이 아닌, 아벨과 하데스의 생존을 따내야 하는 게임.
당장 마력억제제를 먹고 내 정체를 확신한 뒤 하데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그 전까지 준비해야 할 것은 전부준비해두어야 했고.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마음이라 아 쉬워도 어쩔 수 없었다.
약간 서운해하는 눈치인 하데스를 두고, 나는 급히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
아이샤는 한 번도 이유 없이 제 얼굴이나 보자고 방이나 집무실을 찾은 적 없었다.
그 사실을 상기해보니 약간섭섭하 기도했지만, 아무튼 하데스는 집무실을 찾아와 용건 없이 돌아간 아이샤가 약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록사의 일을 물었던 것도 그랬다. 뜬금없이 별일 없냐는 질문이 의아했 지만 그때에는 더 묻지 않았다.
왜 왔을까?
고민해보니 답은 하나였다. 집무실 주인인 자기가 아니라 서재에 머무는 록사를 보러 온 게 틀림없었다.
그럼 이유는, 아이샤가 말했던 대로 거래 대금 때문에?
‘아니지. 날 바보라고 생각하는 거 야, 뭐야.’
하데스는 어제와 달리 아주 조금 미 묘해진 아이샤의 분위기를 날카롭게 엿봤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조금 초조한 눈치였다. 마치 뭔가 일을 저 지르고 숨기는 사람 같았달까.
‘정말 말 못 할 잘못이라도 저질렀 나.’
모르고 황제 목이라도 땄다고 한들 사실대로 말하면 못 도와줄 것도 없 는데…….
아무튼 물어봐야 순순히 불 성격도 아닌지라, 하데스는 일단 아이샤를 돌려보내고 곧바로 서재에 들어와 있 었다.
하데스와 마주 본 채 록사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뭐, 뭘 …….”
“말해.”
“뭘 말이시지라?!”
“이 자리에서 목 떨어지고 싶은 거 아니면 바른대로 말해라. 뭐 숨기는 거 있지?”
“히익!”
돈에 미친 수전노답지 않게 록사는 표정 관리가 잘 안 되는 타입이었다.
가느스름하게 눈 뜨고 위협적으로 이를 가는 하데스 앞에서, 조금 망설 이던 록사가 냉큼 무릎 꿇었다.
“실은 어제 밖에 나갔을 때 마주쳐 버리고 말았지라!”
“……뭐? 누굴?”
“자, 잘 모르겠어라. 얼굴만 어렴풋 이 기억나는 분이신디……. 전하 가신들 중에 한 분이었던 걸로…….”
“뭐야?!”
놀란 하데스가 소리치자 록사가 질끈 눈 감고 몸을 움츠렸다.
“그런데 왜 아자르 녀석이 내게 말을 안 했지?”
이어서 중얼거리는 말에 록사가 갸 웃했다.
“그 불멧돼지가 어찌 알고 전하께 말을 하지라?”
“알 거 없고. 어떻게 생겼는데?”
“금발에 풍채 좋으신 그…….”
가렌 백작이었다. 하필.
“걸려도 꼭.”
한심한 듯 혀를 차는 하데스를 보며록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하데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국가적 범죄자인 록사와 내통한 걸 가신에게 걸린 상황이지만, 어떻게든 제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데스가 알고 싶은 건 아이샤가 록사를 보려 했던 이유였다. 단순히 대 금 거래 때문만은 아닐 게 확실했다.
“그거 말고 다른 것도 불어.”
“다, 다른 거예? 다른 거 뭐 없는 디…….”
“아이샤.”
“예?”
“아이샤랑 무슨 말했어?”
“암 말도안했지라.”
“아, 그랬군.”
하데스가 방긋 웃었다.
다행히 그대로 넘어가나 싶어 마음 놓았던 록사가, 어쩐지 후끈한 열기에 슬쩍 고개를 틀어보았다.
“아아아악!”
열심히 관리하고 있는 결 좋은 머리 카락 끝에 불씨가 붙어 있었다.
“마, 말할 거지라! 알겠어라! 이것좀!”
“말하면 꺼주마. 하기 싫으면 안 해 도 되긴 해. 네놈 머리 기르고 다니는 꼴이 영 마음에 안 들었거든. 이 기회에 시원하게 밀어보는 건 어떠냐.”
“무, 물약 빨리 만들어달라고 하셨 어라! 당장 성력을 뽑아가라기에 그 렇게 했지라!”
빽 소리치는 록사에 잠시 생각하던 하데스가 손가락을 퉁겼다. 불씨가 사그라졌고 끝이 조금 탄 머리카락만 남았다. 록사가 울상 지 었다.
“진짜 대악마…….”
“그게 다야?”
“그럼 뭐가 더 있겠어라?! 대체 뭘 의심하시는 건데예?”
“별일도 아니구만 왜 곧바로 말을 안 해?”
“저도 별일 아닌 것 같은데 굳이 부인께서 전하께는 말하지 말라셔서 이 상했지라.”
“나한테 말하지 말랬다고?”
“예. 그냥, 이유는 모르겠는데 엄청 급해 보이셨어라. 누구 다쳤어예?”
급해 보였다.
확실히, 하데스가 보기에도 그랬다.
생각에 잠긴 하데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록사가 덧붙였다.
“시간이 별로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