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하데스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곧 백작에게 말했다.
“아무튼, 몰랐는데 세법이 개정됐 다니 다행이군. 영지 수입에 따라 세 율에 차등을 두기로 당장 영지법을 개정하겠소. 세무 조사는 백작이 원 하는 대로 한번 전체적으로 내보내는 걸로 하지. 그리고 문제가 없다면, 작년과 차년의 미징수 세금은 깎거나 감면하는 방향으로.”
똑똑한 하데스는 순식간에 일처리를 마쳤다.
백작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곱씹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그리고 말이야.”
방금까지 진지했던 표정의 하데스 가 갑자기 자의식 넘치는 얼굴이 되 었다.
그는 턱을 치켜들곤 백작을 내려다보며 한마디 했다.
“영애를 가르치겠다고 아주 벼르고 있더니 뭔가? 재계의 일인자라는 타 이틀이 좀 부끄러워지는데? 제국법 개정된 것도 몰랐어?”
“아, 그건…….”
백작은 당황하며 헛기 침했다.
“그런 중요한 개정 사실을 공표도 안 하고, 참…….”
괜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구시 렁거리는 백작을 보며 하데스는 승리 자의 표정을 지었다.
“내가 봤을 때 배워야 할 건 이쪽에 서 이쪽이 아니라, 이쪽에서 이쪽인 데?”
얄밉게 웃으며 하데스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르고 백작을 놀렸다.
“누가 누굴 가르쳐?”
네가?
풉!
……딱 그런 표정이, 얼마나 얄밉게 보이던지.
나는 어두워진 낯빛의 백작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전하도 모르셨잖아요. 황실이 아 주 작정하고 조용히 한 줄 추가한 법인데, 매일 법전 찾아 정독하는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알아요.”
“그으대는 알았잖아아?”
“저도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아무 튼, 백작님이 제국에서도 인정받는 재계의 거물이시라는 거 저도 알아요. 시골에 틀어박혀 지낼 때도 라즐리 백작님의 이름은 알고 있을 정도였는 걸요.”
내 칭찬에 백작은 눈을 피하며 헛기 침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돈놀이와 땅따 먹기 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이름이 바로 루버몬트의 가신으로 있는 ‘데인 라즐리’ 백작이었으니.
사업 수완도 좋고 영지 경영도 잘하고, 새로운 시도도 마다하지 않는 그 야말로 명민한 거부.
지금 아벨과 나이대가 비슷한 라즐리 백작의 아들도 그의 뒤를 이어 제 국의 돈줄을 틀어쥔 최고의 재력가로 성장하니, 분명 루버몬트에는 필요한 인재인 것이다.
친하게 지내 나쁠 거 하나 없는 인 물. 나는 최대한 예의바르게 말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이 많으니 앞으 로도 잘 부탁드려요. 기꺼이 배울게요.”
담백한 인사에 백작은 잠시 나를 옹 시하다가, 곧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 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에스클리프 영애.”
***
백작이 돌아가고 하데스의 집무실에 단둘이 남아, 나는 그가 직 접 작성 한 서류들을 더 구경하고 있었다.
더글라스 후라네로 있을 때는 이렇 게 체계적으로 영지의 재정 상태를 관리하진 않았기에 익숙하지 않은 부 분이 많았다.
생소한 단어가 보여서 몇 번 물었고 그때마다 내 옆에 앉은 하데스는 퍽 친절하고 다정하게 설명해줬다.
열심히 서류를 구경하다가 문득 진 득한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하데스가 옅은 미소를 걸친 채 나를 빤 히 응시하고 있었다.
거만한 포즈는 한결같았다.
착 다리를 꼰 채 팔걸이에 턱을 괴곤, 다른 손으로는 내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대느라 여념 없었다.
“왜 그렇게 봐요?”
“못하는 게 없어? 응?”
“네?”
내게 하는 말인 모양이 었다.
“제가 뭘 했다고요. 진짜 뭐나 하고 이런 말 들으면 부끄럽지도 않겠네.”
“라즐리 백이 그대에게 한 방 맞고 얼빠진 표정 짓던 거 못 봤어?”
하데스는 고소하다는 듯 큭큭 웃었다.
“너무 뭐라 하지마세요. 가신들이 잔소리가 많긴 하지만 다 전하랑 루버몬트를 생각해서 그런 거잖아요. 충성심은 의심할 수가 없죠.”
“알아, 알아. 그러니까 잔소리 듣기 싫어도 들어주는 거지. 그런데 말이야, 아이샤.”
하데스가 갑자기 바짝 의자를 당겨 거리를 붙여왔다.
코가 살짝 스칠 정도로 얼굴까지 들 이민 하데스 때문에 나는 흠칫 놀랐다.
“왜, 왜요?”
“그대가 말한 그, 영지민들을 안타 까워하는 착하고 능력 있는 젊은 이…… 말인데.”
아.
“그거 …….”
“네, 네…….”
“……그대의 후원자인 더글라스 후라네 자작 말하는 거 맞지?”
예, 예리해!
흠칫 놀라서 표정관리 할 시간도 없 었다. 허를 찔린 듯한 내 얼굴에 하데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코앞까지 다가온 거리에서 눈 살을 꿈틀거리며 빤히 나를 응시하다 가, 곧 몸을 물려 의자에 깊게 기대어 앉았다.
뭔가 생각하는 듯 턱을 쓰다듬던 하데스가 말했다.
“어떻게 제국법 개정을 요구할 생 각을 했을까? 탄원서라도 넣은 건 가.”
아니,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대체 저런 건 어떻게 추리하는 거지?
그저 젊은이의 노력을 알아달라고 말했을 뿐인데, 탄원서를 넣고 제국법을 개정시킨 일련의 과정까지 다 꿰뚫어봤단 말이야?
사람이 뭐 이렇게 예리해?!
“돈으로 산 자작위 내세우면서 탄 원서 들이밀기 힘들었을 텐데 놀랍 군. 생각보다 배짱 있는 인물인가 봐.”
“음, 크홈, 뭐…… 그런 편이죠.”
“으음…….”
그는 왜인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계속 생각하다가, 말 했다.
“한번 연락해. 성에 초대를 하는 게좋겠어.”
“네?! 갑자기 왜요?”
“갑자기라니? 당연한 거지. 오히려 좀 늦은 감도 있군.”
허공을 노려보며, 하데스는 퍽 무시 무시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나, 내 아내의 가문을 후원해준 고 마운 이에게 대접하는 도리쯤은 아는 남자야.”
말을 마치며 빙긋 웃는데 전혀 고마 운 사람에게 대접할 생각으로 초대할 표정은 아니어 보였다.
무서운 사람.
더글라스 후라네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서 진짜 다행이다.
“꽤 다정하기도 하고 …….”
“뭐, 뭘? 어딜 봐서요? 후라네 자작 님을 만나본 것처럼 말하시네.”
“맞지. 영지 사정 봐주려고 탄원서까지 보내기가 어디 쉽나? 그 지위 로.”
“어음, 네…….”
지금 그 더글라스 후라네가 칭찬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하데스…….
“그대에게도 다정했겠네, 응.”
“뭔…….”
문득 이 상황이 웃겨서, 중얼거리는 하데스의 어깨를 딱 치곤 말했다.
“전하가 더 다정해요.”
“내가? 내가 뭘?”
“봐요. 라즐리 백작님께 잔소리 들을 걸 알았으면서도 이렇게 영지 사 정 봐주셨잖아요. 역시 전하는 생각 했던 거랑 전혀 다른 분이라니까요.”
내 말에 하데스의 눈썹이 구겨졌다.
아니, 칭찬을 해 줘도 왜 저런담.
“대체 날 뭐, 어떻게 생각했길래 그러는 거지?”
“어떻게 생각하긴요. 솔직히 전하 소문이 그렇게 썩 좋진 않았죠. 365 일 24시간 북부 마수들 때려잡고 다 니느라 마수랑 인간이랑 구분 못 할 지경까지 됐다고 막. 사람도 마수처럼 이렇게 쓱! 싹!”
목 긋는 시늉을 하며 말하자 나를 빤히 보던 하데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틀린 소문만은 아닌데?”
“네, 알아요. 그래서 처음에 얼마나 긴장했다고요. 따라다니던 거 걸렸을 때, 저 그 자리에서 전하한테 죽는구 나 싶었다니까요.”
“하하……!”
“그런데 정말.”
이건 진심이었다.
“생각만큼 무서운 분은 아니었어요. 전하만큼 다정한 사람 없을걸 요?”
“잘못 봤어. 나 그렇게 다정한 사람 아니야. 만약 그대가 그렇게 생각했 다면 그건…….”
잠시 고민하는 것처럼 미간을 좁히 던 하데스가, 나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그대에게만 특별한 거라고 해 두지.”
“어머.”
자기가 남긴 멘트가 퍽 마음에 드는 지 하데스는 하하 소리 내면서 웃었다.
과연 자의식 넘치는 남자다.
“아, 것보다 전하.”
한참 만족스럽게 웃는 하데스를 보 던 중에, 집무실을 찾았던 이유가 뒤 늦게야 생각났다.
“록사 씨는 …….”
록사가 숨어있는 서재 쪽을 힐끔 쳐 다보며 운을 떼자 하데스가 한쪽 눈 썹을 쓱 올리며 물었다.
“록사가 왜?”
“별일 없었나요?”
“별일?”
말 안 한 건가?
아무래도 하데스는 어제 새벽에 록사가 가렌 백작을 마주쳤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다.
대놓고 걸렸으니 당연히 당황해서하데스에게 알렸을 줄 알았는데……. ‘혼날까 봐 무서워서 말 안 했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사실 하데스를 찾기 전 약속했던 대 로 나는 아벨과 가렌 백작의 방을 찾 아 그의 상태를 확인했었다.
내가 푸는 와룡선생 제갈량의 일대 기를 흥미로운 눈으로 들으며 흥분하 던 가렌 백작은. 새벽의 일을 전혀 기 억하지 못했다.
정신 지배가 먹혀들어간 게 확실했다.
“마력이 회복됐나 하고요.”
“아직은 일러. 조금 더 쉬어야 할 거야.”
“네. 록사 씨 얼굴 한 번만 보고 가 면 안 될까요?”
“뭐,안 될 거 없지.”
“감사합니다.”
나는 하데스에게 인사하곤 서재 쪽으로 걸었다. 곧바로 뒤를 따라오는 하데스의 기척이 느껴졌다.
내가 돌아보며 물었다.
“같이 들어가시게요?”
“뭐? 그럼 남녀가 유별한데 저 좁은 방 안에 그대랑 사내새끼를 단둘이 두란 말이야?”
“별……. 돈 거래 문제로 록사 씨랑 단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전하는 여기 계세요. 어떻게 자기 사람들도 못 믿어서 그런 말을 한담? 록사 씨가 들으면 정말 서운하겠다.”
록사에게 급하게 할 말이 있었기에 하데스가 따라 들어오면 곤란했다.
다행히도 황당하다는 듯 내가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하데스는 움찔하며 고민하다가 서재 문 옆 벽에 등을 기 대고 서서 말했다.
“빨리 하고 나와.”
“네, 네. 얼마 안걸려요.”
별 걱정을 다 하는 하데스에게 빙긋 웃어주고 나는 서재로 들어섰다.
멀지 않은 곳에 록사를 위해 마련해 둔 듯한 침대 하나가 있었고, 그는 그 위에 벌겋게 충혈된 눈을 하곤 모로 누워 있었다.
내 방문에 화들짝 놀란 록사가 후다 닥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무릎 꿇고 앉았다.
“부, 부인!”
과한 몸짓에 어색하게 웃은 내가 가 까이 다가가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요 없어요. 몸은 좀어때요?”
“모, 몸이예? 아아……. 저, 전하가 신경 써주신 덕에 마력은 빠르게 회 복하고 있지라. 한 사흘 정도면 부인 께서 주문하신 물약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록사 씨.”
사흘.
사실 지금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상당히 초조했다.
이빨 수십 개 달린 마수가 당장 등뒤를 바짝 쫓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 러니까, 한시가 아깝고 급박하다는 말이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저랑 록사 씨 만 알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무슨?”
고개를 갸웃하는 록사와 눈 맞추며, 내가 말했다.
“내가 지금, 시간이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