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예?”
미간을 좁힌 백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 있는 영지 목록들은 전부 완 벽하게 분류되어있는 것 같아요. 물론 제 기준에서요.”
“그게 무슨 말이신지요? 아까 하려 던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요? 사정을 헤아려 미징수금 넘쳐나는 영지라도 봐주셔야겠다고?”
“네, 적어도 작년과 차년은 그렇게 해 야 한다고 봅니다.”
“그게 바로.”
백작은 지지 않고 눈에 힘주며 말했다.
“주먹구구식의 영지 관리랍니다, 영애.”
라즐리 백작, 그는 바보가 아니다. 수많은 사업에 성공했고 돈의 흐름에 눈이 밝아 재계의 거물로 손꼽힐 정 도다. 그런 사람이 멍청할 리 없잖은 가.
내가 알아본 사실을 백작이 알아보 지 못했을 리 없다. 백작은 하데스가 일일이 영지의 사정을 봐줬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의 기준에서는 이런 식으로 영지를 관리하는 것이 마땅치 않을 뿐이었다.
‘둘다 이해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당장 자기들 입에 풀칠할 수도 없는 데 정해진 세금을 지불해야 한다?
굶어 죽는 것과 위법하지 않는 것중 하나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배는 채운 범법자로 살겠다.
졸지에 탈세자가 되어버린 중부 지 역의 수많은 영지민들에게 측은함을 느끼지 못하고 냉정하게 굴었다면, 나는 오히려 하데스에게 실망했을 거다.
그렇다면 그들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라즐리 백작이 너무나도 인간 적이지 못한 사람인가?
그건 또 아니었다. 백작은 ‘제국 법’에 따라 원칙적으로 행동할 뿐이 었고, 그건 백작뿐 아니라 영지를 가 진 제국의 모든 귀족들도 마찬가지다.
이건 근본적인 문제를 고치지 않으 면 해결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바로, 여러 사정을 고려해주지 않고 영지마다, 그리고 개개인마다 차등 없이 세율을 부과하는, 아주 이상한 제국법 말이다.
물론〈페르소나〉에서는 이런 재미없는 얘기 안 나와서 몰랐다. 여기서 환생하고 돈 모으다 안 거였지.
“백작님의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이 어떤 부분인지는 저도 잘 알겠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근본부터 해결 해야겠어요. 부족하지만 제가 전하와 백작님 두 분 모두 만족할 수 있을 만한 해결책을 제시해 봐도 될까 요?”
백작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보지요.”
“뭐 이렇게 건방져…….”
샐쭉하니 말하는 백작에게 듣고 있 던 하데스가 바로 핀잔줬다.
나는 곧바로 말했다.
“제국의 세법에는 문제가 있어요.
매년 나라의 총 소득을 계산한 뒤에, 세율을 정해서 그대로 모든 영지에 적용시키잖아요. 잘 나가는 영지가 돈 좀 벌었다? 그러면 전체 국가 소 득이 늘어나서 일 년 전에는 10퍼센트였던 세율이 20퍼센트 되는 일도 혼하죠.”
“예, 그렇지요.”
“그런데 제국엔 부자 영지만 있는 게 아니예요. 잘 벌다가도 작년이랑 올해처럼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일 년 농사 망할 수도 있는 거고요. 그런 영지는 돈 나올 구멍도 없는데 그 많 은 세금을 어떻게 감당하라는 거죠?”
백작은 콧수염 끝을 살짝 만지작거 리며 이어지는 내 말을 가만히 들었다.
뻔한 소리를 할 거라 생각했는지 그 다지 흥미 있는 표정은 아니었다.
“일억 노르트 번 영지민은 천만 노르트 세금 내고 구천만 노르트로도 충분히 살 수 있겠지만, 백만 노르트 번 영지민은 만 노르트짜리 지폐 한 장도 아까운 상황에 십만 노르트나 세금으로 지불하고 굶어 죽을까 걱정 해야 해요. 문제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백작에게 묻자, 그는 천천히 고개 저었다.
“그런 사정을 일일이 봐줄 수는 없 습니다. 제국에는 수백 개의 영지가 있고, 영지민들의 소득은 매년 달라 질 수밖에 없지요. 그걸 전부…….”
“……헤아려줘야 하는 것도, 지도 자의 덕목이에요. 전하는 그렇게 하 셨잖아요.”
밤을 새워가며 만들었을 서류들을 가리키며 내가 말했다.
“사정도 안 봐주고 무작정 높은 세율을 때리는 나라에서 누가 열심히 일하고 싶겠어요? 나라를 먹여 살리는 건 영지민들이에요. 멀리 봐야죠. 그들의 고생을 인정하고 가능한 만큼 배려해주면 능률도 오르는 법이에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다는 말씀 이십니까? 제국법이 그런데, 제국인 으로서 법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 고 …….”
“그건 걱정하지마세요!”
나는 방긋 웃으며 딱 손뼉 쳤다.
“작년 연초에 제국법 개정이 있었답니다. 제국법 8조 소득세 2항, 납 세의 의무에 관한 법률. 개인의 사유 영지와 관련한 자율적인 세율 조정을 인정한다.”
다시 말해 루버몬트 소유의 영지는, 하데스의 마음대로 세율을 부과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내 말에 백작도, 하데스도 놀란 눈 치였다. 백작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예? 제국법에 그런 조항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그런 법 개정이 있었다 면 제가 모를 리가…….”
“모르실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개 정은 했는데 황실에서 공표하지는 않 았으니까요. 작년이면 개정된 지 얼 마 안 되기도 했고 …….”
“아니, 그런 법을 공표하지 않았다 니 대체!”
“황실 입장에서는 도의적인 차원에 서 옳은 방향이 라고는 생 각하니 법을 개정했겠죠. 그렇지만 내키지는 않았을 거예요. 황실 소유 영지에는 원래의 제국법을 계속 적용시키고 싶으니 까요.”
법은 개정했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모르게 조용히 법전만 수정해놓은 황실의 작태.
그게 황당했는지 하데스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확실히 …….”
“…….”
“영지 좀 있는 귀족들이 영지민들 사정 봐주며 세금 걷으면, 황실도 눈 치를 안 볼 수가 없겠지. 결국 자기들 도 영지 사정 봐주게 되는 게 싫었던 거군.”
“맞아요.”
모든 영지에서 차등적으로 세율을 부과하면 당연히 영지민들의 숨통이 트일 테니, 황실 소유의 영지에서도 말이 나올 것이다.
우리도 사정 좀 봐주세요, 하고 영 지민들이 목소리를 내면 황실은 그걸 무시할 수만은 없겠지.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놀랍군요. 그런데 공표하지도 않을 법을 애초에 왜 개정한 것인지?”
“아, 거기에는 엄청 눈물겨운 사연 이 …….”
나는 괜히 시려오는 코끝을 훔치며, 막 돈 모으기 시작하던 시절의 일을 떠올렸다.
곧 노다지가 될 주인 없는 작은 영 지 몇 개를 헐값에 매입하면서 시작된 내 돈놀이.
당연히 노다지 되기 전에 그곳 영지 민들은 가난에 허덕였다. 수입은 없 는데 매년 부과되는 과한 세금에 영 지민들은 하루걸러 한번씩 앓는 소리를 냈다.
당시에 내가 살피던 영지에서 영지 민 한명이 생활고에 자살기도를 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나는 취업 준비하며 자소서 준비하 던 스킬을 발휘해 황실에 영지법 개 정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냈다.
물론 처음에는 아주 간단히 무시당 했다. 황실은 평민 출신의 이름 없는 하위 귀족 더글라스 후라네의 탄원서 따위 읽어줄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집요 함에 더러워서라도 읽어주길 바라면 서 계속 보냈다. 진짜 보다, 보다 정신병 걸릴지도 모를 수준으로 보냈다. 스물세 번까지 세다가 말았는데 적어도 오십 번은 채웠을 거다.
과한 세금과 생활고에 자살기도를 한 영지민의 사연, 영지법 개정으로 제국이 얻을 수 있는 이점, 도의적인 차원에서의 호소 둥둥.
도저히 황실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만든 탄 원서.
아마 장담하건대 자소서를 그렇게 썼으면 한량 백수도 대기업에 무난히 취직시킬 수 있었올 것이다.
아무튼 그마저도 재차 읽고 씹힘 당 하다가 스물세 번째에는 겨우 답신을 받았는데 거절.
한미한 자작위로 뭘 더 해볼 수 없 었기에 다음 탄원서부터는 약간의 협 박을 가미했다.
대충, 황실의 의견은 잘 알겠으나 영지법 개정은 꼭 필요하기에 나 더글라스 후라네는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고위 귀족들과 이 사실을 논 의해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도 협박은 잘 먹혀들어갔다. 별 거 없는 놈이긴 한데 수십 장의 탄원서를 집요할 정도로 넣는 의지가 대단하니, 고위 귀족을 찾아가겠다는 협박이 그냥 말이 아님을 깨달았겠 지.
결국 황실은 조용히 소득세법 2항에 코딱지만 한 글씨 크기로 한 줄을 추가했고 당연히 공표하지는 않았다.
뭐, 그건 좀 마음에 안 들었지만 당장은 그것도 큰 성과였기에 만족하고 물러났다.
그 이후 나는 내가 사들인 영지의 사정들을 좀 봐줄 수 있었고, 그래서 인지 노다지 영지들은 원작에서 읽었 던 것보다 훨씬 빠른 기세로 성장해 내게 짱짱한 덕질 자금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왜 울어?”
상념에 잠겨있던 내게, 하데스가 고 개를 기울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이런.
더글라스 후라네의 법 개정을 위한 처절한 노력을 상기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던 모양이다.
“아니예요.”
이걸 구구절절 다 말할 수야 없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내 노력들을 짧게 일축했다.
“제국법의 맹점에 고통받는 영지 민들을 안타까워한, 어떤 착하고 능력 있는 젊은이의 피나는 노력이 있 었다는 걸…….”
의아한 표정의 하데스와 백작을 향 해, 나는 시큰거리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말했다.
“……꼬옥 좀, 알아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