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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92화 (92/221)

92화.

사실 이렇게 두 가지 가능성까지 써 가며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내심으로는 뭐가 맞는지 거의 확신하고 있지 않은가.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아서 아주 적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두고 싶을 뿐이지.

‘손목에 백색의 핵석만 올라왔을 때’의 가정 위에, 나는 아주 크게 숫자를 덧그렸다.

1%.

다음 가정 위에도 똑같이 내가 예상하는 확률을 써넣었다.

‘어딘가에 흑색의 핵석이 올라왔을 때.’

99%.

“부디.”

나는 괜히 덤덤한 척하며 혼자 웃었다.

“1퍼센트의 행운이 내게 찾아오기를!”

***

앤에게 부탁해, 잠을 못 자 초췌해진 얼굴을 살짝 꾸미고 나는 하데스의 집무실을 찾았다.

정확히는 하데스 말고 록사를 찾은 거였다. 어제 가렌 백작에게 걸린 일을 하데스에게 어떻게 설명했나 궁금 하기도 했고, 마력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는지 묻기도 해야 했다.

그러나 문을 열기도 전에 집무실에 서 건너오는 목소리에 나는 멈칫했다.

“이렇게 주먹구구식으로 관리하실 겁니까?!”

“뭐가 또 문제야.”

“뭐가 문제인지 정말 몰라서 물으 시는 겁니까?”

하데스와 함께 있는 목소리는 라즐리 백작의 것이었다.

대충 상황이 파악됐다. 또 우리 남편 이 들들 볶이고 있군.

눈치껏 똑똑 노크하자 하데스의 반 가워하는 목소리가 금세 문을 타고 넘어왔다.

“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잘 왔다! 어서 들어와!”

퍽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가 웃겼다. 그러나 히죽거리며 들어갈 순 없어 서, 나는 표정을 갈무리한 다음에야 문을 열었다.

나일 줄은 몰랐는지 하데스는 놀란 눈이었다. 그는 곧 앉아있던 몸을 벌 떡 일으켜 한달음에 내게 다가왔다.

“맞다! 내가 깜빡했군. 오늘 오후에는 영애랑 시간을 보내기로 했거든.”

“지금 하던 얘기는마저 마치시 고 …….”

잔뜩 노한 표정의 라즐리 백작이 웅 얼거리자 하데스가 손을 휘휘 저었다.

“이봐. 그대들이 오고 나서 내가 얼 마나 시달렸는지 몰라? 잠도 못 자고 일하느라 내 시간도 없었단 말이오.”

“고생하시는 건 알겠습니다만 하던 얘기는마저 마치셔야지요.”

“백작.”

옆에 와서 선 하데스가 팔을 뻗어 내 어깨를 다정하게 끌어안고는 말했다.

“이해 좀 해주면 안 될까? 잊고 있는 모양인데, 우린 한창 때라고.”

“허…….”

억지로 웃는 하데스의 얼굴을 물끄 러미 올려다보며 나는 속으로 웃었다.

산책 약속 같은 건 없었고 우린 한 창 때니 뭐니 할 정도로 불타오르는 연애 중인 것도 아니었다.

라즐리 백작의 마수에서 벗어나고 싶은 하데스의 간절함이 절실히 느껴 졌다.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백작님이 급하신 모양인데 산책은 좀 나중에 하면 어때요.”

“뭐?”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영애.”

표정이 뒤바뀐 둘이 동시에 나를 바 라봤다.

하데스가 짙은 눈썹을 꿀렁이며 내게 눈으로 말했다. 대략 왜 이렇게 눈 치 없게 구냐는 것 같았다.

나는 하데스를 간단히 무시하고는 양팔 가득 서류를 안은 라즐리 백작 에게로 다가갔다.

“무거워 보이세요. 제가 좀 도와드 릴게요.”

“아, 그럴 게 아니라 영애께서도 한 번 보시지요. 마침 잘됐군요. 전하께 서 재정 관리에 얼마나 소홀하신지 영애도 아셔야겠습니다.”

백작은 무거운 서류 뭉치를 하데스의 책상 위에 턱하니 올려놓고는 내게 손짓했다. 다가가자 그가 맨 위에 있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그걸 왜 아이샤한테 보여주나? 어 제 식사하면서 한 말이 진심이었어? 벌써부터 일 못 시켜 안달인가?”

“전하, 저는 항상 모든 말에 진심이 랍니다. 곧 루버몬트의 안주인이 될영애시니 응당 영지의 재정 상태를 파악하셔야지요.”

백작은 하데스의 말을 간단하게 받 아치더니, 그가 내민 서류 위에 적힌 내용을 훑고 있는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봤다.

“무슨 내용인지 알아는 보시겠습니 까?”

아, 물론 어렵다. 막 볼 때는 이게 뭔가, 싶어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찬찬히 읽어보니 대충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잡혔다.

“세금 징수…… 내역인가요? 그런데 새삼 루버몬트 소유의 영지가 이 렇게 많았나 싶어서 놀랍네요.”

나는 테이블 위에 거의 산처럼 쌓인 두 부류의 서류들을 보며 혀를 내둘 렀다.

백작이 보여준 것은 제국 곳곳에 하데스가 갖고 있는 루버몬트 영지의 올해 세금 징수 내역이었다.

“많을수록 더, 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지요. 그런데 이걸 보십시오, 영애. 전하께서 무슨 기행을 저지르셨는지요.”

붉은 잉크로 체크해둔 영지 몇 곳의 세금 징수 내역을 가리키며 백작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중부, 벨크론.

영지 면적: 2. 3렉타르.

거주 영지민 수: 3, 218명.

차년 세금 징수 현황.

_미징수자: 1, 453명.

_미징수금: 1, 224, 825노르트 작년 세금 징수 현황.

_미징수금 844, 298노르트 중720, 214노르트 징수 완료]

[중부, 벨타니아.

영지 면적: 1. 8렉타르.

거주 영지민 수: 2, 889명.

차년 세금 징수 현황.

_미징수자: 1, 002명.

_미징수금: 1, 088, 974노르트. 작년 세금 징수 현황.

_미징수금 792, 644노르트 중 669, 681노르트 징수 완료]

[중남부, 그란델…….]

표시가 된 영지의 사정을 골라 읽고 있던 내게 백작이 말했다.

“이 서류에 제가 표시해둔 곳은 전부, 전하께서 미징수금을 해결하지 않고 올해도 조용히 넘어가시려던 영 지들입니다. 작년, 차년 전부 합 쳐…….”

살벌하게 빙긋 웃은 백작이 높은 서 류의 산을 툭툭 쳤다.

“무려 21억 663만 3천 노르트의 세 금이 걷히지 않았지요.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전부 중부와 중남부 영지들이네요. 작년이랑 올해 가뭄 때문에 고생 좀 했죠.”

나는 옆에 달리 분류된 서류의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왜 따로 분류해두신 거예요? 뭔가요?”

“미징수한 세금이 있어 조사를 들 어가려고 골라놓은 영지들입니다. 원 래대로라면 제가 표시해둔 곳들도 전 부, 저쪽에 포함되어야 하지요.”

나는 따로 분류된 서류 한 장을 들 고 살폈다. 북부의 영지 몇 군데와, 남부 중에서도 일 년 장사를 톡톡히 했을 부유한 영지 몇 곳의 이름이 얼 른 보였다.

“여긴 확실히 미징수금이 있으면곤란한 곳들이긴 하네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중부는 세 금 안 내도 되고 저쪽은 칼같이 걷어 야 한다는 건가요?”

“아, 그런 뜻은 아니고요. 백작님께 서 하도 화를 내시기에 전하가 영지 재정 관리를 엉망으로 해놓은 줄 알 았는데, 그런 건 아니구나 싶어서요.”

“이게 엉망이 아니면…… 대체 영애의 기준에서는 뭐가 엉망인지요?”

백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영지민 수 대비 미징수자의 비율 좀 보시겠어요?”

나는 처음 백작에게 받아들었던 서 류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영지민 3분의 1이 미징수자로 기 록되어있어요. 악의적으로 세금을 빼 돌린 게 아니라 정말로 세금을 해결할 여력이 없었던 거죠. 백작님도 아 시겠지만 작년이랑 올해 중부가 정말…… 불지옥이었거든요.”

중부와 남부는 영지민 대부분이 농 경사업으로 수익을 낸다. 가뭄이 심 한 해는 그들에게 최악이 었다.

그리고 작년과 올해는 내가 기억하 기로, ……가 있었으면 뉴스에서 역대 급이라고 보도되었을 정도로 극심한 가뭄에 몸살을 겪은 해였다.

개개인의 미징수금이야 다르겠지만 영지민의 3분의 1이나 미징수자에 머릿수를 올린 걸 보면, 안 봐도 뻔했다. 지금 중부 영지민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을 거였다.

내 말뜻을 이해했는지 백작이 느릿 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코옷음 쳤다.

“그럼 영애의 말씀은, 그 모든 사정을 헤아려 차별적으로 세금을 징수해 야 한다는 건지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두 부류의 서 류를 뒤적여 몇 군데 영지 사정을 더 확인했다.

“와아 …….”

절로 탄성이 나왔다.

슬쩍 훑기만 했을 뿐인데도 확연히 보였다. 미징수금이 현저히 낮아도 탈세의 가능성이 있을 법한 영지는 귀신같이 세금 조사 목록에 들어있었다.

백작의 말대로 영지의 사정을 일일이 헤아려 분류해놓은 이 세금 징수 내역 서류들은, 실로.

‘완벽해.’

나는 찬양하는 표정으로 하데스를 돌아보았다.

이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사람이었다. 사실 뭐 하나 부족하다고 해도 그러려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데스는 정말로, 정말로 완 벽한 남자였다.

툭하면 출몰하는 마수들 토벌하러 나가랴, 군대 살피랴, 아직 안주인이 없는 성의 내정 관리하랴, 거기에 수 십 개가 훌쩍 넘는 영지의 세금 사정까지 일일이 헤아린다고?

대체 이 남자, 부족한 게 뭐지?

반해버릴 것 같아. 아니, 이미 반했 나.

아마도 반짝반짝 빛나고 있을 내 눈 이 부담스러웠는지 하데스가 입 모양으로 뭐, 왜, 속삭이며 몸을 물렸다.

나는 곧바로 라즐리 백작을 돌아보 며 말했다.

“백작님 말씀대로 이 서류들은 엉 망이에요. 마치 숫자도 못 읽는 어린애가 일처리 해놓은 것 같군요.”

내 독설에 하데스가 피곤한 표정으 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 쉬었다.

“작년과 올해 합쳐 미징수금이 몇 천만이나 되는데도 세금 받아낼 생각 은 없고, 조사 목록에서도 빠져있 고 …….”

“그렇지요.”

“정작 미징수금이 백만 노르트도 안 되는 영지는 세금 조사를 나가야 한다고 분류해놓고 말이에요.”

“이봐, 아이샤. 그건…….”

“쉿.”

나는 입술 위에 검지를 올리며 끼어 들려는 하데스의 말을 막았다.

해명하려던 그가 끙, 신음을 흘리며 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님이 표시해둔 영지들 전부 세금 조사에 들어가야 맞지요? 칼같 이 미징수금 걷어내고요.”

“예, 그렇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최대한 백작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웃는 얼굴로 정중히 고개 숙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영지를 관 리해야 한다고 제게 가르쳐주실 생각이라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백작님께 가르침 받는 건 다시 생각해봐야겠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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