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만큼 당황해본 적이 있었던가.
당장 록사를 숨길 만한 능력이 아자르에게는 없었다. 굳이 하나 있는 선택지를 고르라면…….
가렌 백작을.
‘죽여?’
아니, 아니?
아자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 저 었다. 말도 안 되지.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낯선 기척도 록사는 여전히 못 느끼고 있었고, 가렌 백작은 이미 그를 발견한 이후였다.
모시는 주군이 국가적 범죄자를 숨 겨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신의 반응은 어떨까?
하필 다른 가신도 아니고 가렌 백작이었다. 그는 매번 하데스를 피곤하 게 할 만큼 질서와 규칙에 엄중한 사람이다.
당연히 이 사실을 그냥 넘어가려 하 지 않겠지. 물론 루버몬트에서 지명 수배자를 숨겨주고 있었다고 황실에 일러바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무조 건 하데스를 설득해 록사를 단두대로 보내기는 할 터였다.
‘어떻게…….’
고민하던 아자르가 문득 인상을 찌 푸렸다.
하데스의 명령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건 큰일이었지만, 어쩌면 나쁘 지 않을지도.
‘저놈 목 잘리는 걸 내가 걱정할 필 욘 없지 않나.’
아자르는 생각했다.
돈에 미친 놈처럼 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는 건 그냥 하데스가 둘 러대는 말일 뿐일 테다.
인재를 등용하는 데 인성은 철저히 배제하는 것. 아마 하데스가 록사를 꾸역꾸역 곁에 두는 이유는 그 때문 일 테고, 아자르는 그게 영 마음에 들 지 않았다.
록사 트리볼트, 능력 있는 마법사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는 언제 하데스의 뒤통수를 칠지 모를 박쥐 같은 놈이 아닌가.
차라리 잘되었나?
그래, 될 대로 되라지. 당황스러웠 던 마음이 고요히 가라앉았다.
가렌 백작이 어느 정도 거리를 붙여 왔을 때에야, 록사는 그의 기척을 느 끼고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엄마야…….”
놀란 그가 눈에 띄게 벌벌 떠는 게 느껴졌다.
정확히 두 걸음 앞에 가렌 백작을 마주 보고 선 상태.
멀리서 비스듬히 비껴 선 아자르에게는 록사만큼이 나 놀란 가렌 백작의 얼굴이 다 보였다.
이미 걸린 마당에 록사의 능력으로 달아날 방법도 없었다.
머릿속에 생각하는 대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창조의 마법사지만, 지금 그는 마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이니까.
“하얀, 마법사……. 당신 …….”
놀란 얼굴로 어버버거리던 가렌 백작이 금세 눈을 날카롭게 뜨며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는 아자르와 같은 풍속성의 제국 인이었다. 날카로운 바람의 흐름이 금세 주변을 휘감았다.
“대체 이곳에 왜…….”
당장 록사를 공격해 제압할 기세인 가렌 백작을, 아자르는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당황한 나머지 땡 얼어붙은 록사에게 달려들려던 가렌 백작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는 마치, 실에 감긴 마리오네트처럼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방금까지번쩍이던 눈에서도 생기가 사라졌다.
‘갑자기, 뭐지?’
의아함에도 아자르는 가렌 백작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목검을 쥐고 공격 자세를 취하던 가렌 백작의 팔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 가고, 곧 그는 가만히 뒤돌았다.
뺏뺏한 움직임을 보며 아자르는 확 신했다. 분명 무언가 강제적인 힘에 조종당하는 것 같았다.
‘저 자식, 마력이 동났다더니 아니 었나? 아니, 애초에 창조 마법이 저 렇게 행동까지 조종할 수 있어?’
그러나 아자르의 의심과 달리 록사는 여전히 당황한 낌새였다.
“대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 었지?”
뒤돈 가렌 백작의 시야에서는 록사 가 사라졌다.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바람의 흐름을 타고 아자르의 귀에 선명히 들어왔다.
‘여기서 뭘 하고 있냐니? 정신까지 조종하나? 창조마법으로 저렇게까지 할 수 있다고? 저건 꼭 암속성이 세뇌건 것 같은…….’
그런 생각까지 다다랐을 때, 아자르는 놀라 숨을 삼켰다.
그의 눈이 재빠르게 2층의 테라스를 향했다.
아이샤는 여전히 그곳에서 숨을 죽 인 채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손, 놀란 눈.
가렌 백작은 록사를 돌아볼 생각도 않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 뭐시지라……?”
홀로 남은 록사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다는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자르의 눈은 여전히 날카롭게 아이샤를 직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얼굴로 조금 더 혼자 남은 록사를 지켜보다가, 곧 재빠르 게 방으로 들어가며 자취를 감췄다.
서둘러 하데스의 서재로 돌아간 록사와 달리, 아자르는 그 자리에서 굳 은 것처럼 발을 붙인 채 한참 자리를 지켰다.
그의 시선은 아무도 없는 아이샤 방의 빈 테라스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
나는 백속성 능력자다.
확신할수 있는 ‘참’인 전제다.
그러나 내 몸은, 아무래도 원래 내게 약속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아닐 터였다.
내가 입은 아이샤 에스클리프의 몸 은 원래였다면 500년 전의 성녀 아벨이라 에스클리프의 영혼이 재림할 껍 데기였다.
이것도 거의 확실했다.
중간중간 흘러들어오는 아벨라 에스클리프의 기억. 그리고 그녀와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의 관계에서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속성 능력자’인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아벨라 에스클리프다.
‘그럼 나는?’
어제 새벽 이후로 한숨도 자지 못한 채, 나는 고민하고 있었다.
새벽까지 잠에 들지 못한 이유는 가스펠 백작 때문이었다.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진 그가 걱정되었다.
아, 이렇게 말하니 조금 헷갈리게 들리는데 그의 상태가 걱정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순간 가스펠 백작이 뒤로 넘어져 코가 깨진 게 그저 우연이 아니라, 내가 ‘뒤로 넘어져서 코나 깨져라.’ 하 고 빌었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에 걱정스 럽다는 뜻이다.
그게 우연이 아니었다면, 혹시나 내가 바란 대로 이루어진 거라면?
여러 제국인들의 능력 중, 그것과 가장 비슷한 능력은 단 하나뿐이다.
세뇌.
아니, 그때 몸이 작아진 채로 아자르의 가슴 앞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나는 대상과 눈을 마주쳐야 한다는 세뇌 조건을 성립시키지 못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도 대상의 행동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은 세뇌보다 한층 높은 수준이 었다.
암속성의 최대 개방 이능.
정신 지배.
그렇지만 아벨라의 능력이든 아니 든 백속성의 능력을 구현할 수 있는 내가 동시에 암속성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이해가 안 됐다. 그래서 그저 우연이겠거니 했었다.
하나 어제 새벽.
나는 내 능력에 대한 의심을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아주 확 실한 결과를 얻고 말았다.
왜인지 밖에 나와 있던 록사가 가렌 백작에게 모습을 들킨 순간, 얼마나 당황했던가.
그는 지명수배자이고 제국 황실에 서 공인한 사형수, 1급 범죄자였다.
하데스는 록사의 능력을 높이 사서 그를 숨겨두고 가끔씩 도움받는 듯했지만…….
‘걸리면 큰일 날 상황이긴 했지.’
새벽의 일을 떠올리며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록사의 얼굴을 알아봤는지 당장 공격 태세를 취하던 가렌 백작을 발견 한 순간,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하고 말았다.
「아무것도 못 본 거야. 그대로 다시 돌아가. 」
보통 사람이 그 상황에서 남을 마음 대로 조종할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겠 지.
그래, 맞다. 사실 본능적이었다기보다는, 혹시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을 잠깐 했던 것도 같다.
내 예상대로 가렌 백작은 록사를 본 것도 잊고 곧바로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 가렌 백작도, 록사도 내가 그 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가렌 백작 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정신 지배.’
내가 지난 새벽에 사용한 능력은 암 속성의 최대 개방 이능인 정신 지배 가 분명했다.
“먹어야겠지.”
상념에 잠겨 흐릿한 시야로, 손바닥위에 놓인 하얀색 알약이 들어왔다.
마력억제제.
의심이 시작된 순간부터 언젠가는 다시 먹을 일이 있으리라 생각해왔다.
나는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이었 고, 전생을 기억함은 곧 암속성 능력자들이 신에게 받았다는 벌이다.
그뿐만 아니라 ‘자식을 죽인 죄’를 저지른 암속성 능력자 제누스의 전생을, 꿈에서 보았다.
그 꿈 때문에〈페르소나〉작가인 프로크레아토르의 존재도, 미하일 라이가르트 대신관의 정체도 깨닫지 않 았던가.
꿈이 그저 꿈인지, 내가 기억해낸 전생인지 확신할 수 없기에 이마력 억제제는 더더욱 필요했다.
백속성의 능력을 지닌 것은 아벨라 에스클리프.
그리고 나는 아벨라 에스클리프가 아닌 또 다른 영혼.
.‘나’의 존재와 속성을 확인하기 위 해서는…….
‘지금?’
나는 망설였다.
마주하게 될 진실이 두려운 건 아니 었다. 하지만 마력억제제를 먹고 난 이후에 벌어질 상황을 아직 제대로 대비해두지 않았다.
‘하데스랑 아벨을 위해서, 록사의 마력이 돌아오면 회복의 물약을 만들 어두고.’
그 다음에는.
‘아벨을 부탁해야지. 하데스에게도 부탁하고, 앤에게도 부탁하고. 아자르한테도!’
그리고.
‘떠나?’
아니?
‘죽어야겠지?’
뭐든 끼적이는 습관이 있어 테이블 위에 준비해둔 종이가 비어있었다.
나는 천천히 펜을 들고 마음을 다잡 으며 손을 놀렸다.
[마력억제제를 먹었을 때 나타나는 반응에 따라서…….]
“손목에 백색의 핵석만 올라왔을 때.”
덤덤히, 말하는 대로 펜을 끼적였다.
[손목에 백색의 핵석만 올라왔을 때: 가스펠 백작과 가렌 백작의 일은 그저 우연이었음. 내가 꾼 제누스의 꿈은 그저 책 속 빙의자 버프로 그녀의 과거를 엿본 것. 아벨, 하데스와 함께 행복한 북부 라이프 가능.]
“어딘가에 흑색의 핵석이 올라왔을 때.”
[어딘가에 흑색의 핵석이 올라왔을 때: 가스펠 백작과 가렌 백작에게 정신 지배를 건 것. 나는 암속성 능력자. 내가 꾼 제누스의 꿈은 그저 꿈이 아니라 제누스의 전생을 기억해낸 것.]
거기까지 쓰고 나서는 계속 펜을 놀 리는 게 망설여졌다. 마지막에 찍은 온점 위에 잉크가 굵게 번졌다.
그렇지만 인정하기 싫다고 해서 버 텨봐야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을 테다.
바짝 마른 입술을 한번 홈치고, 펜을 계속 움직였다.
[나는 제누스다. 자식을 죽인 죄를 저지른 나는, 매 생에서 자식의 영혼을 제 손으로 죽여야 하는 벌을 받고 있음. 예상할 수 있는 이번 생에서의 자식의 영혼은]
“아벨 루버몬트.”
[……영혼은 아벨 루버몬트. 아벨, 하데스와 함께 행복한 북부 라이프 절대 불가능. 아벨을 죽이기 싫다면 어떻게든 내가 먼저 죽을 방법을 찾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