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눈물겨운 사정을 구구절절 설명했 는데도 전혀 감흥 없어 보이는 록사의 표정에 아자르는 1차로 놀랐다.
그래도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는 다른 법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여겼다.
하나 얼마면 되냐는 아자르의 물음에 주판 튕기던 록사가 낸 견적은 무려 이천팔백만 노르트.
그런 돈이 아자르에게 있을 리 만무 했다.
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약을 만들어 줄 생각 전혀 없다며 냉정하게 구는 록사에게 아자르는 절박하게 매달렸다.
「일단 좀 만들어주십시오! 주군께 서 돌아오면 내가 직접 부탁을 하겠 습니다. 주군은 기꺼이 도와주실 사람이니…….」
「어허,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지라? 모든 거래는 선불이 기본이여라. 돈 없으믄……. 」
비죽 웃으며 록사는 말했었다.
「……죽어야지라? 」
「뭐라…….」
냉정한 록사에게 아자르가 참지 못하고 달려든 건 당연했다.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아자르를 부하들이 겨우 말렸고 꼭 부하들의 중재가 아니었더라도 록사는 제 몸 하나쯤 지킬 능력은 되었다.
토속성의 최종 개방 능력자.
땅의 모든 힘이 그의 것이었다. 뚫을 수 없는 흙벽과 수많은 모래 병사 가 아자르의 앞을 가로막았다.
요리조리 아자르를 피하면서 록사는 비아냥거 렸다.
「어허이! 자꾸 이렇게 쓸데없이 마력 낭비하게 할 거여라? 이런 식이 면 돈 구해와도 힘 팔려서 약 못 만 들지라? 」
그 사태를 전부 지켜본 의원은 아자르를 안타깝게 여기며 말했다.
「전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조금 만 버텨보지요. 물리적인 치료법으로는 사흘 정도…… 제가 어찌 해볼 수있을 듯하니. 」
달리 방법이 없었다. 3일 꼬박 의원 은 눈도 못 붙이고 중독되어 죽어가는 아자르의 동생들을 돌봤고, 아자르는 그의 곁에서 무력하게 시간을 죽였다.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능력이 있으면서도, 손에 떨어지는 돈이 없 으니 외면하겠다고?
아니, 돈올 안 주겠다고 했나? 원하 면 노예 계약서라도 써주겠다고 했는 데도?
아자르의 기준에서는 도저히, 록사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었다.
「이제 한계인데……. 」
의원이 약속했던 3일이 흐르고 가 장 몸이 약한 막내의 숨이 끊어질 듯말 듯, 위태로웠던 순간.
오비투스로 토벌을 나섰던 하데스의 군대는 아슬아슬하게 성에 도착했다.
채 성의 도개교를 건너지도 못한 하데스의 앞에, 아자르는 헐레벌떡 몸을 옮겨 무릎 꿇고 부탁했더랬다.
난생처음 보는 넋 나간 아자르의 표 정에, 하데스가 얼마나 놀랐던가.
「주, 주, 주군. 부탁이, 저, 부탁이…….」
「뭐야? 무슨 일인데? 」
당황한 하데스가 아자르를 일으켜 물었고 그는 말했다.
「돈……. 」
「뭐? 」
「돈 좀…… 빌려주십쇼. 」
제정신이 아닌 아자르 대신 부하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하데스는 성에서 늴리리야 늘어져있던 록사를 불러 다급하게 약을 주문했다.
「야, 이 새끼야! 네가 살릴 수 있 다고? 돈은 얼마든 줄 테니까 일단 만들어 ! 서둘러! 」
「예이! 분부대로! 」
기다렸다는 듯 록사는 손바닥 위에 아자르 동생들의 머릿수대로 정화의 물약을 만들어냈다.
하데스가 돌아온 지, 십 분 만의 일이었다.
십 분. 십 분이면 되는 일이었다.
힘 하나 안 들이고 약을 만들어 내는 록사의 능력이면, 십 분으로도 충분 했던 일.
그러나 돈, 그깟 돈이 뭐라고 아자르의 동생들은 사흘이나 생사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워했고 아자르는 언제 죽을지 모를 그들을 지켜보며 두려움에 떨었다.
지옥 같은 사흘의 기억이었다.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아무리 생각해도 저놈은 빨리 뒤 지는 게 어울려.”
상념에서 빠져나온 아자르는 하데스의 등 뒤에 딱 달라붙은 록사를 향 해 재차 으르렁거렸다.
말리는 하데스의 모습도 여간 불만인 게 아니다. 능력만 좋으면 저런 인 성 파탄 난 놈도 곁에 둘 생각이냐며 재차 내칠 것을 권했지만 그때마다 하데스는 단호했다.
「네가 좀 이해해라. 저 녀석도 그 럴 만한 사정이 있어. 아마 진짜 네 동생들이 죽을 때까지 두고 보진 않 았을 거다. 」
「사정? 사저엉? 그게 뭐든 전 이 해 못 합니다. 제 동생들, 그때 숨넘 어가기 일보 직전이었단 말입니 다! 」
뭔 사정이 됐든 아자르는 5년 전, 그날의 일로 록사를 용서할 수 없었다.
“제발 그만. 록사, 넌 서재에 틀어 박혀 있으랬더니 왜 기어 나와?”
신경질적으로 묻는 하데스에 록사 가 삐죽 입을 내밀었다.
“종일 저기 갇혀있는 게 얼마나 답 답한지 아셔라? 지겹고 심심해서 인 간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지 않겠어 라? 올만에 북부에 왔으니 새벽 공기 라도 좀 쐬고 올까 해서리…….”
“지명수배자 주제에 팔자 좋은 소리를 하는군. 잠이나 늘어지게 자고마력이나 빨리 회복해라.”
하데스는 서재 문을 가리키며 명령했지만 록사는 간절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잡으며 고개 저었다.
“진짜 좀이 쑤셔가 뒤질 것 같단 말 이여라……! 지가을매나 자유로운 영혼인지 아심서 그러심까?”
“아니, 싸돌아다니다 걸려서 교수 대에 목 매달리고 싶어?”
“이 시간에 누가 밖에 나온다고 그 러심까? 딱 십 분만 바람 쐬고 돌아 올라니 봐주시어라.”
“하…….”
하데스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떼쓰는 록사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제국인들의 육체는 각 속성에 꽤나 구애받는 법이다.
좀 면이 안 서 누구에게도 티 낸 적 은 없지만, 사실 하데스는 추위에 퍽 취약했다.
북부의 추위에 버티기 위해서, 밖에 나갈 때면 기본적으로 발열의 이능을 사용해 몸을 덥히는 게 버릇이 되어 있을 정도.
같은 이유로 땅의 힘이 마력의 원천인 록사는 답답한 걸 죽을 만큼 싫어 했다. 되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서 있 어야 숨이 트이고 생기가 돌았다.
“땅도 밟고 바람도 쐬어야 마력도 빠르게 회복된다 아임까?”
징징거리는 록사를 난처하게 바라보던 하데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성에서 네 얼굴 모르는 놈 없다. 내가 여태껏 너를 숨겨주고 있는 걸 아는 놈은, 하늘 아래 너, 그리고 나.”
하데스가 록사와 자신을 차례로 가 리 키고는 아자르를 턱짓했다.
“그리고 저놈밖에, 아니.”
하아…….
생각해보니 약을 잘못 먹은 일로 아이샤도, 아벨도, 아이샤의 하녀 앤도 록사의 존재를 알고 있다.
당장 황실과 싸울 게 아니라면 범죄 자 숨겨주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진짜 귀찮게 …….”
“십 분만예…….”
마음 같아서는 당장 서재에 밀어 넣고 못 나오게 가둬버리고 싶지만, 하 루 새 죽을상이 된 록사의 얼굴이 가 엾게 느껴져 하데스는 답지 않게 마음 약해졌다.
“얼른 나갔다 와라. 설마 멍청하게 어디서 걸리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앗! 예이! 제가 바보여라? 얼른바람만 쐬고 오겠지라!”
신난 록사가 급히 대답하고는 집무실 테라스를 향해 내달렸다. 나가기 전 아자르를 돌아보며 눈 밑을 쭉 당 겨 얄밉게 혀를 내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자르가 발끈했다.
“저 정신 나간 촉새 새끼가!”
“야, 그만.”
아자르가 달려들 새도 없이 록사는 테라스 밖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아이샤가 보면 놀라 까무러쳤겠지만, 땅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다루니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머리 깨질 일 은 없었다.
휭하니 열린 테라스 문을 바라보며 하데스가 아자르에게 눈짓했다.
“걸리면 골치 아프니 따라가서 감 시 좀 해라.”
“예?! 지금 저한테 저놈을…….”
“부탁 좀 하마. 나도 녀석을 성에 두는 게 꺼림칙하긴 한데, 당장은 못 돌려보내. 아이샤가 저놈한테 부탁한 게 있어서.”
그 말에 멈칫하던 아자르가 날카롭 게 훅 한숨을 내뱉었다. 이리저리 정 돈 안 된 붉은 앞머리가 그의 분노를 따라 훅 떴다 가라앉았다.
***
하데스의 명령에 록사를 뒤따라 나 온 아자르는,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적당히 몸을 숨기고 서서 불만스럽게 자리를 지켰다.
생각은 있는 놈인지 멀리 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달밤의 산책을 즐기니 다행이었다.
사계절 녹지 않는 만년설의 산자락 과 이따금씩 코를 간질이는 차가운 바람 냄새.
루버몬트 성에서 보는 북부의 새벽 정경은, 아자르에겐 익숙했지만 록사에게는 새삼스레 아름답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새벽 산책이 퍽 만족스러운지, 그는 한껏 밝아진 얼굴로 가슴을 열며 숨을들이켜곤 했다.
‘지랄하고 있네.’
언 땅의 기운을 고스란히 흡수하며 태평하게 새벽 공기나 마시고 있는 꼴이, 아자르의 눈에는 영 고까워 보였다.
속으로 구시렁거리면서도 계속 록사를 주시하고 있던 그때였다.
문득 목을 돌리며 고개를 풀던 아자르의 시야에, 성의 2층 테라스에 나 와 있는 익숙한 인영이 잡혀들었다.
테라스 난간에 기대어 서서 턱을 괴 곤, 록사처럼 북부의 새벽 정경을 눈에 담는 데 여념 없는 얼굴.
아이샤였다.
문득 오른쪽 뺨이 화끈했다. 아자르는 허둥거리며 괜히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이 새벽에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록사를 감시하던 퉁명스러운 시선 이 자연스럽게 아이샤에게로 옮겨갔다.
잔잔한 물결처럼 허리께에서 흔들 리는 머리칼. 그 위로 내려앉은 달빛 이 오묘하게 빛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이었다.
그녀는 약간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잘 웃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왜 인지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마저도 괜히 훔쳐보는 게 민망해질 정도로 예뻐서…….
‘잠깐. 뭐라고?’
문득 든 생각에 아자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홱 고개를 틀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갔다. 시선은 다시 물끄러미 테라스의 아이샤를 향해 돌 아갔다.
다시 본 그녀는, 왜인지 퍽 반가운 눈빛으로 아래를 보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록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록…….”
반갑게 록사를 부르려던 아이샤의 입이 다물렸다. 왜인지 당황한 그녀 가 멈 칫하고는 반대 편을 돌아보았다.
‘뭐지?’
아자르의 날카로운 시선도 아이샤의 시선을 따랐다.
‘젠장!’
아자르가 당황했다.
새벽에 수련이라도 하러 나온 모양 인지, 기다란 목검을 휘휘 저으며 걸 어오고 있는 이가 보였다.
가렌 백작이었다. 이대로 두면 마냥 좋다고 새벽 공기 킁킁거 리는 록사와 마주칠 터였다.
‘어떻게 하지?’
바보같이 아이샤를 쳐다보느라 낯 선 기척을 예민하게 느끼지 못한 자신의 불찰이었다.
거리상, 이미 끼어들기도 늦은 상 황.
‘봤다.’
손쓸 틈도 없이, 멀리 보이는 가렌 백작이 록사의 모습을 발견하고 멈칫 했다.
국가적 범죄자로 낙인찍힌 ‘하얀 마법사’ 록사의 얼굴을 그가 모를 리 없 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