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걱정했던 만큼 힘들지는 않았던 가신들과의 만남을 마치고, 하데스는 곧바로 집무실에 아자르를 불렀다.
낮에 가렌 백작과 아이샤 사이에 무 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요량이었다.
내용은 대충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정예군의 훈련 과정을 참관하던 가렌 백작이 과한 체벌을 주었고, 차마 그 상황을 지켜보기 힘들었던 아이샤 가 끼어든 모양이었다.
가렌 백작의 군대 교육법에 눈치 준 적은 없었던 하데스다.
그는 마수 토벌을 전문으로 하는 정예군뿐 아니라 인간들을 상대하는 기사단도 관리하는 입장이었고, 어느 정도는 가렌 백작의 스타일이 군관 리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네놈 성격에 잘 참았군.”
하데스는 의외라는 듯 마주보고 앉 은 아자르를 보며 말했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적응해야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망나니처럼 굴 순 없는 법입죠.”
“잘했다.”
순순한 아자르의 대답에 하데스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아자르는, 아무 데나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떠 돌이 늑대 같았다.
크레센타와 카지트의 혼혈이라고배척받으며 제국에서 지내기가 수월 하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런 그를 루버몬트에 묶어놓고 제 사람으로만들기까지 얼마나 고단했 던가.
이번에야 참은 모양이지만 가렌 백작과 아자르의 충돌은 이전에도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아자르에게 군대의 질서와 상하관계의 개념을 정 립시키기까지 지난했던 과정을 떠올 리며 하데스는 뿌듯하게 말했다.
“많이 컸어?”
“됐고요. 그…… 영애는 우리 같은 놈들 사정을 잘 모르니, 너무 뭐라 하 지는 마십쇼.”
“응?”
머뭇거리다 내뱉은 아자르의 말에 하데스는 의아했다.
아자르가 괜히 버럭하며 말했다.
“아, 거! 삐쩍 말라가지고 휘청휘청 대는 게, 전하가 한 소리 하면 충격 받아서 몸져누울 것처럼 생겼잖습니 까?”
“내가 언제 아이샤한테 뭐라 하겠다 했어?”
하데스의 눈이 의심으로 가늘어졌다.
“백작이든 아이샤든, 둘 다 별로 문 제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멍청 하게 굴면 몸으로 때우면서 반성시키는 것도 맞고, 그런 데 익숙하지 않으 니 아이샤가 못 보고 끼어들 수 있는 것도 맞지. 내가 왜?”
“아, 그…….”
당황하는 아자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데스의 눈이 더 가늘어졌다.
에스클리프 남작의 전서를 가져와 서 아이샤를 의심하며 못마땅해하던 것이 엊그제 일인데, 어째 지금 보이는 태도는 아자르답지 않았다.
당황하는 얼굴하며, 안 어울리게 붉 어진 뺨까지…….
“너 지금 아이샤 걱정하냐?”
“뭐요? 아닌데요?”
“맞는데? 주제넘게 내치라니 뭐니 난리 피웠던 놈 맞나?”
“내가 언제……. 그냥 애들이 영애 에게 고마워하길래, 지들 때문에 전하께 혼나면 걱정할까봐 드리는 말씀 입죠. 오해 마십쇼.”
“뭐, 아이샤 때문에 벌 안 받아서 좋아했어?”
피식 웃으며 하데스가 물었다.
“뒤지게 처맞은 놈이 있었는데 영애가…….”
“아이샤가?”
낮에 연무장에서의 일을 떠올리던 아자르가, 괜히 대수롭지 않은 척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치료해주셨거든요. 평생 가야 성 력 덕 볼 일 없는 놈이니 아주 영광이라고 하루 종일 질질 짜고, 뭐 그랬 습니다.”
“아하…….”
알겠다는 듯, 하데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핵석을 못 숨긴다기에 능력 개방 은 먼 나라 얘긴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아주 신관급이시던데 말입죠.”
“핵석, 아, 그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아무튼 어떤 놈인지는 몰라 도 계 탔군.”
아이샤를 떠올리는지 비죽 웃던 하데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거 아무한테나 해주는 거 아니라고.”
문득 처음으로 아이샤의 능력이 개방되었던 날, 제 상처보다 아벨의 상 처를 치료하는 데 먼저 성공했던 일 이 떠올랐다.
별거 아니었는데 불퉁하게 굴었던 게 생각나 하데스는 조금 부끄러웠다.
홈홈, 헛기침하며 상념에 잠겼던 하데스의 시야에 문득 아자르의 멍한 표정이 잡혀왔다.
그는 왜인지 어울리지 않게 넋이 쏙 빠진 얼굴이었다.
불곰도 손쉽게 때려잡을 만한 두꺼운 손을 수줍게 제 오른빰에 올려둔 모습을 보고 하데스가 질색했다.
“너 뭐 하냐?”
“뭐가요?”
“징그럽게 왜 뺨은 붙잡고 있는데? 애교라도 피우냐?”
“아.”
저도 모르게 …….
아자르가 황급히 오른뺨을 어루만 지던 손을 내리고 헛기침했다.
의심스러워하는 주군의 눈초리에 괜히 뜨끔했다. 아자르는 급히 화제늘 바꿨다.
“근데 어제까지만 해도 코딱지만 해졌던 거 아니었습니까? 약쟁이 약 잘못 먹 었다고 공자님께 들었는데?”
“어어, 그랬지.”
“영애 말론 일주일은 그 꼴로 지내 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떻 게…….”
그때, 집무실 뒤쪽에 있던 서재 문 이 벌컥 열리는 기척이 났다.
놀란 아자르가 짐승 같은 감각을 세 우며 흠칫 긴장했다.
“전하아…… 억!”
서재에서 나온 록사였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한 록사와 아자르가 멀찌감치 선 채 눈을 맞추며 으 르렁거렸다.
“불멧돼지……!”
“촉새……!”
아자르의 눈에서 불이 튄 것은 순간이었다.
단숨에 록사의 앞으로 몸을 옮겨간 아자르가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 아들었다.
“컥! 놔, 놔, 놔라이, 불멧돼지야!”
“다시 만날 때는 죽인다고 말했었 지?”
“전하아아! 저 죽어라! 죽겠어라아 아!”
“야, 그만해.”
한숨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난 하데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그들 가 까이로 다가갔다.
왜인지 록사를 바라보는 아자르의 눈에는 살기가 형형했다.
“그러다 진짜 죽겠군.”
“아니, 그럼 진짜지 가짜여라?! 이 불멧돼지 좀!”
“아자르.”
다가온 하데스가 아자르의 어깨를 툭 치며 말렸다.
그의 만류에도 멱살을 놓기 아쉬운 지 한참 부들부들 떨던 아자르가 욕 지거리를 내뱉으며 록사를 던지듯 내버렸다.
훅 날아가 우스운 꼴로 한 번 구른 록사가 바닥에 널브러진 채 고개를 휙 쳐들고 도끼눈을 떴다.
“정신 나간 불멧돼지 새끼! 여전히 무식하게 힘자랑만 하는 건 여전하지 라!”
“오오, 진짜 뒤지고 싶냐? 죽여 달 라는 거지?”
“록사, 너도 그만.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거 지겹지도 않나?”
피곤한 표정으로 하데스가 휙 돌아서자 록사가 냉큼 달려가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섰다.
“지가 뭐 잘못했슴까? 왜 저한테 그 러시지라? 저만 보면 발정 난 것처럼 댕겨드는 불멧돼지 탓을 하셔야지 라!”
“저게 진짜…….”
험악하게 인상 쓰는 아자르가 무섭긴 한지 록사가 몸을 움츠리며 하데스의 뒤로 바짝 숨어들었다.
첫 만남부터 삐걱거린 록사와 아자르가 앙숙이 된 건, 벌써 5년이나 된 일이었다.
“징그러운 놈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면 미운 정이 라도 들 법한데, 둘은 만날 때마다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고양이와 쥐처럼 굴었다.
정확히는 록사를 향한 아자르의 일 방적인 분노였다.
“야비한 수전노 새끼…….”
“억울하지라! 세상은 돈! 돈 밝히는 게 뭐가 잘못이지라?!”
더 정확히는, 돈이라면 인간성을 내 팽개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록사의 성격 때문.
아자르의 마음이 십분 이해되다가 도, 록사가 그렇게 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는 하데스로서는 둘 중 누굴 탓하기도 힘들었다.
오늘도 하데스는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며 으르렁거리는 둘을 한심하게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도오오온!”
빽빽거리는 록사를 향해 이를 갈며 아자르는 그를 처음 만났던 5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하데스가 오비투스에 토벌을 나가 있을 때였다.
자존심 센 황실이 루버몬트에 머리 숙여가며 토벌을 요구했을 정도라 하데스는 직접 출정했고, 북부를 비워 둘 수는 없어 영지는 아자르에게 맡 겼다.
당시에 마탑에서 쫓겨나 막 지명수 배자신세가 되었던 록사는 하데스의 배려로 루버몬트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는데, 문제는 그때 일어났다.
하데스가 한참 오비투스의 마수 토벌에 정신없던, 바로 그때.
오랫동안 보지 못한 형제가 그립다 며, 사막 국가 카지트 출신인 아자르의 부족 동생들이 루버몬트에 방문했 던 것이다.
거기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다. 아자르가 성에 있으니 무사히 도착한 카지트 부족민들은 그럭저럭 환대 받 다 돌아갈 수 있었을 테다.
하나 루버몬트까지 오는 길에, 아자르의 동생들은 짙은 피부색의 이민족을 혐오하는 질 나쁜 제국 상인들에게 잘못 걸리고야 만 것이었다.
끼니를 해결하려던 그들에게 독을 섞은 음식을 판 모양이었는데 중독 중세는 성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타났다.
성에 상주하는 의원은 백속성 신관 들의 정화 능력이 아니면 죽어가는 동생들을 살릴 수 없다는 진단을 내 렸고, 아자르는 절망했다.
루버몬트에서 신전까지는 마차로 꼬박 일주일을 쉴 새 없이 달려야 하는 거리. 그마저도 고위급 신관이 다섯 명은 필요한 수준이라 했다.
한 명쯤이라면 아자르가 제 능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신전으로 옮겨볼 수도 있었겠으나, 불쌍한 동생들의 머 릿수는 열이 넘어갔다.
어찌어찌 신전에 도착한다고 해도 문제였다. 함부로만나기도 힘든 고 위급 신관들이 제국인도 아닌 이민족을 기꺼이 도우려고 할지도 미지수였다.
「대장, 지금 성에 머물고 있는 하 얀 머리의 마법사 말이야, 주군 말로는 무슨 속성이든 부릴 줄 아는 약을 만든다지 않았어? 」
당시 아자르가 얼마나 절박했을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얼굴 한번 보겠다고 먼 길을 걸어온 동족들이 다 죽어가는 꼴이라 니…….
해서 부하의 말에 솔깃할 수밖에 없 었다. 아자르는 그 길로 록사를 찾아 가 사정을 설명하고 빌었다.
그 자존심 강한 아자르는 하데스 앞 에서도 꿇어본 적 없는 무릎을 처음으로 바닥에 불여보았다.
「당신이 모든 속성 마법을 부릴 수있는 약을 만든다 들었습니다. 내 동생들을 좀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
당장 동족들의 숨이 넘어가도 이상 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
아자르는 그때 록사가 태연한 표정으로 했던 말을, 정확히 5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이민족의 안위 따위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무릎 꼻으며 부탁하는 아자르를 향해 귀를 후비적하 며 말했다.
「……그래서, 돈은 있겠지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