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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88화 (88/221)

88화.

나 잘했지.

칭찬해 달라는 표정으로 하데스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잠시 눈을 맞춘 채로 침묵하다 피식 웃었다.

가렌 백작이 말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 전하를 꽤 오랫동안 옆에서 보필해왔다 고 생각했는데, 전하께서 대사를 준비하심을 영애보다 몰라보았다니 부 끄러움이 큽니다.”

입 발린 소리가 아니라 가렌 백작은 진심으로 충격 받고 침통한 얼굴이었다.

순식간에 얌전해진 가렌 백작을 멍 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하데스가 어색 하게 웃었다.

“어, 그래, 뭐…….”

두 번 다시 가렌 백작이 게르노아의 문제로 하데스를 귀찮게 할 일은 없을듯했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한번 이마를 훔쳤다.

휴, 남편 도와주기 힘드네.

“무력으로 압박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요 …….”

가렌 백작은 여전히 충격 받은 얼굴 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좀 안쓰러웠다. 나는 한 마 디 더 해주었다.

“제가 전술에 눈이 밝은 건 아니지만, 여태껏 전장에서 외쳐 오셨던 백작님의 행보가 틀린 건 아니예요. 강 한 무력으로 적군을 제압하고 무릎 꿇리는 것이, 어떤 때는 필요한 법이 기도하니까요.”

군벌 귀족인 가렌 백작은 자신의 영 지를 무력으로 다스리는 전형적인 철 혈 재상이다.

무기와 피로써 권력을 잡고 위계질 서를 세우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

독일의 정치가인 비스마르크와 비 슷한 타입이었는데, 사실 철혈 정책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결과 적으로 그는 성공하지 않았는가?

인정할 건 인정해줘야 하는 법이다.

내 말에 가만히 눈을 맞추고 있던가렌 백작이, 슬쩍 웃었다.

“영애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그것도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겠지요.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아니, 뭐 그렇게까지는 …….”

“낮에 연무장에서 영애에게 저질렀 던 무례는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못 볼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갑작스러운 사과에 나는 놀랐다.

하데스를 돌아보자, 역시 그는 대번에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낮에 뭐? 무슨 일 있었나?”

“아뇨, 전하. 별일 아니었어요. 사과 받을 만한 일도 아니었는데 백작 님이…….”

“정예군 훈련을 참관하다가 과하게 체벌을 좀 주었습니다. 영애의 앞에 서는 자제해야 했는데, 불충한 신하 가 경솔하게 행동했습니다. 벌하시면 달게 듣겠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어요. 제가 사전에 말씀도 없이 백작님을 찾아간 것부터 문제였는 걸요. 그러니까.”

나는 하데스와 눈 맞추며 눈치 줬다.

그는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지만, 다행히 길게 끌지는 않고 마무리 지 었다.

“그래, 뭐. 나중에 찬찬히 들어보 지.”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가렌 백작을 돌아봤다.

걱정했는데 확실히 가스펠 백작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연무장의 일로 가렌 백작과의 사이는 되돌릴 수 없 지 않을까 했는데…….

“한데 영애, 그 영민한 군사는 대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그렇게 여유로운 계책을 낼 만한 인물이라면 전 술을 짜는 데에 있어서도 한 치의 홈이 없었을 거라 봅니다.”

가렌 백작은 다소 흥분한 눈으로 물 었다.

이런, 이런 …….

역시 우리의 와룡선생. 짧은 일화 하나로도 군인의 마음을 이리 손쉽게 사로잡다니.

“그러니까 그분은 …….”

신이 나서 제갈량의 이야기를 더 풀 려다가, 나는 멈칫했다.

여기 중국이 어디 있고 촉한이 어디있어…….

“어, 음……. 고대에 있던, 어디 나라 사람이에요. 제국 말고……. 그분의 일화가 나온 역사서를 관심 있게 읽다가 알게 됐거든요.”

“그렇습니까? 사실 여성이 전술이나 군사들의 이야기에 관심 많기 쉽지 않은데, 놀랐습니다. 제 편견과 무지가 큽니다.”

“흥미로운 천재들의 이야기에 관심갖는 데 성별이 무슨 상관이겠어요. 아, 백작님만 괜찮으시다면, 머무시는 동안 그분의 얘기를 더 해드려도 될까요? 백작께서 흥미로워하실 만한 전술도 많이 펼치신분이거든요.”

쾅!

가렌 백작은 흥분한 눈으로 테이블을 내려치며 말했다.

“좋습니다!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영광이에요.”

우리는 훈훈하게 눈빛을 나눴다.

“저, 저도 들으면 안 돼요?”

맞은편에 있던 아벨이 수줍게 끼어 들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가렌 백작은 환영했다.

“당연하지요, 공자님. 저에게도 공자님에게도 아주 유익한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작님.”

삼국지 최애 와룡선생 제갈량의 일 대기가 크게 한 건 해주는구나.

나는 기대하듯 눈을 빛내는 가렌 백작과 아벨을 바라보며 아주 만족스러 웠다.

그때쯤 하데스는 나를 보고 있었다.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꼬리가 열심히 노력하는 나를 퍽 대견스러워하는 눈 치였다.

그는 느릿하게 놀리던 식기를 내려 두더니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가렌 백작을 향해 물었다.

“백작은 오늘 영애를 제대로만이나 본 소감이 어때?”

하데스의 질문에 잠시 멈칫하던 가렌 백작이 순순히 대답했다.

“말씀드린 것처럼 많이 배웠습니다. 만나 뵙기 전에 영애를 오해했던 게 죄송스러울 정도로요.”

민망해진 내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슬쩍 눈이 마주친 맞은편의 아벨 이 배시시 웃는 게 보였다.

“더불어 전하의 명민하신 결정에도 찬사를 드려야 할 듯합니다. 여태껏 안주인을 들이는 데 신중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아무래도, 영애 같은 분을 기다리셨던 것이겠지요. 큰 뜻을 몰라 뵌 무지한 신하를 용서하십시오.”

와 …….

이건 뿌듯하기보다 쥐구멍에 들어 가고 싶을 정도로 오바스러운 찬양인 데?

제갈량이 이렇게까지 잘 먹혀들었 다고?

와룡선생, 당신은 도대체…….

‘그런데 민망해!’

어색하게 웃으며 진땀 빼는 내가 보 이지도 않는지 하데스는 가렌 백작의 찬사가 꽤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하하하하……!!!”

그의 웃음소리가 식당 안을 쩌렁쩌 렁 울렸다.

“영애가 좀, 그런 편이야.”

코가 쑥 올라간 하데스가 자의식 비 대해진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순식간에 한 마디씩 하던 가신들을 몰아붙인 그는 기세등등했고, 가스펠 백작과 라즐리 백작은 조금 불편한 표정이었다.

어째 표정을 보아하니 저 둘은 이 평화로운 분위기에 편승할 생각이 없 는듯했다.

예상대로, 여태껏 조용히 침묵해오 고 있던 라즐리 백작이 입을 열었다.

“가렌 백이야 관심 있는 분야에 영애가 정통하시니 만족스러웠던 모양이지요. 전하도 아시잖습니까. 이 사람이 군대 얘기만 나오면 눈 돌아가는 거…….”

가렌 백작의 옆에 앉아있던 라즐리 백작은, 친근하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곧 라즐리 백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덧붙였다.

“하나 그것만으로, 영애가 유능한 안주인으로서 적합하다 판단함은 시 기상조가 아닐는지요?”

“뭐야?”

“허허……. 진정하십시오, 전하. 물론 저 또한 영애를 루버몬트의 안주 인으로 맞으신 데에는 전하의 크나큰뜻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발끈하는 하데스를 라즐리 백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그는 다시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자고로 유능한 안주인의 덕목이 란, 영지의 내정에 눈이 밝고 재정 관 리에 한 치의 흠도 없음이 아니겠습 니까?”

“영애는 루버몬트에 온 지 고작 한 달이야. 또 이상한 소리 하면서 꼬투리 잡을 거라면 …….”

“으으으음, 전하.”

라즐리 백작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 개 저으며 하데스의 말을 자르더니, 옆에 앉은 가렌 백작의 어깨를 툭 치 며 물었다.

“가렌 백. 적군이 ‘쳐들어가겠습니 다!’ 하고 쳐들어오는 건 아니지 않 소?”

뜬금없는 라즐리 백작의 질문에 잠 시 멍한 표정을 짓던 가렌 백작이 뻣 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에스클리프 영애께서도 뭐, 루버몬트의 일원이 되실 거라 예상하고 준비하며 자라오셨겠습니까?”

그래, 그건 아니지.

사실 지금도 뜬금없이 예비 공작부인이 되어버린 그림이 나조차도 어이없는 것을.

“하나 이제 영애는 대 루버몬트 공작 가문의 안주인이 되실 테고, 익숙 하지 않아 잘 모르겠다는 변명은 방 패가 될 수 없지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백작님.”

또 욱하려는 하데스가 보여서 나는 식은땀 흘리며 얼른 라즐리 백작의 말을 받았다.

“루버몬트가 어떤 가문입니까? 제 국의 방패, 오랜 수호자의 위명, 그 대가로 이 대륙에 많은 영지를 보유하고 있지요. 여태껏 공사다망하신 전하를 대신해 제가 그것들을 관리하는 데 애를 좀 먹었습니다, 영애.”

라즐리 백작은 빙굿 웃었다.

“그렇지만 이제 한 시름 덜 수 있게 되었지요. 영민한 안주인께서 이 사람의 짐을 나누어 져주실 테니까요.”

“아 ……. 그렇죠.”

매번 느끼는 거지만 가신들의 공격에는 반박하기 힘들 정도로 틀린 말 이 없었다.

유명한 재력가를 이끄는 가신인 라즐리 백작이 지금까지는 루버몬트의 영지 재정 관리에 신경을 써주었지만, 안주인이 생기고 나면 그 역할을 넘겨받아야 함이 마땅했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왔다. 그저 아벨 덕질이나 하려고 북부에 왔던 건 데…….

‘그렇지만.’

안주인 역할은 못 하겠다고 태평한 소리를 할 순 없지.

뭐랄까. 아벨의 엄마도 좋지만 이제는…….

나는 반박할 말을 찾는 모양인지 고 민하는 표정의 하데스를 돌아보았다.

‘하데스의 마누라 포지션도 매우 갖 고 싶다!’

의지가 불타올랐다.

“오랜만에 방문한 김에, 내일은 루버몬트 영지의 재정 관리 내역을 좀 살펴볼 생각이었답니다. 차년 재정 상태도 살피고, 익년 재정 계획도 꾸 리고……. 영애께서 함께해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겠습니다.”

“하아……. 백작, 미안한데 …….”

하데스가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질렀다.

“그거야말로 시기상조야.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안주인의 의 무를 바란다니 너무 가혹하지 않나? 게다가 영애가 지금 몇 살인 줄은 알아?”

“전하는 참으로 이상하십니다. 언 제는, 미리서부터 공작부인에게 걸맞 은 예우를 갖춰 달라 역정을 내시더 니? 이럴 때만 아직이랍니까?”

끙, 하며 하데스가 고개를 비틀었다.

라즐리 백작의 말에는 틀린 데가 없 었다. 툭하면 이미 공작부인이고 내 아내라며 나를 싸고돌았던 하데스이 니 지금 이 상황은 자승자박이다.

“그리고 영애의 나이가 무에 문제 가 될까요? 존경하는 가스펠 백작부인께서는 이미 열다섯의 나이에 전대공작부인을 대신해 모든 루버몬트의 내정을 관리하셨지요.”

라즐리 백작은 두 팔을 들어 느긋하 게 턱을 괸 채, 나와 눈을 맞추었다.

“전하는 물론이고 가렌 백까지 극찬하신 영애이시니, 가스펠 백작부인 은 능히 따라잡으실 역량이리라 신은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나는 라즐리 백작과 눈을 맞춘 채로 바짝 긴장했다.

이 여자, 집안 돈 관리에서는 어떨 까?

뭐, 그런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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