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백작에게 인사하러 나왔다고?”
가스펠 백작이 못마땅한 눈으로 묻 자, 가렌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연무장에까지 나왔단 말이 오?”
라즐리 백작이 재차 묻자, 가렌 백작이 또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거기까지 인사 나갈 만큼 몸 이 나았으면 우리에게도 얼굴을 비쳐 주셔야지. 비싸게 구는구먼.”
가스펠 백작은 여전히 아이샤를 인 정하기가 싫은 모양이었다. 계속 구 시렁대는 그를 향해 가렌 백작이 말 했다.
“성 관리한다고 방에 붙어있지도 않는 그대들을 영애가 어떻게 알고 찾아가겠소? 오늘 저녁에는 만나볼 수 있을 테지.”
아이샤를 옹호하는 듯한 가렌 백작의 말에, 다시 두 백작의 시선이 물끄러미 모여들었다.
라즐리 백작이 물었다.
“만나보니 어땠소? 가렌 백은, 영애 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데?”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첫 만 남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소. 들었던 것만큼 무례하고 경우 없는 여인은 아니던걸.”
“무례하지 않았다고? 그 어린 여인 이 내 아내에게 어떤 모욕을 줬는지 말해줬잖소?”
“그거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 는지 우리는 잘은 모르니…….”
“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닌 가 생각하고 있소. 가스펠 백도 너무 흰 눈으로만 보지 말고, 이번에 영애를 만나면 잘 지켜보는 게 어떻겠 소?”
“아니…….”
“가렌 백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 면 정말로 나쁘지 않은 만남이었던 모양이지. 이거 조금 기대가 되는 군.”
황당해하는 가스펠 백작과는 달리 라즐리 백작은 홍미로움으로 눈을 빛냈다.
가렌 백작이 제 콧수염을 만지작거 리며 중얼거리는 라즐리 백작을 바라봤다.
무역 천재, 괴물 거부라고 불리는 크레센타의 정상급 재력가 라즐리 백작은 세 가신들 중 가장 깐깐한 사람이었다.
신중하고 시류에 잘 편승하는 눈치 가 있었으며 머리가 좋아 손대는 사 업마다 대박.
날카롭고 단정하게 정돈된 남색의 콧수염 끝을 버릇처럼 슬쩍 매만지는 라즐리 백작의 홍미로운 표정을 보며 가렌 백작은 생각했다.
‘라즐리 백도 만만하지는 않은 사람인데. 저쪽과도 고생 좀 하겠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가렌 백작은, 자기가 내심 아이샤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
정식으로 세 가신을 한꺼번에 만나 게 되는 저녁 식사 자리를 앞두고 하데스는 걱정이 많았다.
듣기 싫은 소리를 해도 한 귀로 홀릴 것, 너무 무례하게 굴면 한마디 해 줄 것, 짜증 나게 하면 자기가 막아줄 테니 그냥 무시하고 식사에 열중할 것…….
여러당부의 말이 있었지만 나는 되 레 그걸 한 귀로 흘렸다. 하데스의 말 대로 했다간 폭군 남편 뒤에 숨어 가신들의 열이나 올리는 얄미운 안주인으로 보일 게 뻔했다.
아벨은 왜인지금세 커진 나를 보며 좀 아쉬워하는 듯했지만, 곧 다행히 라며 안겨왔다.
하데스를 상석에 두고 아벨과 마주 앉은 채, 나는 무시무시한 세 가신들 과의 첫 대면을 맞았다.
50대 초중반인 비슷한 나이 대의 가신들이었지만 가스펠 백작이 가장 늙어 보였다. 희끗희끗 센 흰머리와 인상 깐깐해 보이는 5대5 앞머리는 여전했다.
아, 그리고 가장 걱정스러웠던 가렌 백작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일단 무슨 일만 생기면 하데스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르고 보는 가스펠 백작내외에게 시달렸던 터라, 가렌백작도 연무장의 일을 하데스에게 고 해바치 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병사들이 안타까워 끼어들긴 했지만, 주제넘게 군 점이 분명 있었다고 생각하기에 하데스에게 한 소리 듣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데스는 연무장의 일을 전 혀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굳이 불 난 집에 부채질할 필요는 없겠지. 가렌 백작이 그 일을 묻고 넘 어간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해서 나는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결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게 없던 정도 탈탈 털렸을 게 뻔한데. 왠지 가렌 백작은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가끔 흘 깃거리는 가스폘 백작과는 좀 달랐다.
타이틀만 군벌 귀족은 아닌 듯 그는 지루한 전쟁 얘기를 하데스와 나누곤 했는데 이따금씩 내게도 말을 걸었다.
“게르노아의 움직임이 심상찮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더군요. 역시 2차 전쟁이 일어났을 때 왕권을 박탈하고 제국에 완전 복속시켜야 했습니다.”
“그래? 뭐, 전쟁 나면 또 이겨주면 되지.”
“만약 또 문제를 일으킨다면 아예 지도에서 파내는 것이 좋겠지요. 산트크리아처럼 이름만 남은 망국으로만들어 주변국에 본보기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걔네도 살려고 그러는데 그렇게까 지 할 거 있나? 카지트 수준으로 큰 나라도 아니고 딱히 위협적이지도 않 잖아.”
하데스는 가렌 백작의 얘기를 매우 지겨워했다. 아니, 그가 지겨워한다기보다는, 내가 지루해할까 걱정되는 지 중간중간 시선을 보내며 눈치 봤다.
그렇지만 딱히 내게 흥미 없는 주제는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꽤 흥미 있을지도 몰랐다.
말했던가. 내가 덕질했던 명작 중에는…….
“영애는 혹 게르노아에 대해 아십 니까? 그들이 일으킨 두 번의 전쟁에 서 전하가 제국에게 승리를 안겨다주 셨지요.”
미지근한 하데스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가렌 백작은 불편한 표 정을 짓다가 타깃을 돌려서 내게 물 었다.
“들어보기만 했어요. 그랬군요.”
“재미없는 얘기 좀 그만하지?”
내게까지 전쟁 얘기를 늘어놓는 가렌 백작을 하데스가 말렸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말했다.
“전하는 항상 전술 따위 필요 없는 완벽한 숭리를 쟁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겠죠.”
그냥 다 태워버리면 되는데 전술이 뭐가 필요하겠어……?
나는 새삼 하데스의 능력에 몸을 떨 며 계속 가렌 백작의 말을 들었다.
아무래도 하데스 찬양은 그의 문제 점을 지적하려는 전초였던 듯, 가렌 백작은 곧바로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이해 가지 않는 것은, 전하 께서 벌써 두 번이나 이어진 전쟁에 서 그들을 완전히 복속시키지 않으셨 다는 거지요. 여전히 그들은 왕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국 황실에서도 전하의 결정을 못마땅해하고 있지요.”
“아, 그렇군요.”
“영애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 십니까?”
“아니, 백작…….”
하데스가 이마를 짚으며 길게 한숨 쉬었다.
나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 보 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백작님이 말씀하신 대로 전하는 대단하신분이에요. 다 생각이 있어 그러셨겠지요.”
“대꾸하지마, 아이샤. 백작은 뭐 식사 중에 사람 체하게 할 일 있소?”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는 하데스에 도 가렌 백작은 멈추지 않았다.
“무슨 생각이신 건지, 이 부족한 신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머리 나쁜 이민족들이 전하의 은혜도 모르고 또 기어오르려는 움직임을 보 이는데, 대체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후…….”
금방이라도 폭발하려는 하데스가 보였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그의 허벅지를 살짝 치며 눈치 줬다.
다행히도 알아들었는지, 하데스는 나를 돌아보며 천천히 심호흡 했다.
뭐라도 한마디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아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들려드려도 될까요?”
식당에 앉은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모 여들었다.
“제가 알던 재상 중에는 희대의 전 략가로 평가받는 분이 계시지요. 그 분의 일대기가 퍽 놀라워서 흥미롭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대학 시절 퍽 재미나게 읽었던 책을 머릿속에 어렴풋이 떠올리기 시작했다.
뭐냐고?
스펙터클한 중국사를 고스란히 담 아낸 삼국시대 역사서, 삼국지(三國志).
그래, 그것도 덕질했었다.
나뿐인가? 삼국지라면 남녀불문 수많은 덕후들을 만들어 냈지.
“그분을 군사(軍師)로 들이고자 왕 이 초라한 오두막을 세 번이나 직접 찾아갈 정도였으니, 확실히 능력으로는 의심할 데 없는 인물이 었겠지요.”
최애는 제갈량, 차애는 유비.
천재 제갈량을 얻기 위해 그의 집을 세 번이나 찾아간 유비의 삼고초려 (三顧草廬) 일화는 유명하다.
물론 이 자리에 있는 가신들은 전혀 모르겠지만!
“왕을 직접 세 번이나 행차하게 했 단 말입 니까?”
가렌 백작이 흥미로운 눈으로 물었다.
“예. 뭐,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그 만한 간절함이 필요한 법이니까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는 곧바로 동의했다.
“결국 군사가 된 그분이 이민족의 왕을 일곱 번 사로잡았다가 일곱 번 놓아준 일화가 있답니다. 종국에는 그 이 민족의 왕이 감복해 제 발로 항 복했지요.”
“예? 일곱 번이나 전쟁을 치르는 동 안 나라를 복속시키지 않았다는 겁니 까?”
칠종칠금(七縱七擒).
제갈량이 남만왕 맹획을 일곱 번 잡 았다가 일곱 번 놓아준 이야기다. 종 국에 우리 와룡선생께서는 남만을 복 속시키셨지.
오랜만에 떠올린 삼국지 최애 제갈 량의 이야기에 나는 조금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드릉드릉, 덕질 시동 건다.
“대단하지 않나요? 그분께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번 전쟁을 해도 적 국의 왕을 사로잡을 수 있을 거란 확 신이 있었던 거예요.”
“과연…….”
“적국의 왕은 일곱 번 사로잡히는 동안 별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항복하기를 거부했죠. 한 번은 실수로 잡 혔으니 항복 못 한다, 또 한 번은 부하에게 배신당해서 잡혔으니 항복 못 한다 …….”
“아니, 뭔 말도 안 되는? 그 군사는 그걸 다 인정하고 도로 놔줬다는 말 입니까?”
“네. 거기에서 느껴지지 않으시나 요? 어디 해볼 테면 해봐라, 싶은 그 여유!”
“흠…….”
“한 번은 어땠는지 아세요? 그분이 너무 비겁한 계책만 쓰시니 도저히 항복 못 하겠다고 하기도 했죠.”
가렌 백작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얘기를 듣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부끄럽군요. 한 나라의 왕이 라는 자가…….”
“한데 그분은 그마저도 인정하며 왕을 풀어줬어요. 그런 식으로 일곱 번. 정말로 일혼 번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더라도 결과는 똑같았겠죠. 그분 이 왜 그러셨는지 아시겠어요?”
나는 가렌 백작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무력으로 복속시켜 당장 무릎 끓리기보다는…….”
“……아.”
뭔가 깨달은 듯한 가렌 백작을 향해 내가 웃으며 덧붙였다.
“……힘의 차이를, 확실히 보여주 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일곱 번이나 항복하지 않을 만큼 의지를 갖 고 있었다면, 억지로 복속시켰더라도 내란을 일으키거나 하는 또 다른 문 제가 생겼겠지요.”
“그렇겠군요.”
“결국 그런 식으로 무릎 꿇린 왕에게서 그분은 진심 어린 충성을 얻어 냈어요. 나라는 커졌고 이민족들이 합쳐졌지만 내부의 결속은 탄탄했달까요.”
“그걸, 염두에 두고 행동했던 거였 군요.”
“그런 걸 보면 그분의 전략이 마냥 생각 없는 행동으로 보일지 몰라도, 실은 엄청 치밀했다는 거죠.”
“대단하군요.”
우리 와룡선생의 일화에 감동한 듯한 가렌 백작을 보며, 나는 슬슬 대화를 마무리할 타이밍을 잡았다.
사실 하데스가 무슨 생각으로 게르노아를 자꾸 풀어주는지는 알 길 없 으나…….
모르긴 몰라도 큰 그림 그리고 있다는 식으로 추켜세워주면 되지 않겠는 가.
“그러니까 백작께서도 전하를 믿어 주세요. 다 생각이 있으시겠죠.”
식은땀 한 줄기를 쓱 닦으며 나는 하데스를 돌아봤다. 그는 눈만 껌뻑이며 나를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