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백작의 푸른 눈이 갈피를 잃고 흔들 렸다. 그는 한참 말없이 나를 바라보 다가 곧 몸을 돌렸다.
곧 루버몬트의 안주인이 될 귀족 영애가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물러나 지 않을 수는 없었을 테다.
다만 엄 청 자존심 상하고 화가 나겠 지.
적당히 가신들에게 잘 보이려던 계 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 나 뭐, 후회는 없었다.
멀어지던 백작의 뒷모습이 아예 보 이지 않게 되자, 억지로 힘을 주고 있 던 다리가 풀렸다. 순간 내가 휘청거 렸다.
“아.”
다행히도 아자르의 팔이 단단히 나를 잡아준 덕분에, 연무장 바닥에 널 브러지는 추태는 면할 수 있었다.
나는 묘한 표정의 아자르를 돌아보 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
“아, 맞다.”
개처럼 두들겨 맞은 병사가 뒤늦게 걱정되었다. 나는 여전히 바닥에 누 워 신음을 흘리는 병사를 향해 다가 갔다.
무릎을 꿇고 살핀 병사의 상태는 심 각해 보였다. 첫 발길질에 이미 정확 히 급소를 가격당한 걸 내 눈으로 똑 똑히 확인했었다.
숨도 못 쉬고 꺽꺽거리는 병사를 보 고 있자니 머리가 핑 돌았다.
나는 다급히 앤을 돌아보며 외쳤다.
“앤!”
“네, 아가씨! 의원을 불러올까요?”
“아…….”
잘못 맞으면 즉사까지 하는 급소를 제대로 얻어맞은 병사를, 의원이 본 다고 뭐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 텐가.
그보다도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의원을 불러오려는 앤을 향해 고개 저 었다.
“아냐, 됐어.”
나는 병사의 명치 부근에 손을 올려놓고 정신을 집중했다. 손목에서부터 흘러나온 마력이 어렵지 않게 회복의 이능을 구현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고 통스러워하던 병사는 갑자기 놀란 토 끼 눈이 됐다. 순식간에 사라진 고통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때쯤 연무장에 있던 정예군들의 시선은 전부 나를 향해 있었다.
무리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우오오…….”
“이제 괜찮아요?”
연무장의 흙먼지를 뒤집어쓴 병사의 얼굴은, 자세히 보니 상당히 앳되 었다. 기껏해야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년이었다.
그에 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 나이에 죽어라 추운 북부에서 마 수 토벌하는 팔자도 서러운데 군대 폭력까지 감당해야 한다니.
“여, 영애…….”
발딱 일어난 병사가 후다닥 무릎 굽 혀 나와 마주 보고 앉더니 바닥에 이마를 딱 붙이며 소리쳤다.
“가, 감사합니다!!!”
“어어, 아니예요. 이렇게까지 인사 안 해도 돼요. 상처 나니까 얼굴 들어요.”
바닥과 딱 붙은 병사의 이마에 살짝 손을 넣어 띄우자 그가 흠칫하며 재 빨리 고개를 들었다.
뺨이 붉어진 채 당황해 어쩔 줄 몰 라 하는 병사의 입가에는 미처 마르 지 않은 토한 피가 그득했다.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드레스 소매 안쪽에 챙겨뒀던 손수건을 꺼내 병사의 입가를 대충 닦아주었다.
“어, 저, 어, 영애, 어…….”
“이제 숨 쉬는 거 괜찮죠? 더 불편 한 데는 없고?”
“예! 멀쩡합니다!”
“휴…….”
그래, 딱 그때서야 긴장이 풀린 듯했다.
어렸을 때, 전생에서 아버지에게 맞 았던 기억이 있다. 그게 꽤 트라우마 가 되었는지 이후로는 일방적인 폭력 묘사가 나오는 영화도 못 봤던 나였다.
그러니까 실로 오랜만에 폭력의 현 장을 목격한 터라, 태연하려고 해도 힘들었다.
긴장 풀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데 여전히 나와 마주 보고 앉아있던 병사가 벌벌 떨었다.
“여, 영애…….”
“네?”
“어, 어디 다치셨습니까? 왜, 왜, 왜 우세요?”
“아, 제가요?”
급히 뺨을 만져보니 정말이었다.
긴장이 풀린 나머지 나도 모르 게…….
“놀라서, 놀라서 그래요. 놀라서. 저도 조금 무서웠거든요.”
나는 걱정하는 병사를 달래며 몸을 일으켰다. 힘이 안 들어가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는데 눈앞에 굵은 손 이 뻗어졌다.
올려다보니 아자르였다. 잡고 일어 나라는 듯 그는 말없이 손만 뻗은 채 나를 기다려주었다.
고마워요, 인사하며 아자르의 팔뚝을 잡자 굳이 다리에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내민 손은 부축해도 괜찮냐는 허락을 구하는 거였는지, 곧바로 두 팔을 뻗어 나를 단단히 잡은 아자르가 덜 렁 몸을 일으켜주었다.
“고마워요. 어휴…….”
식은땀 흐르는 이마를 훔치며 내가 말했다.
“나도 한 대 맞는 거 아닌가 싶어서 진짜 겁먹었어요.”
“무슨.”
“난 잘못 맞으면 죽었을 거야.”
“가렌 백작이 여자 때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아자르는 내 걱정에 피식 웃었다.
“만약 그런다고 하면 제가 보고만 있을 개새낀 아닙죠.”
“하하…….”
퍽 든든한 위로에 나는 아자르의 팔 뚝을 톡톡 치며 인사를 대신했다.
“괜히 내가 끼어들어서 일 키운 거 아닌가 싶어 미안하네요.”
“아뇨. 이 새끼들 표정 보면 모르시 겠습니까. 지금 감동받아서 무릎으 로 연무장 백 바퀴도 돌 것 같은데.”
아자르의 말에 병사들을 돌아보니 정말로 부담스러운 눈빛들이 한가득이었다.
으, 이런 시선 집중은 언제나 어색 했다. 몸이 간지러워진 내가 뒷걸음 질 쳤다.
슬슬 돌아가려고 여전히 나를 붙잡 고 있는 아자르의 팔을 떼어내려는 데, 문득 그의 뺨이 눈에 들었다.
얼마나 제대로 얻어맞았는지 짧은 새에 눈에 띄게 부풀어 있었다.
기왕 봉사한 거 마지막까지 깔끔하 게 하자.
키 차이가 대단해서 까치발을 들고 팔을 쭉 뻗어야 아자르의 뺨에 겨우손이 닿았다. 놀란 그가 커진 눈으로 멈칫했다.
정신을 집중하고 부드럽게 뺨을 어 루만지자 회복의 이능이 한순간 아자르의 부은 뺨을 되돌려놓았다.
역시 엄청나게 좋은 능력이다. 만족스러워.
답지 않게 여전히 놀란 얼굴로 어버 버거리는 아자르의 어깨를 툭툭 두드 리며 수고하세요, 인사한 뒤 나는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반나절도 안 지났는데 진이 쏙 빠지는 하루였다.
***
연무장에서의 만남 이후, 방으로 돌아온 로마르디오 가렌 백작은 가만히생각에 잠겨 있었다.
처음 뒤돌아 연무장을 나올 때만 해도 그는 화가 많이 나 있었다.
루버몬트의 군벌 귀족 가신으로서, 군대를 관리하는 것은 그 누구도 참 견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이었다. 아는 게 하나도 없을 어린 귀족 영애에게 가르침 받을 만한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아이샤의 행동에는 화가 났 지만, 그녀가 들었던 것만큼 무례하 고 생각 없는 여인은 아니라는 게 가렌 백작의 판단이었다.
‘가스펠 백작부인에게 그렇게 무례 하게 굴었다는 게 사실일까?’
아직 작위도 받지 못한 주제에 안주 인 행세를 하며 가스펠 백작부인을 능욕했다는 어린 영애의 이야기를 전 해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나이 먹은 가신들이라 당연한 말이 겠지만 전통과 예의를 중시할 수밖에 없었다. 가렌 백작과 라즐리 백작은 만나보지도 않은 영애에게 실망부터 했다.
‘눈치도 있는 것 같고, 그렇게 멍청 하지도 않은 것 같고…….’
하나 기대도 안 했던 것치고 어린 예비 공작부인은 자신과의 첫 만남에 서 퍽 똑 소리 나게 굴었다.
그녀가 공작부인이 되고 나면 명백 히 가신들의 윗사람이다. 어리다고 너무 휘둘리는 것도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가렌 백작의 입장에서는 실망스 러운 모습이었을 터.
그런데 어땠지?
적당히 자신의 위치를 확인시키며 주눅 들지 않고 대화하는 모습이 제 법 강단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가신인 자신을 대 우해주지 않고 깔아뭉갠 것도 아니었다. 명백한 가신의 영역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는 의사를 밝혔기에, 병사들 앞에서도 딱히 우스워질 일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귀족 신사로서의 덕목을 들먹이며 은근히 병사들을 싸고도는 것까지, 꾀가 많아 보이기도 했지.
‘하긴, 전하가 루버몬트의 안주인으 로 아무나 들이실 분인가.’
사생아를 후계자 삼은 것도, 봐줄 건 얼굴뿐이라는 한미한 귀족 여인과 결혼하려는 것도, 가스펠 백작의 말 대로 그저 젊은 날 치기가 아닌가 했 는데…….
아이샤의 얼굴을 떠올리며, 가렌 백작은 아벨을 후계 삼은 하데스의 선택에 대한 불만까지 다시 한번 재고 할 정도였다.
가스펠 백작부인에게 경우 없이 굴 었다는 그녀의 진짜 성격이 궁금했기에 어린 병사를 더 과격하게 다룬 것도 있었다.
뭐, 예상했던 대로 아이샤는 흥분하 며 끼어들었지만 그때에도 결코 건방 지거나 막 나가지는 않았다.
게다가…….
‘분내 나는 여인들은 군대 일에 무 지한 줄알았는데.’
정말로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적어 도 여태껏 백작이 봐 왔던 여인들 중 에는, 남성들의 전유물인 군대와 전 쟁에 관심 있거나 유식한 이들은 없 었다.
그러나 자신과 똑바로 눈 맞추며 구 구절절 병사들을 옹호하던 아이샤는 좀 달랐다.
군대와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 면서 그럴싸하게 입만 놀린다기보다 는, 확실히 뭔가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 같지 않았는가?
그리 긴 대화가 아니었는데도 가렌 백작은, 그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가만있자. 가스펠 백작부인에게 한 소리 한 것은 공자 때문이었고, 나를 막은 건 성의 병사들 때문이었고…….”
아직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아이샤 에스클리프, 그녀는 앞으로 자신이 주인이 될 루버몬트의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일견 필사적으로 노력하는이듯 보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버몬트에 충 성을 다하는 가신으로서, 그런 모습 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똑똑.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 고 있는 와중, 누군가가 가렌 백작의 방을 찾았다.
“가렌 백작, 안에 있소?”
가스펠 백작의 목소리였다.
“아, 들어오시오.”
허락의 말이 떨어지고 문이 열리자 보인 것은 가스펠 백작과 라즐리 백작이었다.
둘은 익숙한 걸음으로 한 자리씩 차 지하고 앉아 곧바로 구시렁거리기 시 작했다. 그들 사이로 가렌 백작이 몸을 옮겨 앉았다.
“아니, 뭐 얼마나 아프길래 이틀이 지났는데 코빼기도 안 비칠 수가 있 단 말이오?”
“진짜 아프겠소? 꾀병이지. 벌써부 터 공작부인이라도 된 양 거들먹거리는 거요. 내 아내에게 그 난리를 피우 고 돌아갔다는 말 듣고도 이럴 걸 예 상 못 했나?”
라즐리 백작과 가스펠 백작이 차례 로 한마디 했다.
어쩌다 코뼈가 내려앉았는지 엉성 하게 치료해두어 퍽 우스운 가스펠 백작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가렌 백작이 말했다.
“아, 에스클리프 영애 말인데. 몸이 나아졌다고 직접 내게 인사하러 연무장까지 나왔었소.”
가렌 백작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두 백작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눈을 깜빡이는 두 백작의 얼굴을 바 라보며 가렌 백작이 덧붙였다.
“얼굴을 보아하니 꾀병은 아닌 것 같았는데. 굉장히 마르고 창백해 보 이기도 했소. 그 몸을 끌고 인사하겠 다고 연무장까지 나와서 조금 놀랐 지.”
두 백작의 고개가 갸웃하니 기울어 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나게 영애의 괘씸함을 논하던 가렌 백작이 맞는지 의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