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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엄마가 되어버렸다-85화 (85/221)

85화.

제법 날카로운 눈매가 깐깐히 나를 훑었다.

한 올도 허투루 빠지지 않게 말끔히 고정시켜 넘긴 금발과 칼같이 다듬어 진 턱수염은 가렌 백작의 성격을 여 실히 드러내주고 있었다.

군벌 귀족인 그는 뭐랄까, 고전적인 군대 상관의 모습을 그대로 표방하고 있었다.

루버몬트와 황실 다음으로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제국의 검이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유지해왔던 가문.

수틀리면 여느 귀족들처럼 말로 뭉 개기보다는 주먹이나 칼이 먼저 나갈 사람이었다.

물론 미치지 않고서야 내게 그런 짓을 하진 않겠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만히 나와 시선을 맞추던 가렌 백작이 말했다.

“군의 기강이 흐트러진 점이 있어체벌 중이었습니다. 군벌 가문의 가신으로서 저는 전하께 루버몬트군의 사정을 살피어도 좋다 허락받은 사람입니다.”

백작은 차분히 말했다. 권리도 없이 루버몬트군의 사정에 관여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 었다.

뭐, 그렇겠지. 하데스의 허락도 없 이 이런 짓을 하는데 아자르가 멀뚱 멀뚱 서서 저리 입 닫고 있을 리는 없잖은가.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 며 가렌 백작이 덧붙였다.

“귀족 영애에게는 낯선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기강과 질서가 중요한 군인들에게는 익숙한 일이니 과한 걱 정은 접어두시지요.”

드레스 차림의 어린 귀족 여자가 끼 어들 데는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렇 게 말하는 백작은 다소 불쾌해 보였다.

나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안쓰러운 병사들에게 옮겨가는 시선을 애써 막 으며 다시 한번 부탁했다.

“로만 경의 병사들은 테그롯 산맥에서 마수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지얼마 안 되었답니다. 아직 몸도 다 추 스르지 못한 걸로 아는데 조금 과해 보여서요.”

“영애.”

과묵하고 우직한 전형적인 군인 캐 릭터인 가렌 백작은, 그나마 잔소리 심한 가신들 중 가장 아벨을 스트레 스 받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었다.

그러나 명백히 ‘자신의 영역’이라고 여기는 군대 문제에서는, 이 남자, 어 떨까?

예상했던 대로 한낱 귀족 영애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참견에 적잖이 노했는지, 백작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영애가 자꾸 이런 부탁을 하시는 건, 전하에게 군대의 기강을 바로잡 으라 명받은 가신에 대한 예우를 해 주지 않으심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영애의 말을 듣고 병사들을 풀어주면 이들이 저를 어찌 생각하겠는지요?”

“백작님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하나 백작께서도 첫 만남인 귀족 여인에 대한 예우가 부족한 건 아닐는지요? 태어나 한 번도 이런 무자비한 체벌 현장을 목격한 일 없어 지금 심히 가슴이 뛰고 무섭습니다. 군벌 귀족이라 하시어 레이디를 배려하는 신사의 덕목까지 내치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네 권리에 상관하거나 위계질서에 흠집 낼 생각은 없지만 당장은 체벌을 거두어주란 말이었다.

머무르는 내내 시달릴 병사들을 계 속 싸고돌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 순 간 한 번쯤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가렌 백작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내 말을 곱씹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렇군요. 영애의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일부러 제게 인사까지 하러 나와 주신 분을 놀라게 해 드렸습니다. 이 사람이 전쟁터 굴러먹는 군인들만 상대하느라 귀족 신사의 덕목에 무지하였습니다. 용서하시 지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백작님.”

나는 바로 인사했고 가렌 백작은 아자르에게 눈짓했다. 기다렸다는 듯아자르가 병사들을 일으켰다. 일어나는 움직임마저도 책 잡혀서는 안 되 는지 하나같이 칼 같았다.

한 시름 놓은 그 순간이 었다.

맨 앞줄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오 랜 체벌에 쥐라도 난 모양인지 일어서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한 번 휘청거렸다.

크게 비틀거리거나 넘어진 것도 아니고, 정말이지 아주 찰나의 순간, 티 도 안 날 정도로 삐끗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서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 켜본 가렌 백작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부족한 놈이, 보는 눈도 있는데 수치스럽게…….”

백작은 그대로 다리를 들어 병사의 명치 부근을 거세게 발길질했다.

헉,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병사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엄마나!”

“후…….”

놀란 앤이 반사적으로 소리 질렀고 나는 차마 못 보겠는 광경에 고개를 틀었다.

백작은 아주 화가 난 모양이었다. 자기가 교육시키고 있던 병사가, 내가 보는 앞에서 얼타는 모습을 보인 게 적잖이 수치스러운 듯했다.

그래, 가렌 백작, 원작에서 묘사됐던 그는 확실히 이런 사람이었지.

명예에 죽고, 명예에 살고, 곧 죽어 도 흐트러짐 없는 완벽한 군인들을 키워내는 전형적인 군벌 귀족.

급소를 무자비하게 가격한 걸로도 부족했는지 돌린 고개 뒤로 연신 발 길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따금씩 병사의 죽어가는 신음이 섞여있었다.

“저기요, 백작님.”

참지 못하고 내가 끼어들려던 때였다. 큰 덩치의 아자르가 쓱 움직이자 기척이 커 바로 느껴졌다.

“그만하시죠.”

그때에야 나는 겨우 고개를 돌려 상 황을 볼 수 있었다. 아자르가 무심한 표정으로 백작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백작도 상당히 풍채가 좋았으나 아자르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2미터의 거구가 내려다보니 백작은 꼭 고 목나무의 매미 같았다.

아자르가 막아설 것은 전혀 예상 못 했던지, 백작은 적잖이 놀란 눈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만하시죠?”

“예. 이러다 뒤지겠습니다.”

과연 아자르의 말대로였다. 짧은 사 이 얼마나 발길질을 해 댔는지 병사는 입에서 피까지 토하며 정신 못 차 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복부만 집중 적으로 가격한 듯했다.

그런 병사의 상태는 관심도 없는지 허, 허…… 하며 백작은 그저 자길 막 고 선 아자르에 황당해만 했다.

“지금 이게, 영애도 있는 앞에서, 무슨 행동이지? 아자르 로만?”

분노한 백작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중간중간 말이 무시무시하게 끊 기는 걸로 봐서는, 조금 화가 난 게아니어 보였다.

이건 무슨 상황일까? 굳이 비유하자 면 이병을 무자비하게 패고 있는 병 장의 앞을, 일병이 막고 서선 ‘적당히 좀 하십쇼.’ 하고 한마디 한 느낌이랄 까.

다시 말해 폭풍전야. 다음 타깃은 아자르가 분명했다.

쫘—악!

내 예상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이까지 악문 백작이 두꺼운 손에 잔 뜩 힘을 실어 아자르의 뺨을 올려붙였다.

웬만해선 꿈쩍도 하지 않을 듯한 아자르의 고개가 거의 꺾이듯 돌아갔다. 나이를 먹어도 군인 힘은 어디 안 가는 모양이었다.

“건방지게 어디서…….”

“백작님.”

나는 그들 가까이로 다가가 아자르의 팔을 잡고 살짝 밀었다. 한 대 더 맞을까 걱정되어서였다.

백작은 나를 내려다보며 사과했다.

“영애에게 이런 모자란 모습을 보 여 심히 부끄럽습니다. 위계질서라곤 없는 군대라니요. 다 저의 교육이 부족한 탓입니다.”

“아뇨, 로만 경이 아니었으면 제가 말렸을 거예요. 레이디를 배려해주시 겠다고 한 지 일 분도 안 되었습니다. 이건 일부러 저 보란 듯 행동하셨다 고 받아들이면 되겠지요?”

백작은 가늘게 눈을 뜬 채 나를 잠 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백작님의 의도를 도저히 모르겠군요. 심히 불쾌합니다. 가신들에 대한 예우가 중요하다는 건 압니다만, 곧 이 루버몬트의 안주인이 될 저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겠어요.”

흥분한 목소리가 흐트러지지 않도 록 신경 쓰며 나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전하로부터 대체 어떤 권리를 약속받으셨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있는 정예군들은 루버몬트의 병사들입 니다. 이 자리에서 병사들의 상관은 로만 경이지, 백작님이 아니예요.”

내 따귀까지 휘갈기진 않겠지만 가렌 백작의 무자비함을 눈앞에서 지켜본 이후라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자르의 팔을 잡고 있던 내 손이 덜덜 떨렸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군대마다 분위기는 다른 법이지 않던가요? 로만 경이 이끄는 루버몬트 정예군은 자유로운 전투병들입니다. 같은 군인이 아니라 지능 낮은 마 수들을 상대하니, 백작의 군대처럼 전술에 연연하지 않고 전장에서도 그 때그때 상황에 따른 자율적인 판단을 중요시하며 싸우는 데 익숙하지요.”

내 말에 백작은 놀란 눈치였다.

확실히 군대에는 관심도 없고 지식 도 없을 귀족 영애가 하는 지적이라기에는 놀라울 법했다.

하나 빌어먹을〈페르소나〉에는 아벨의 전투 장면이 거의 절반을 차지 했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인지 기억나 지도 않을 정도로 그 책을 정독한 사람이었다.

호위병과 전투병으로 나뉜 루버몬트의 군대 체제, 전투병들 중에서도 정예군과 보조군으로 갈려 활약하는 병사들, 그들의 전투 스타일 같은 것 전부, 빠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위계에 연연하 게 하고 폭력적으로 기강을 잡아 교육시킬 분위기의 군대는 아니란 말입 니다. 정말 백작의 교육이 우리 정예군에게 도움되는 것 맞습니까?”

“레이디가 어찌 남성들의 …….”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도 또 뻔한 소릴 하려고 하시는군요. 아는 게 없을 거라는 추측은 사양이고, 가신의 권리를 존중해달라는 요구도 이제는 거절하겠습니다.”

단호한 내 말에 가렌 백작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전 곧 루버몬트 공작부인이 될 사람이고, 여기 이 병사들은 내 성의 안위를 지키는 소중한 이들입니다. 백작이 선을 넘어 우리 병사들을 휘두 르려는 것을 그저 지켜보기만 한다면 그야말로 부끄러운 일이겠지요.”

“영애.”

“무자비한 광경을 목도해 지금 제 정신이 그다지 가지런하지 못합니다. 의미 없는 말싸움을 이어가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쯤 하고 돌아가 주세요. 혹 백작님께 예우를 다하지 못한 일로 전하께서 저를 꾸중하신다면 그 때 달게 듣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까 제발.”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마지막으 로 심호흡하곤 부탁했다.

“여기까지만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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