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숙인 채 화를 다스리는 하데스를 보며 내가 조심스 레 물었다.
“이거 그, 저한테 약 주신 분 맞 죠?”
“……그래.”
“토속성 능력자라고 하지 않으셨어 요? 대체 풍속성의 능력은 어떻게 쓰신 거죠?”
당장 나를 원래대로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사실보 다는, 그의 능력에 더 흥미가 갔다.
한껏 궁금해하는 내 얼굴을 잠시 바 라보던 하데스가 살짝 눈을 굴리다가 설명했다.
“좀 복잡한 개념이야. 놈이 제약사 업을 하려다가 마탑에서 쫓겨났다고, 전에 한번 얘기했었지?”
“네.”
앤을 불러와 내 옷을 만들어줄 때, 그 토속성 최종 개방 능력자에 대한이야기는 조금 전해 들었었다.
황실에서 금지한 제약사업을 꾸역 꾸역 벌이려다가 지명수배자가 되었 다는 그의 사연은 퍽 안타깝기도 했다.
구체적인 원리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제약사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면 마력 수치가 미미한 이들이나 아예 마력이 존재하지 않는 타국인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신이 내린 능력이자, 제국인들이 ‘군림’할 수 있는 마법이라는 가치가 비로소 상용화된다는 것.
마법과 권력을 독점하고 싶은 황실 이제약사업을 벌이려는 그를 경계할 만했다. 나 같아도 지명수배 때릴 거 야.
“각 능력자들이 힘을 발현할 때 그 마력을 실재화해서 수집하는 게 제약 사업의 기본 원리지. 수집한 마력을 옹축해서 약의 형태로만드는 거야.”
“그게, 가능해요?”
“창조의 이능으로는 가능해. 한데 지금 제국에서 창조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건 둘뿐이지. 황실의 마탑주 랑, 그 녀석.”
“그러니까 풍속성 능력자의 도움을 받아서 그의 마력을 수집한 뒤에, 전 음 능력이나 순간이동 능력을 발현할 수 있는 물약을 만든다는 거네요? 지금 그분은 그걸 이용해서 여기로 오 고 계시는 거 맞죠?”
“그런 모양이야.”
“와, 제대로 들어보니 엄청 획기적 인 사업인데요? 잘 발전시키면 다들 편리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제국 황실이 두 눈 시퍼렇 게 뜨고 있는 한 통용될 일은 없겠지만.”
“그건 아쉽네요.”
“나도 딱히 바라진 않아. 내가 필요 할 때 쓸모만 되어주면 그만이거든.”
과연 냉정하고 실리에 밝은 공작 전하의 성격답다.
대단한 능력자와의 만남을 앞두고 내심 설레어하던, 그 와중이었다.
퍽!
“악!”
“깜짝아!”
하데스의 집무실 테라스 창문 쪽에 서 굉장한 소리가 났다.
단단한 유리를 미처 깨지 못하고 충 돌한 모양이었는데, 외마디 비명만 들었을 뿐인데도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이지 짐작이 갔다.
남의 능력을 쓰면서 생기는 시행착 오이기라도 한 걸까?
‘더럽게 아프겠다.’
머리를 세게 박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는 갈색의 로브 덩어리를 바라보는 내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하데스가 후 다닥 걸어가 테라스 문을 열어젖혔다.
“너 이 개새끼! 오늘이 네놈 세상 하직하는 날이다!”
“악! 함만 봐주시어라!”
하데스 덩치의 절반밖에 안 되어 보 이는 왜소한 남자는 아주 이상한 말 투를 썼다.
무작정 멱살을 잡아 올리는 하데스의 행동에 남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자연스럽게 로브가 벗겨지고 보인 것은 결 좋은 은발과 퍽 개성 있게 생긴 얼굴이었다.
‘장님인가?’
눈을 감고 있기에 그런 줄로만 알았 는데, 살려 달라 쫑알쫑알 절박하게 비는 얼굴을 자세히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가느다랗게 뜬 실눈 사이로 오묘한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감춰졌다 반복했다.
“사, 살려주시어라아아!”
“시끄럽고 약부터 내놔!”
“공작부인은예?!”
위협적인 하데스의 행동에도 남자의 반응은 퍽 장난스러웠다.
아무래도 말처럼 진짜 죽이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인가?
히죽 웃으며 남자는 나를 찾으려는 지 집무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테이블 위의 나를 발견한 건 금방이었다.
“부인!”
그는 꼭 나와 십년지기라도 되는 양 친근한 표정과 말투로 한달음에 다가왔다.
신사 행세라도 하고 싶은지 한쪽 팔을 우아하게 접어 허리를 숙인 남자 가 말했다.
“남부의 햇살처럼 눈부시고 북부의 설산처럼 우아하신 루버몬트 공작부인, 만나 뵈어 솔찬히 반갑지라.”
뭔가 좌충우돌 우당탕탕스러운 남자의 인사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단순히 말투가 이상한 줄 알았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분명히 사투리였다.
전생에서 들어본 적 있는 각 지방 사투리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신기하네.’
마주 보고 인사하려는데 남자가 덧붙였다.
“지는 제국에서 두 번째로 유능한창조 마법사, 록사 트리볼트라고 함다. 지로 말할 것 같으믄……. 억!”
뭐라 더 주접을 떨려던 남자, 록사의 고개가 휙 젖혀졌다.
무슨 일인가 보니 어느새 록사의 뒤 로 다가온 하데스가 그의 머리채를 휙 잡아당긴 모양이 었다.
“전하! 머리 다 빠지겠어라!”
머리를 붙잡은 록사가 입술을 삐죽이며 소리쳤다.
“약 내놔.”
“성질 급하시기는…….”
투덜대며 테이블 가까이로 다가온 록사가 내 앞에 손바닥을 내려놓았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내가 열고 마시 기 딱 알맞은 크기의 약병이 놓여있 었다. 아마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약인 모양이었다.
사실 작아진 몸은 생각보다 불편하 지 않았지만, 막상 당장 돌아갈 수 있 다 생각하니 다행이라 나는 급하게 그것을 받아들어 바로 뚜껑을 열었다.
“아, 잠깐만. 아이샤!”
“부인, 저…….”
뭔가 당황스러워하는 둘의 모습에 의아해 멈칫했지만, 이미 약병은 기 울어진 뒤였다.
물약은 이전처럼 청량감 있게 목구 멍을 타고 넘어갔다.
“뒤돌아, 새끼야.”
“예이!”
왜인지 하데스는 재빨리 외쳤고 록사는 히죽 웃으며 빙글 몸을 틀었다.
동시에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졌 고, 나는 한순간…….
“아악!”
하데스의 테이블 위에 또, 알몸이 된 채로 앉아있었다.
커지고 작아질 때마다 문제는 옷이 었구나. 익숙하지 않아 미처 생각하 질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알몸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민망한 상황은 생기지 않았다.
아니, 민망한 상황 맞긴 한가?
거의 마하의 속도로 달려온 하데스 가 나를 덥석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허공으로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든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안, 보고 있어. 안 보여.”
“으아, 먹기 전에 귀띔 좀 해주시 지. 새, 생각도 못 했잖아요. 이게 뭐 야…….”
“미안, 미안.”
하데스는 나와 바짝 몸을 붙인 그대 로 천천히 움직여 입고 있던 제복 재 킷을 벗어냈다.
더듬더듬 움직이는 손길로 그가 제 복을 내 어깨에 걸쳐주자, 나는 재빨 리 목깃을 잡아 몸을 가렸다.
다행히도 하데스의 재킷은 품도 크 고 기장도 넉넉했다. 벌어지지 않게 여미니 엉덩이까지는 안전하게 가려 주었다.
천천히 하데스와 거리를 벌리고 테이블에서 훌쩍 내려왔을 때, 록사가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불이 확! 붙으셨으면 지는 이 만 돌아가 볼까예?”
“시끄러워, 이 자식아. 아직 돌아보 지 마라.”
“이이이잉? 뭘 더 하실라고 그러시 지라?”
“더 하긴 뭘 더 해? 입 좀 닥쳐.”
하데스는 분주했다.
제복 아래로 훤히 드러난 내 맨다리에 시선이 갔는지 당황해 우왕좌왕하 다가, 곧 자기 의자에 날 앉히곤 담요를 가져왔다.
허리를 숙여 담요로 다리를 칭칭 감 아 모든 시선에서 원천봉쇄 시킨 뒤 에야 후, 한숨 쉬며 만족스럽게 이마를 쓸어냈다.
그러고도 신경 쓰였는지 하데스는 팔 넣어, 하고 자기 제복을 제대로 입 힌 뒤 단추까지 꼼꼼히 잠가주었다.
“저 이렇게 세워놓고 몰래 물고 빨 고 하는 거 아니 시지라? 노총각은 서 러워서 살겠어예?”
“아, 좀! 말이 많아, 진짜?”
“이제 다 됐어요!”
버럭 소리 지르기 바쁜 하데스를 대신해 내가 말하자 록사가 다시 빙글 몸을 틀었다.
제대로 커진 채 마주하게 된 록사들 다시 본 감상은…….
뭐랄까, 만화에서 자주 봤던 힘을 숨긴 실눈 캐릭터 같았다.
겉으로는 영 허술하게 보이는데 창조 마법을 쓸 줄 아는 토속성의 최대 개방 능력자라니.
나만큼이나 흥미가 돋은 모양인지, 록사도 가느다란 실눈을 열어 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빤히 응시했다.
“언제는 여자분들 얼굴 다 똑같이 생겼다고 누가 예쁜지 아닌지 구분 못 하겠다 하시드니만…….”
한참 나를 바라보던 록사는 음흉하 게 웃으며 하데스를 돌아봤다.
“뭐래?”
하데스가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공작부인이 이런 미인이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지라!”
후다닥 테이블을 돌아 내게 다가온 록사가 신사처럼 포즈를 취하고 손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그는 귀족들처럼 손등에 인사를 하고 싶은 듯했다.
내밀어진 록사의 손 위에 오른손을 살짝 올려두자 그가 정중하게 고개 숙여 입 맞췄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지라. 공작 전하의 은혜에 아직까지는 모가지 건재 한 채로 벌어먹고 살고 있는 록사 트리볼트라고 하지라. 만나 뵙게 돼 영 광이어예, 부인.”
“저도요. 말투가 무척 특이하신 분 이군요.”
“하핫! 지가 좀 그라지라? 약을 잘 못 드려버린 것은 고의가 아니었는디 너른 아량으로 용서를 해주시면 솔찬 히 감사하겠지라.”
“아, 괜찮아요. 처음엔 당황했는데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어요.”
나는 너그럽게 록사를 용서한 뒤 걱 정의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록사 씨, 전하께 마력을 많 이 써서 일주일은 연락이 안 될 거라 고 들었어요. 너무 무리해서 오신 거아닌가요? 전 정말 괜찮았는데 …….”
내 말에, 록사의 가느다란 눈이 또 한 번 뜨였다.
그는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다가 갑 자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하데스를 돌아봤다.
그리고는 잔뜩 인상 찌푸린 하데스 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나를 번갈아 바라보기를 몇 번.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으셨간 디 공작부인 같으신분이 이 대악마 랑…….”
“시끄러워.”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록사의 주접이 익숙한 듯, 하데스는 피곤한 표정으 로 그의 로브를 쭉 잡아당겨 내게서 떼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