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한데 전하, 이건 영애가 공자님께 안좋은 영향을 끼칠까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입니다.”
한풀 꺾인 백작의 말이 이어지자 하데스가 다시 고개 들었다.
갑자기 또 뭐라는 거야.
이제는 백작의 입에서 얼마나 더 신기한 개소리가 튀어나올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오늘 오랜만에 만나 뵌 공자님이 얼마나 달라져 있었는지, 이 사람은 너무 놀라서 말이 안 나올 정도였어요.”
역시, 아벨 얘기가 왜 안 나오나 했다.
나만 욕하려는 것 같기에 봐주려고 했는데, 기어코 아벨까지 건드릴 모양.
아벨은 할 만한 소릴 했지 예의 없 게 군 건 아니었지만, 능구렁이 같은 백작이 앞뒤 다 자르고 일러바칠 게 뻔했다.
나는 부디 하데스가 아벨을 오해하 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 하데스는 듣지도 않고 대꾸했다.
“그래, 얼마나 놀랐으면 뒤로 넘어 지기까지 했겠나.”
“어홈!”
안타까운 듯 고개 저으며 비아냥거 리는 하데스에, 백작이 헛기침했다.
나는 순간 터지 려는 웃음을 참기 위 해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제 말을 좀 들어보십시오. 공자님 께서 저에게, 귀족 대우 받으려거든 귀족처럼 행동하라 하시더군요.”
“그랬어?”
“예. 그 경우 없는 언사가 어쩐지 익숙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제 아 내가 에스클리프 영애에게 당했던 모 욕과 비슷하지 뭡니까?”
“진짜 …….”
하데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괜히 긴장한 내가 하데스의 허벅지를 한 번 툭 때렸다.
나랑은 다르다. 아벨이 이유 없이 그런 말을 할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 아줘야 할 텐데.
그러나, 역시 걱정은 무색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어쩌면 이렇게 쪼르르 달려와서 나한테 일러 바치는 것까지 똑같을 수 있지?”
“예?”
“애거사가 내 아내에게 한 소리 듣 고 왔을 때에도 같은 말을 했지만, 이 번에도 내 대답은 똑같아.”
혀를 쯧, 차며 하데스가 덧붙였다.
“아이샤도, 아벨도 이유 없이 그럴리가 없거든. 아벨이라면 더더욱 놀 랍군. 그 소심한 녀석이 그런 말까지 했다니 말이야.”
옳지, 우리 아버님 잘한다!
“애거사는 감히 아벨을 때려서 내 아내에게 한 소리 들었는데, 그대는 무슨 몰상식한 짓을 해서 어린애에게 그런 모욕까지 당했는지 들어나 볼 까?”
여유롭게 웃으며 묻는 하데스에 백작은 대꾸할 말을 잃은 듯했다.
“응? 왜 그런 소리까지 들었냐니 까? 입이 붙었어? 말 좀 해보지?”
“로만 경이 불경하게 굴어서 한 소리 했습니다. 그랬더 니 화가 나신 모양이지요. 아랫것들이 방만하게 굴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것도 가신들의 소 관인데 말입니다.”
“아아…….”
와, 예상은 했지만 정말 능구렁이 같은 늙은이다.
사냥개, 천출, 잡종 삼연타에 부모 욕까지 곁들여놓고 그걸 ‘교육’으로 퉁 쳐버린다고?
이 순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내 처지가 심히 안타까워졌다.
정말로 아자르가 싸가지없게 굴었 다면 모르겠는데, 그는 늙은이의 손 아귀에서 아벨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했던 잘못뿐이었다.
하나 아자르의 욱하는 성정을 아는 하데스는, 백작이 화를 내는 것도 무 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말 했다.
“전쟁터만 굴러먹는 놈이라 거친 건 백작이 이해해줘야지. 그리고 아벨이 그런 말을 한 건, 백작이 교육이 랍시고 했다는 소리가 지나치다고 생각해서 그랬을 테고.”
“전하는 참.”
“…….”
“루버몬트의 명성에는 한 톨도 도 움 되지 않는 이들에게 지나치게 관 대하시군요. 너무 놀랍습니다.”
약간 흥분한 듯한 백작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제가 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도 좀 이해해주시지요. 평생을 충 성해 온 이 사람에게는 목을 자르겠 다느니 그런 모진 소리를 하시더니, 제가 모욕당했다는데 …….”
백작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원래 그런 놈이니 이해해라? 예, 뭐…… 전하가 아끼는 것들만 편애하 시겠다는데 힘없는 가신인 제가 더 말을 얹어 무엇 하겠습니까.”
나는 실시간으로 가해자가 피해자 가 되어가는 상황을 마주하며 황당해했다.
“늙은이의 잔소리처럼 들리시는 걸 모르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다 루버몬트의 번영을 위해 드리는 말씀인 것을…….”
“알겠어. 그만.”
피곤한 듯 이마를 문지르며 하데스 가 백작의 말을 잘랐다.
“아자르에게는 내가 조심하라고 얘 기해두지. 그럼 이제 할 말은 끝났 지? 코뼈가 나갔다고 들었는데 말은 아주 잘하는군. 더 하다간 아주 코가 남아나질 않을 듯하니 그만 돌아가서 쉬어.”
손을 휘휘 저으며 하데스가 백작을 내보내려 했다.
그러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그리고 머무는 동안 따로 찾아오 지 좀 마. 후계자 공표식 준비는 일전에 하던 대로 이어서 진행하도록 하 고. 되도록 공표식까지 재차 방문하는 일 없으면 하니 이번에 마무리 지 으면 좋겠군.”
백작의 잔소리가 어지간히 듣기 싫 었던 모양이 었다.
그러나 제발 오지 말라는 퍽 간절함 이 담긴 부탁에도 백작은 끈질겼다.
“어찌 그 중대사를 번갯불에 콩 구 워 먹듯 준비하겠습니까? 공표식 전까지 열 번은 들러야 하니 이해해주십시오. 루버몬트 공작가의 제1 가신 으로서, 맡은 바 소임은 제대로 해내 야지요.”
“허어…….”
하데스가 내지르는 한숨이 얼마나 길고 묵직했던지 나는 그의 허벅지 위에서 한 번 휘청했다.
빡 돌아버린 그의심리상태가 여실 히 느껴지는 한숨이었다.
진짜 징글징글하다. 방관 중인 나도 이 정도인데 당사자는 무슨 기분일 까.
가스펠 백작은, 실로 강적이었다.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목을 치네 마네 했던 하데스의 경고 도 별로 위협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사건건 말대꾸하며 하데스에게 한 마디도 지지 않으려 했고, 은근히 얄밉게 꼬아 말하는 능력이 수준급.
이따금씩 백작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하데스가 왜 한숨을 푹푹 쉬곤 했 는지 단번에 이해되었다.
아벨뿐 아니라 내 남편 스트레스의 주범이었구나.
“밤이 늦었으니 한 마디만 더 드리고 가지요.”
“그래. 약속 꼭 지켜. 딱 한 마디 야.”
“이번 공표식 때에는 꼭, 가이오니야 상을 세우셔야 합니다. 신께 복종한다는 기도문을 낭독하는 자리도 마 련하겠습니다.”
“뭐야?”
뭔 말인지 나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왜인지 하데스는 지나치게 발끈 했다.
“내가 왜?”
“더 이상 황실의 눈 밖에 날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가문 공식 행 사에 신을 찬양하는 아주 지극히 기 본적인 과정을 생략한 게 몇 번째인 줄 아십니까?”
나는 백작의 말을 곱씹으며 잠시 생 각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제국 황실의 시조였다는 건국신 가이오니아를 향한 찬양 기도 가, 아무래도 제국 귀족들의 공식 행 사에서 암묵적인 필수 절차인 모양이 었다.
떠올려보면 에스클리프도 다르지는 않았다.
아버지도 꼭 용신 가이오니아의 축 복으로, 어쩌고 하며 식전 기도를 올 리고는 했다.
보통 제국인들이라면 신을 믿는 게 당연했다.
제국인들에게만 허락된 핵석의 이 능. 마법 능력.
그것은 건국신 가이오니아가 하사 한 축복임이 분명했고, 그로 인해 제 국인들이 월등한 종족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으니까.
한데 루버몬트는 그러지 않았던가?
떠올려보면 귀족들끼리 만날 때마다 당연하게 나오곤 하는 가이오니야의 축복 어쩌구…… 하는 인사를 루버몬트에 와서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긴 했다.
믿음의 깊이야 다르겠으나, 모두가 건국신 가이오니아를 믿는 게 당연한 이제국에서…….
‘하데스는 아닌 건가?’
딱히 그와 이런 얘기를 나눠본 적 없어 몰랐던 부분이었다.
“황실에서 이번 후계자 공표식을 주시할 거라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더러 황실 눈치나 보면서 어쭙잖은 기도문이나 읊으라고?”
“그게 어떻게 황실 눈치를 보는 일 입니까? 신께서 내린 그 거대한 마력으로 가장 혜택을 받으시는 분이 전하아닙니까?”
“웃기는 소리 하는군. 내 능력은 그 냥 내가 잘나서야. 있는지도 모르겠는 신이 내린 축복이 아니고.”
“전하!”
백작이 빽 소리 질렀다.
“제발 부탁드리건대, 황제 폐하까 지 오시는 자리에서 신을 모독하는 그런 불경한 말은 삼가십시오.”
부들부들 떠는 듯하던 백작은 이내 뭔가를 하데스의 테이블 위에 턱하니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한 마디 남기고, 집무실을 나섰다.
“부디 제국 제일 가문의 수장이 ‘무 신론자’라는 이 무시무시한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는 일 없었으면 좋겠군요.”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무척이나 건 방졌지만 하데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는 적잖이 분노한 모양인지 한참한숨을 내지르다가, 곧 나를 다시 테이블 위로 올려놔 주었다.
무신론자……?
신을 믿고 안 믿고는 개개인의 선택 이긴 하겠지만, 역시 백작의 말대로 그 신이 주신 ‘힘’으로 가장 혜택 받는 하데스가 무신론자라면 논란이 일 만도 했다.
가장 걱정되는 건 황실과의 관계.
신의 후손이기에 황족으로서 정통 성을 부여받는 그들이니 당연히 신을 추앙하는 데 혈안이 되어있을 테 고 …….
‘황실이 막강한 루버몬트를 견제하는 건 당연하니까. 적어도 겉으로는 신을 믿는 척이라도 해주길 바라겠 지.’
신을 믿음은 곧 황실의 정통성을 인 정한다는 것과 다름없으니.
신을 인정한다는 사실을 확인받음 으로써 무시무시한 루버몬트의 목을 조금이 라도 눌러놓을 여지를 찾는 모양이었다.
“무신론자셨군요.”
덤덤히 내뱉는 내 말에 하데스가 길 게 한숨을 뱉었다.
하데스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극히 도 당연하지만, 제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놀라울 만한 일이긴 했다.
나는 고뇌에 빠진 하데스를 물끄러 미 지켜보다가, 백작이 두고 나간 책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에 적힌 자극적인 책 제목이 눈에 들었다.
[불세출의 천재들 ~신을 믿지 않음으로 요절한 이들의 비운에 관한 이 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