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하데스가 가신들을 상대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하루, 나는 종 일 아벨, 아자르와 함께 수다 떠느라 바빴다.
물론 툭하면 ‘영애가 뭐어랬을까 아?’ 하며 여태껏 내가 쌓아올린 이 미지를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아자르를 말리느라 진땀 뻬긴 했으나, 나쁘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제법 친해진 것 같았어. 다행이야.’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아자르의 경계가 조금 허물어진 듯해 다행이었다.
작아진 나를 보고 마녀 어쩌고 했던 걸 떠올려보면, 무슨 꿍꿍이가 있어 북부까지 온 걸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나는 아자르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소설 속에서도 충신으로 묘사됐던 그이니, 하데스와 아벨을 걱정하는 맘에 날 의심할 수도 있지.
아무튼 마음이 편해졌다.
“심심해? 졸려?”
제법 괜찮았던 하루를 되새기고 있는이데, 하데스가 물어왔다.
지금은 그의 집무실이었다.
왜 여기에 있냐고 묻는다면, 하데스 가 나를 데려왔기 때문이지.
딱히 이유는 없는 듯했다.
겨우 가신들의 상대를 마쳤는지 하 루 새 얼굴이 반쪽이 된 하데스는, 무 작정 아벨에게 찾아와 나를 내놓으라 고 했다.
질리도록 수다 떨며 놀아서 좀 피곤 한 몸으로는 얼른 잠들고 싶었지만, 퀭해진 하데스의 얼굴이 걱정스러워 자기 전 말동무나 해줄 참이었다.
“안 심심하고 안 졸려요. 전하는 언 제 주무시게요?”
“이것만 마저 하고.”
그는 집사에게 일임해두었던 성의 재정 문서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의 재정 상태를 꼬치꼬 치 살필 라즐리 백작 때문에 미리 준 비를 해두는 모양이 었다.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다니, 불쌍한 우리 아버님.
“손가락 마사지해드릴까요?”
“뭐?”
집무실 테이블 위에 가만히 앉아있 던 나는, 일어나 하데스의 손에 들린 펜을 뺏어 던져두었다.
안쓰러운 마음에는 어깨라도 주물 러주고 싶었지만, 코딱지만 한 크기 로는 힘들고 이게 최선이 었다.
검지를 잡고 주물주물 문지르는 나를 보며 하데스가 픽 웃었다.
“오늘 어땠어?”
“네?”
열심히 손가락을 주물러주느라 정신없는 내게 하데스가 물었다.
“많이 불편했나?”
“아.”
오늘 하루 코딱지로 살아본 느낌이 어떤지 묻는 모양이었다.
제법 괜찮았지. 나는 웃으며 고개 저었다.
“나쁘지 않았어요. 이렇게라면 일 주일 버티는 것도 어렵지 않겠던 걸요.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아자르에게 바로 걸렸다며. 아벨 녀석…….”
“으으음. 공자님이 조심성 없어서 걸린 거 아니예요. 로만 경이 너무 예리해서 그렇지.”
기어코 아벨의 뒤에 감춘 것을 보겠 다며 집요하게 굴었던 아자르를 떠올 리자 어이없어 웃음이 났다.
큭큭 웃고 있는데, 문득 묘한 표정의 하데스가 시야에 들었다.
“왜요?”
“하루 종일 셋이 놀았어? 꽤 재미있 었나 보지?”
“네. 나쁘지 않았어요. 경이 아마, 갑자기 예비 공작부인이라고 성에 들 어앉은 제가 못 미더웠던 모양인데 다행히 친해졌어요. 이제 걱정하실 거 없어요.”
“그으래?”
“네. 아, 그리고 가스펠 백작님이 뒤로 넘어져서 코 깨졌다는 거 들으 셨어요?”
“응, 뭐. 들었지. 그러게 평소에 운 동 좀 하라니까 말 죽어도 안 듣는 것 같더니.”
“얼마나 웃겼는지 몰라요. 그때 차라리 이렇게 작은 몸으로 숨어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요? 그 자리에 있었으면 웃음 못 참아서 빵 터졌을 거야.”
“으옹. 재미있었나 보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아, 생각해보 니 정말, 가끔씩은 이렇게 작은 모습 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 높이에서 보는 세상이 조금 새로워요.”
“이번에야 실수였다지만 앞으로는 이럴 일 없어. 재미 붙이지도 마. 위 험해 보여서 조마조마해 죽겠는데 무슨.”
“걱정하지마세요. 공자님이 얼마 나 잘 데리고 다녀주셨는지 전혀 문 제없어요. 그리고 작아진 제가 너어 무너무 예쁘대요. 요정 같다 그러시 던걸?”
문득 수줍게 웃으며 건네던 아벨의 칭찬이 생각났다.
자랑하듯 허리춤에 손을 얹고 말하 자, 잠시 침묵하던 하데스가 돌연 테이블 위에 엎드리둣 자리 잡았다.
두 팔을 모아 턱을 괴고 그는 나를 관찰하듯 빤히 응시하기 시작했다.
뭐야, 왕 부담…….
잘생기긴 했지만, 촛불 하나 켜 놓 은 이 묘한 분위기에 말없이 눈 맞추 고 있는 상황은 좀.
어색해진 내가 괜히 웃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확실히.”
하데스는 픽 옷으며 엎드렸던 몸을 일으켰다.
“예쁘네. 요정 같고.”
“네, 네?”
뭐야. 소름 돋았어.
아니, 소름 돋기 전에 살짝…….
‘설렜나?’
조금 애매했다. 예쁘고 요정 같다는 말은 아벨에게도 들었던 건데, 같은 말을 하데스에게 들으니 사뭇 다른 느낌이랄까.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 비버거리고 있는데, 하데스가 쐐기 박았다.
“나한테만 그렇게 보이는 것도 아니겠는데. 아자르한테는 어쩔 수 없 이 걸렸다지만 앞으로 조심해.”
“뭐, 뭔…….”
“내 아내가 다른 놈들 눈에 다 예뻐보인다고 생각하니까 아주 불쾌해.”
“뭐래요.”
그는 정말로 진심인 듯했다.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이 새끼가 빨 리 연락이 와야 할 텐데 …….’ 하고 연신 구시렁댔다.
아무래도 속칭 ‘약쟁이’라 불리는 그 토속성 능력자를 떠올리는 모양이 었다.
똑똑.
민망해지는 분위기에 슬슬 자리를 피해볼까 고민하고 있던 와중, 다행스럽게도 낯선 기척이 들었다.
반가운 나와 달리 하데스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소리쳤다.
“누구야?”
“전하, 접니다.”
아, 타이밍은 좋았지만 안타깝게도 방문객은 보기 싫은 얼굴이 었다.
이제는 목소리만 들어도 누구인지 알겠는 재수 없는 늙은이, 가스펠 백작.
나만큼이나 짜증이 훅 치미는지 하데스는 쯧, 혀를 한번 차곤 손을 뻗었다.
냉큼 내밀어진 손바닥 위에 올라서자 하데스는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제 허벅지로 옮겨놓았다.
“들어와.”
일단 자리를 옮기긴 했지만, 적당한 자세를 찾지 못한 나는 하데스의 허벅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앉아 자꾸 움직였다.
얼핏 볼 때도 튼튼한 듯했지만 막상 앉아보니 그의 허벅지는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탄탄한 허벅지는 살은 하나도 없고 다 근육뿐.
앉은 내 엉덩이가 아파올 정도였다.
갑자기 멈칫하던 하데스가 끼익, 열 리는 문을 바라보다가 다급히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꼬, 꼼지락대지 좀 말아봐.”
“불편해서 그래요. 뭔 허벅지에 다 근육뿐이야?”
“아무튼 가만히 좀 있어.”
하데스는 중얼거리고는 다시 태연 한 척 고개 들었다.
저벅저벅, 백작의 걸음소리가 가까 워졌다. 그가 근처에 있는 의자를 끌 어 마주 보고 앉는 소리가 들렸다.
집무실의 네모 반듯 널찍한 테이블은 하데스의 허벅지 위에 앉은 나를 가리기에 충분했다.
백작이 먼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에스클리프 영애는 오늘 가신들이 온다는 연락을 받지 못하셨습니까? 얼굴 한 번 비치질 않으니 심히 당황스럽군요.”
역시 가신들의 행렬을 마중 나오지 않은 내 태도부터 지적할 줄 알았다.
책잡힐 짓은 하지 않으면서, 늙은이 가 허튼소리 하면 톡톡히 본때를 보 여주려던 나는 아쉬움에 한숨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몸이 안좋다고 말했잖아. 누워서 요양 중이라 머무는 중엔 얼굴 볼 일 없을 듯하니 이해해주 게.”
“도대체가 벌써부터 공작부인이라 도 되는 양 구시는군요.”
“못 할 것도 없지. 아무튼 내가 나 오지 말라고 당부해둔 거니 두말은 마.”
“전하, 이렇게 영애를 싸고도시는 게 능사는 아닙니다. 아랫것들에게 위엄 없는 군주로 비칠까 이 사람은 걱정이 많습니다.”
“별…….”
“당장 내일이라도 가신들과 인사 나누게 하시지요.”
“아프다니까? 왜 자꾸 여러 말 하게 만드나?”
“전하.”
“됐고, 온 목적에 맞게 굴어. 공표 식 준비를 겸한 정기 방문이었지, 내아내에게 시아버지 노릇하러 온 건아니지 않나?”
“허어…….”
“지금 설마 그것 때문에 이 늦은 시 간에 여길 찾아왔어? 영애가 못마땅 하다는 소릴 하려고? 그러면 나한테 좋은 소리라도 들을 줄 알았나? 왜 이렇게 사람이 멍청해?”
“뭐가 얼마나 편찮으시기에 그 몇 분 얼굴 비치는 것도 힘들단 말입니 까? 대놓고 말은 안 해도 가렌 백과 라즐리 백이 얼마나 불쾌해했는지 아 십니까?”
“아니, 딱 보면 모르나? 툭 치면 쓰 러지게 생겼잖아. 뭐 그대들 얼굴 보 기 싫어 거짓말이라도 하고 숨어있는 줄 아는 건가?”
“진실은 영애와 전하만 알겠지요. 아무튼 가신들 눈도 있고 하니 내일 은 꼭 얼굴을 비치라 전해주십시오.”
“백작.”
그때까지만 해도 적당히 백작을 받 아주는 듯하던 하데스의 목소리가 얼 음장처럼 굳었다.
듣고 있던 나도 움찔할 정도였는데, 마주하고 있는 백작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했다.
목소리만큼이나 험악하게 굳은 하데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나는 절로 긴장했다.
“결혼 얘기가 나올 때부터 내가 몇 번을 참았는지, 알고는 있지?”
“…….”
“충성스러운 가신 대우해주는 것 도, 나는 이제 좀한계 같아.”
무서워. 무섭다.
이게 바로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던 ‘폭군’ 루버몬트 공작의 본모습인가!
무서웠지만 분노의 대상이 내가 아니었기에 조금은 흥미로웠다.
팝콘 먹으며 흥미진진한 영화 관람하는 기분으로, 나는 계속 멍하니 하데스를 올려다보았다.
“이 이상 내 아내가 신경 쓸 일을 만든다면, 솔직히 내가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르겠군.”
자꾸 등장하는 저놈의 ‘아내’ 발언에 괜히 얼굴 붉히는 나를 아는지 모 르는지, 하데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 었다.
“이제는 눈치껏 좀, 협조해주면 좋 겠는데 말이야.”
그는 꼭 손바닥 안에서 달아나려고 몸부림치는 초식동물을 바라보는 맹 수 같았다.
어디 한번 발버둥 쳐보라는 듯, 느슨하게 몸을 젖히고는 턱을 치며들며 말했다.
“더 나빠질 이미지도 없긴 하지만 …….”
“…….”
“……몇백 년을 충성해온 가신 가 문 목을…… 다 잘라버린 미친놈이라는 꼬리표까지 얻고 싶진 않으니 말이야.”
오, 세상에.
말을 마치고 피식 웃는 하데스를 바 라보면서 나는…….
‘너무 멋있어.’
또 한 번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이 남자의 덕질 포인트는 도대체 몇 개인 거지?
불쾌한 듯 백작의 잡소리를 사전에 차단하는 하데스의 모습은 실로 모든 아내들이 바라는 완벽한 남편 상이었다.
세상에 이런 남자들만 있다면 시집 살이 같은 단어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텐데.
전생에도 이번 생에도 남자 한 번 못 만나본 내가, 그 어떠한 시행착오 없이 이렇게 성공한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진짜 멋있다. 하데스 마누라 자리는 솔직히 얻어 걸린 건데……. 천지 신명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 다…….”
괜히 뿌듯해져 코끝이 찡해진 내가 칭찬하듯 하데스의 허벅지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에 한껏 분위기 잡던 하데스가 움 찔했다. 그는 태연한 척 웃더니 돌연 고개를 살짝 숙여 나와 눈을 맞췄다.
왜인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하데스가 입만 움직여 말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이상하게 얼굴을 우그러뜨리는 하데스를 보며 나는 의아했다.
‘왜요?’
칭찬해줘도 난리일세.